10. 신념의 우물, 우물 밖 세상

운명과 자유_자유 편

by 황태

이수와 축구경기를 본 뒤로 한 달이 흘렀다. 요즘 들어 아침에 이수의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봉세는 이수가 이제는 아침에 커피를 마시지 않는 것일까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혹시라도 자신을 피하는 것일까 하는 상상은 감히 하지 않았다. 이수에게 자신이 그토록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스스로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슬프게도 봉세는 객관적인 판단이 너무나 쉬운 사람이었다.


이수와는 연락을 하는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봉세는 그날로부터 훌쩍 한 세월은 뛰어 넘어온 듯한 느낌이 든다 생각했다. 한 사람과 한 사람 사이 한 방향으로만 살포시 솟아오른 애정 한 줄기 때문에 평소와 같은 거리감에도 세상과 단절된 것만 같은 막막함이 찾아왔다. 서로 마주 보며 웃었던 또 그랬기에 포근한 향기가 가득했던 그날 저녁은 이수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을까. 자신에게만 솜털 가득한 씨앗으로 남아 심긴 것일까.


봉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졌다. 모든 일은 자신의 계획 하에 이루어졌고, 모든 목표는 자신의 노력 앞에 내려와 나란히 앉았다. 오직 이수만이 봉세를 제자리에 멈추도록 만들었다. 운명에 기대어 볼 수도 없었다. 그동안 살아온 삶이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나아갈 수도 없었다. 회사라는 장소가, 사람의 마음이라는 장치가 봉세의 두 발을 옥죄어 붙잡았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봉세는 괴로웠다.


봉세는 이렇게 이수에게 애달퍼질 줄 몰랐지만,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이미 우물에서 뛰쳐나와 운명이라는 세계에 발을 한 발짝 담근 것일지도 모른다. 모른다. 봉세는 모른다. 그저 우물 밖 까막눈의 세계에서 희미한 글자의 형체들을 눈으로 어루어 볼 뿐이었다. 신념의 우물 속에서 벗어나 낯선 이방인으로써 존재할 뿐이었다.


봉세는 이수에게 주말에 동주와 셋이서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다. 이미 자신과 동주를 친한 오빠쯤으로 생각하고 있어 보이는 이수는 흔쾌히 자신의 제안을 수락했다. 아니 동주는 남자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자신의 제안을 수락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봉세는 이수에게 무언의 질문을 건네고 싶었다. 그날의 너는 지금의 너와 다른지. 그날의 너를 그 순간에 묶어놓았는지. 그렇다면 묶인 너를 풀어 지금 자신의 앞으로 데려와 줄 수 있는지.


봉세는 우물 밖 낯선 풍경이 따뜻한 온기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온기를 따라 더듬더듬 손을 뻗어 보았다. 손바닥에 마주한 따스함은 봉세를 이끄는 것 같았다. 이끌림을 따라 손을 움직여 보았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세상이, 눈으로 보지 못할 세상의 실루엣이 봉세의 손에 맺혔다. 아직 자신의 마음을 붙들어 놓고 있는 그것이 자신의 눈을 뜨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봉세는 알았지만 도통 그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의 손안에 맺힌 따뜻한 바깥세상이 우물 안으로 전하는 메시지가 들려왔다.


동주가 주말에 급한 일이 생겨 참석하지 못한다고 연락했다. 이수는 무슨 일인지 둘이서도 괜찮다고 그대로 놀자고 했다.


약속한 당일 봉세는 이수의 집 앞에 차를 주차해 놓고 기다렸다. 보다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오전 10시에 만나자고 고집을 피운 자신이 떠올랐다. 이수가 주말 낮인데 늦잠을 자지 않아도 괜찮냐고 걱정스레 물어왔지만 차가 막힐 수도 있다며 고지식하게 답변했다. 봉세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는 오늘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이수가 조수석 문을 열고 들어왔다. 멀리까지 와주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집에서 내린 커피를 건넸다. 텀블러 속에서 얼음들이 찐링 하는 종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종소리는 커피 한 잔에 얽힌 이수의 호감을 읽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드라이브도 할 겸 양주로 넘어갔다. 꽤 유명한 두부 전문점에 가기로 했다. 어색할 것을 우려한 탓인지 이수가 먼저 제안한 음식이었다. 봉세는 오히려 반가웠다. 데이트라고 명시된 듯한 음식들 사이에선 긴장에 굳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봉세는 자신의 부모님 얘기까지 하게 될 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바락바락 끓어오르는 두부찌개를 사이에 두고 밑반찬을 집어 먹으며 봉세는 마음이 편안히 뭉개지는 것을 느꼈다. 또 어색한 것을 싫어하는 성격 탓인지, 남을 배려하는 것이 익숙한 심성 탓인지 따뜻하게 웃어주면서 자신의 말에 리액션해주는 이수를 앞에 두고 봉세는 위로받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소개팅 자리에서 가장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인 어두운 가정사지만 봉세는 자신을 멈출 수 없었다. 이 순간 이수는 자신을 따뜻하게 위로하는 어머니와도 같이 느껴졌다.

"오빠 그동안 너무 많이 힘들었겠다. 그래서 오빠가 스스로에게 엄한 것 같다는 느낌이 났나 봐. 이제 조금 풀어주어도 되지 않을까? 이제 이루고자 하는 것들도 다 이루었고, 어려웠던 부모님과도 적정한 거리가 생겼잖아."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런 상황이긴 하네. 하지만 큰 목표가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항상 미리 준비하고, 예측한 대로 계획하고, 계획한 대로 실행하면서 살아가거든. 이러한 삶의 양식이 정해져 있는 이상 네가 느끼는 스스로를 옥죄는 듯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지 않을까?"

"스스로를 옥죄다니.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느낌은 아니야. 그래도 오빠가 뭔가 항상 틀에 고정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기는 해. 뭐랄까 책임감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겠다. 오빠의 삶을 오빠가 책임져야 한다는 그런 결심이 강하게 풍겨 나온달까."

"책임감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보긴 했는데, 네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 나는 조금의 내 삶도 놓아버릴 자신감이 없는 것 같다. 내 삶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아."

"삶을 놓아버릴 필요는 없지만 일부분 맡길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 오빠 부담감을 내려놓고 작은 부분이라도 흘러가는 흐름에 또는 오빠를 향한 운명에 맡겨보는 건 어때?"

"운명? 이수 너는 운명을 믿어?"

"응 오빠. 나는 운명을 믿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운명은 존재한다고 생각해. 또는 나를 향한 계획이라는 표현으로 바꿔볼 수도 있겠다. 인간이 스스로 계획하지 못하는 영역이 분명히 있다고 나는 생각해. 그래서 나는 내 삶을 완전히 놔버리는 것은 아니어도 맡겨보려고는 하고 있어. 운명에, 흐름에, 어떤 계획에, 흘러오는 바람에, 떠내려가는 물줄기에, 풍겨 나오는 향기까지에도 내 삶을 맡겨보는 거야."

"이수 네가 낭만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네."

"오빠 많이 놀랐지? 내가 좀 낭만주의자에 운명론자야. 모든 게 계산하에 딱 맞아떨어지는 오빠랑은 완전 반대지."

"그러게 너랑 나는 정말 반대네."


봉세는 이수의 색다른 모습에 놀랐고 또 한 번 반하는 것 같았다. 너와 내가 반대라서 너에게 끌리는 것 같다는 말은 차마 삼켰지만 시선이 더욱 강렬해지는 것은 차마 숨기지 못했다. 자신의 어두운 이야기를 담담히 들어줄 뿐만 아니라 생각지도 못했던 답변에 몽환적인 별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 사람의 실루엣이라는 테두리에 가둬지지 않고 빛이 새어 나오는 환한 사람. 이수는 특별했다.


식당에서 나와 봉세와 이수는 영화관으로 향했다. 식사자리에서 자신은 혼자 영화를 보지 못한다는 이야기에 놀란 이수가 제안한 일정이었다. 전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난 뒤 2년 만에 처음으로 보는 영화였다. 이 사실이, 영화를 함께 보러 가는 행위에 얼마나 큰 무게가 서렸는지 이수는 눈치챘을지 봉세는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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