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과 자유_운명 편
동주는 솔직히 이수 자신의 이상형에 완벽하게 부합했다. 훈훈한 외모, 여자를 너무 잘 알아서 익숙한 제스처. 여자들을 마르고 닳도록 만나 이수를 오래도록 아프게 했던 전 남자친구가 생각나기는 했지만, 마음이 끌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수는 전형적인 나쁜 남자에 마음을 끌리는 양과 같은 족속이었다.
반면에 청렴한 선비와 같은 봉세는 이수의 눈에 들 리가 없었다. 대쪽같이 바르고 또 순수했다. 동주에게서는 이미 진액이 되어 흘러나와 버린 순수함이 봉세에게 담겨있었다. 자신과 비슷한 향기가 나는 봉세를 이수는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그들은 동족이었다.
동주가 축구경기를 보러 오라는 말에 이수는 설레왔다. 남녀사이에 존재한다는 그 친구의 의미인가. 아니면. 갈 수 있는 방법은 봉세와 함께 가는 수밖에 없었다. 다만 저 우직한 사람이, 벽 속에서 끌어내기 힘들어 보이는 사람이 자신과 일요일에 선뜻 축구경기를 보러 가겠다고 할는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동주의 제안에도 확답을 하지 않은 채 웃음만 짓고 있지 않는가.
이수는 자신의 마음속에 퍼져버린 설렘의 기운을 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진담 반 농담 반으로 토요일에 동주와 봉세의 단체 메신저 방에 연락을 했다.
‘봉세오빠, 일요일에 같이 동주오빠 축구 경기 보러 가지 않을래?’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봉세에게 연락이 왔다.
‘좋아.‘
동주도 자신도 깜짝 놀랄만한 봉세의 연락이었지만 애써 무시한 채 이수는 다음날의 설렘에 집중했다.
일요일 오후가 되어 응원을 위한 스케치북과 경기를 볼 동안 마실 커피를 준비하고 축구장에 도착했다. 앞서 전화를 나눈 봉세가 저 멀리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성격답게 항상 정장바지와 정장구두를 고수했던 봉세였지만 오늘은 캐주얼한 셔츠와 면바지 차림이었다. 주말에도 단정한 그였다. 다만 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지금 이 순간의 모습을 이수는 자각하게 됐다.
지금 이 모습은 동주와 자신이 주목되지 않을 것이다. 봉세와 자신이 함께 있는 것이 주목될 것이다. 그 순간 이수는 봉세가 그저 회사에서 조금 잘 알며 왜인지 편한 오빠에서 이성으로 바뀌어 보이는 것을 느꼈다.
경기를 볼 때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자신과 다르게 봉세는 덤덤했다. 사실 봉세는 경기를 보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경기를 보며 기뻐하고 가슴 졸여하는 자신의 반응을 보고 있었다. 때때로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이수는 경기에 대해 물었지만 봉세는 잘 모르겠다고 일관했다.
경기가 끝나고 감독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주를 뒤로 하고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동주를 보기 위해, 동주를 응원하고 싶어서 찾아온 경기장이지만 경기가 끝나자 온통 봉세의 노골적인 관심에 신경이 몰렸다. 봉세는 잘 모르는 것 같았지만 이수는 틀림없이 느껴졌다. 위험했다.
더욱 선을 명확히 하기 위해 데려다주겠다는 봉세를 만류하고 빠르게 뒤돌아 걸어갔다. 횡단보도까지 걸어가서 택시를 잡을 참이었다. 그때 봉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이수야 택시 잡지 말고 기다려. 데려다줄게.”
이수는 완강히 거절했지만 눈앞에 흰색 봉세의 세단이 거칠게 차를 돌려 건너편에 세우는 것이 보였다. 이수는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는 어린아이가 된 심경으로 홀린 듯이 봉세에게 뛰어갔다.
봉세와 주말 저녁에 나란히 차 안에서 대화하하는 것은 생각보다 묘했다. 일요일 저녁 드라이브는 둘 사이에 세워져 있었던 가벽을 허물고 봉세와 이수 자신을 한 공간에 밀어 넣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이수는 봉세 옆에 앉아있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 보장된 시간이 이수는 퍽 달가운 것 같았다.
말이 많지 않은 봉세였지만 이수는 쉴 새 없이 말을 걸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눈앞에 펼쳐지는 출렁이는 가로등 빛 때문에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이었다. 출렁이며 빛나는 빛위로 부드럽게 나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애써 눈을 돌렸다. 웃으며 자신의 말을 들어주거나 대답하는 봉세는 자신이 알 던 사람과 다른 사람 같았다. 무언가 한 꺼풀 벗겨진 내밀한 모습을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 이수는 부끄러워졌다.
어느새 집에 도착했고 이수는 데려다 줌에 대한 보상을 주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마주 보고 환히 웃었다. 말간 웃음으로 봉세가 답했다. 차에 내려 걸어가는 와중에도 봉세의 차가 출발하고 있지 않는 것이 느껴졌다. 이수는 봉세의 마음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음은 없었다. 이수와 봉세는 서로의 단호한 선을 쉽사리 넘어갈만한 재치도 능글맞음도 없었다. 그저 울타리 안에서 서로를 바라볼 뿐일 것이다. 이수는 봉세를 이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한 여름밤의 꿈과 같은 일인 것이다. 더 이상 엮인 일은 없다. 봉세는 자신의 운명이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