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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형 Nov 07. 2024

2. 운명을 믿으세요?

순간 예찬 일기

 산책하는 걸 좋아한다. ‘산’과 ‘책’이란 발음을 내뱉을 때 앞니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 나오는 것 같다. 공기를 가르며 걸어 나가는 상쾌함에 일주일에 4번 정도는 산책을 한다. 지난 추석 명절에 대전에서는 밤 산책을 나섰다.


 밤의 ‘ㅂ’에는 무거운 침잠함이, ‘암’이란 발음에는 어두움이 느껴진다. 그리고 ‘바’를 받치고 있는 ‘ㅁ’에는 밖으로 내보일 수 없는 케케묵은 고민들이 담겨있는 것 같다. 이러한 ‘밤’에 하는 산책이라니, 왠지 진지해야 할 것 같고 또 남몰래 숨겨 놓은 아픔을 풀어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명절 음식을 잔뜩 먹었기 때문에 든 생각일까? 무거운 배를, 체할 것 같은 낯빛의 어두움을 해소해야 하는 밤 산책이었다.


 잔뜩 비장한 마음으로 집 밖을 나섰다. 그런데 온몸에 휘감기는 쾌적한 바람이 ‘밤 산책’에 젖은 비장함을 말려주었다. 상쾌한 기분을 만끽하며, 운명을 바꾸는 사람처럼 듣고 있던 우울한 발라드를 밝고 쾌활한 음악으로 바꾸었다. 앞에 보이는 스타벅스에서 커피도 한 잔 샀다. 한 손에는 시원한 커피와 다른 한 손에는 걱정이 없는 오늘 밤을 들고 그저 걸어 나가면 됐다.


 

 시간과 공간의 감각을 느낄 새 없이 그저 길을 안내하는 낙엽의 소리를 따라 걸었다. 발 밑이 붕 떠있는 느낌이었다. 몽글거리는 낙엽 위를 유영하며 나아가다 보니 갑천이 보였다. 대전의 갑천은 서울의 한강과 같다는데 나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넓게 펼쳐져 있는 평지 위로 흐르는 실개천과 부드럽게 번져가는 억새, 어둠 속에서도 싱그러운 연녹색빛의 버드나무가 보였다. 화려하지만 모든 이들에게 무심한 한강과는 달리 낮은 하늘 아래 직사각형 공간 안에는 다정한 따뜻함이 가득 차 있었다.


 

 속이 좋지 않아서 동아줄을 부여잡는 심정으로, 홀로 아픔을 풀어나가기 위해 나온 밤 산책이었다. 그런데 쾌적한 바람 탓인지, 시원한 커피 탓인지 운명이 바뀌었다. 신비롭고 은밀한 공간에 문을 열고 들어온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공간에 어울리는 운명 같은 일이 일어났다.


 내 귓가에 울리던 노래와 같은 노래가 이어폰을 꽂지 않고 지나가던 사람에게서 울려 퍼졌다. (심지어 노래 제목은 ‘묘해 너와’였다. 운명이 아닐 수 없다.)

 

 운명 같은 순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은 부풀고 있었고 가로등 별빛은 규칙적으로 하늘에 박혀 있었다. 그 아래 어둠 속에서 지상의 경계를 자전거 불빛이 드러내고 있었다. 이 모든 빛이 어우러져 번들거렸고 그 빛나는 공간에 나는 하나로 녹아들어 있었다. 나도 빛나고 있었다.


운명 같은 순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는 운명을 믿는다. 운명이라고 의미 부여를 한 순간, 무심했던 순간은 색채를 덧입게 되고 그 순간은 한 편의 시가 되어 기억 속에 고정된다. 운명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어떨까? 심심한 일상에 의미부여를 하는 거다. 그렇게 일상은 알록달록한 빛을 띠게 된다.


 나는 행복할 운명이다.


운명이라고 의미 부여를 한 순간,
무심했던 순간은 색채를 덧입게 되고
그 순간은 한 편의 시가 되어
기억 속에 고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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