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너무 오래 버텨온 사람
비는 새벽부터 내리고 있었다.
창문을 따라 흘러내리는 빗방울이 유리 위에 얇은 길을 만들었다. 그 길은 겹치고 갈라지며 조금씩 모양을 바꿨다. 그는 그걸 멍하니 바라보다가 시계를 봤다. 아직 여섯 시 전이었다. 이런 시간에 눈이 떠지는 건, 몸이 먼저 다음 날을 준비한다는 뜻이었다.
부엌으로 나가 불을 켰다. 형광등이 켜지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했다. 냉장고 문을 열자 찬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그는 계란을 꺼내 놓고 밥솥을 열었다. 밥에서 올라오는 김이 손가락을 스쳤다. 따뜻했지만 기쁘지 않았다. 따뜻함은 요즘 그에게 ‘필요한 것’에 가까웠지, ‘좋은 것’은 아니었다.
전기포트가 끓기 시작할 즈음 폰이 진동했다.
카드사 알림. 학원비.
그는 화면을 한 번 보고, 잠깐 멈췄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 또 나갔네.”
말이 나오는 순간 자신도 조금 놀랐다. 집 안은 조용했고, 누가 듣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지만 요즘은 이런 말이 가끔 저절로 새어 나왔다. 머릿속에만 있으면 더 무거워지는 것들. 입 밖으로 내뱉으면 아주 조금 가벼워지는 것들.
현관에서 구두끈을 조여 매며 아이 방 문틈을 봤다.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은 채로 살짝 열려 있었다. 안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그는 문을 더 닫아주려다가, 소리가 날까 봐 손을 멈췄다. 대신 아주 작게 말했다.
“잘 자.”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그 숨소리가, ‘괜찮아’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로비는 밝았다. 날씨가 흐려도 건물 안은 늘 똑같은 밝기였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같은 부서 직원이 우산을 털며 말했다.
“차장님, 비 오는 날은 더 오지 않나요.”
“뭐가요.”
“민원요. 비 오면 다들 예민해져서.”
그는 짧게 웃는 척했다.
“비 탓일까요. 그냥… 다들 힘든 거겠죠.”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말이 대화의 끝은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 알고 있었다. ‘힘들다’는 말이 여기에서는 자주 쓰이지 않는다는 걸. 힘들어도 견뎌야 하고, 견디는 사람이 이기는 것처럼 굴러가는 곳이라는 걸.
사무실에 들어서자 전화벨 소리가 이미 한 번 울렸다. 누군가가 받았다가, 곧바로 다른 전화가 이어졌다. 그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모니터에 뜬 처리 목록을 봤다. 빨간색 표시가 늘어 있었다. ‘기한 임박’, ‘재촉 전화’, ‘상급자 보고’.
옆자리 대리가 서류를 들고 다가왔다.
“차장님, 이거요. 어제 민원 건 다시 올라왔습니다. 담당 부서에서는 원칙대로 처리했다는데…”
“원칙대로 처리하면 민원이 안 올라오나.”
대리는 작게 웃었다가, 곧 표정을 정리했다.
“이번엔 좀 세게 오더라고요. ‘차장 바꿔라’까지 나왔어요.”
그는 의자에 앉으며 넥타이를 한 번 만졌다. 목이 조금 답답했다.
“바꾸면 뭐가 달라지겠어요. 그래도… 오늘은 내가 받죠.”
대리는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물었다.
“차장님, 괜찮으세요?”
그 질문이 갑자기 낯설었다. 괜찮으냐는 말은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어느 순간부터 잘 듣지 못했다. 특히 회사에서 듣는 ‘괜찮으세요’는 더 낯설었다. 그는 잠깐 눈을 깜빡이다가 말했다.
“괜찮죠. 뭐… 다들 그렇잖아요.”
그는 스스로도 그 대답이 너무 익숙하다는 걸 알았다.
첫 번째 전화는 비교적 정돈된 목소리였다.
“여기 ○○ 처리 담당자 맞아요?”
“네. 말씀하세요.”
“지난주에 접수한 건, 기한이 오늘까지잖아요. 그런데 아직 연락이 없어서요.”
그는 화면을 확인하며 말했다.
“현재 담당 부서 검토 중이고요. 오늘 중으로 결과 안내가 나갈 예정입니다.”
“‘예정’이요? 제가 지금 ‘예정’이라는 말을 몇 번째 듣는지 아세요?”
그는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확인해서 오늘 안으로—”
“죄송하단 말 말고요. 언제, 누가, 무엇을.”
그는 종이에 메모를 하며 조용히 말했다.
“네. 지금 담당자 확인하고, 정확한 시간 안내드리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아직은 버틸 수 있는 정도였다.
두 번째 전화는 목소리 톤이 달랐다. 처음부터 날카로웠다.
“차장님 연결해요.”
“제가 차장입니다.”
상대는 잠깐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비웃음에 가까웠다.
“아, 본인이세요? 그럼 얘기가 빠르겠네.”
그는 모니터를 똑바로 바라봤다. 이런 목소리는 대체로 이미 결론을 정해놓고 온다. 대화는 사실상 통보에 가깝다.
“무엇이 불편하셨는지 말씀해주시면—”
“불편? 지금 그걸 ‘불편’이라고 표현해요? 저는 지금 손해가 났는데요. 손해. 누가 책임질 건데요?”
그는 절차를 설명했다. 관련 규정과 담당 부서, 처리 흐름. 말을 할수록 상대는 더 격해졌다.
“규정, 규정, 규정. 규정이 사람 살려요? 차장님이시라면서요? 그럼 해결을 해주셔야죠. 이걸 왜 제가 계속 설명해야 합니까?”
그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해결’이라는 단어는 이곳에서 마치 주문처럼 쓰였다.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고, 해결해야만 하는 것 같고, 해결하지 못하면 죄인이 되는 단어.
“말씀하신 부분은 제가 이해했습니다. 다만 해당 건은—”
“이해요? 이해하지 말고 해결을 하라고요.”
그는 목구멍이 딱딱해지는 걸 느꼈다. 자꾸만 ‘죄송합니다’를 꺼내고 싶었다. ‘죄송합니다’는 그에게 일종의 자동 응답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 말을 가장 싫어한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상대는 그걸 ‘회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최대한 단정하게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담당 부서에 즉시 확인을 넣고, 처리 속도를 올리는 것입니다. 결과 자체를 바꾸는 건 규정상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안 된다는 거네요? 그럼 차장이라는 사람이 왜 있어요? 앉아있기만 하면 끝이에요?”
그는 잠깐 고개를 숙였다. 모니터 아래 달력에 시선이 갔다. 오늘은 수요일이었다. 수요일이라는 사실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런데도 달력을 보는 것은, 마음이 잠깐 다른 곳으로 도망가고 싶어서였다.
상대는 말을 이어갔다.
“제가 지금 세 번째 전화예요. 세 번째. 그런데 매번 말이 달라요. 누가 책임지는 겁니까? 이 조직은 책임지는 사람이 없어요.”
그는 작은 침묵 뒤에 말했다.
“제가 책임지고 확인하겠습니다. 오늘 중으로, 정확한 안내 드리겠습니다.”
“오늘 중으로요? 오늘 중으로가 몇 시까지예요? 퇴근하면 끝이잖아요.”
그는 그 말에서, 상대가 사실은 ‘해결’보다 ‘불안’을 말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불안은 늘 공격의 형태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걸 알아도, 받아내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저녁 6시 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약속드리겠습니다.”
“약속… 하셨죠? 차장님 이름 제가 기록해둘게요.”
상대가 끊기 직전 덧붙였다.
“그리고요, 죄송하단 말 하지 마세요. 그 말 들으면 더 화나요.”
통화가 끊겼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손바닥을 봤다. 땀이 차 있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몸은 뜨거운 물에 데인 것처럼 달아올랐는데, 손끝만 차갑다는 게 이상했다.
옆자리 대리가 조용히 물었다.
“차장님… 괜찮으세요?”
그는 잠깐 대리를 봤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은 척하는 게… 일이잖아.”
대리는 웃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점심시간이 되어도 그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일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사람들 틈에 섞여 웃고 말할 기운이 없어서였다. 누군가 다가와 말했다.
“차장님, 같이 가시죠.”
“먼저 가세요. 나… 조금만 더.”
“또 편의점이세요?”
“응. 뭐… 익숙하니까.”
그가 도시락 뚜껑을 열자, 플라스틱 특유의 냄새가 났다. 밥은 미지근했고, 반찬은 짜고 달았다. 그는 씹으면서도 방금 통화의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차장님이시라면서요.
해결을 해주셔야죠.
왜 있어요.
책임지는 사람이 없어요.
그 말들은 ‘나’를 공격하기보다는, ‘내 자리’를 공격하는 것 같았고, 이상하게도 그는 그 둘을 분리하기가 어려웠다. 자리와 자신이 한 덩어리처럼 붙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는 도시락을 반쯤 남기고 덮었다. 배가 고픈 건 맞는데, 먹는 감각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배고픔보다 더 큰 감정이 안에서 부풀고 있었다.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 지겨움, 피로, 체념, 불안, 그리고… 어딘가 서늘한 슬픔.
퇴근 시간이 되자 비는 더 굵어졌다. 차에 타자마자 유리창이 흐려졌다. 히터를 켜고 앞유리를 닦았다. 손바닥으로 유리를 문지르다가, 자신이 지금 무엇을 닦고 있는지 잠깐 헷갈렸다. 유리인지, 하루인지, 자신인지.
신호등 앞에서 차가 멈췄다. 그 순간, 가슴이 조여왔다. 갑자기 숨이 얕아졌다. 목구멍이 좁아지는 느낌. 그는 셔츠 단추를 하나 풀고 창문을 조금 내렸다. 차가운 공기가 들어오자 숨이 아주 조금 들어왔다.
그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아… 잠깐만. 잠깐만…”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 신호가 바뀌었다. 그는 천천히 출발했다. 집으로 가야 하는 방향이 있었는데, 핸들은 이상하게도 다른 쪽으로 돌아갔다. 무의식이 손을 끌고 가는 것처럼.
골목 끝에 작은 불빛이 보였다. 익숙하지 않은 길.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불빛이 낯설지 않았다.
작은 빵집이었다.
그는 차를 세우고 한참 앉아 있었다. 와이퍼가 일정한 속도로 유리 위를 지나갔다. 밖은 흐렸다. 빗소리는 끊기지 않았다.
‘집에 가야 하는데.’
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딱 오 분만…’
오 분이라는 말은 스스로를 속이는 말이었다. 그는 오 분이면 괜찮아질 리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오 분이라는 말이 필요했다. 들어가도 된다는 허락이 필요했다.
그는 우산을 들고 내렸다.
문을 여는 순간 작은 종이 울렸다.
딸랑.
그 소리는 이상하게도 날카롭지 않았다. 오히려 부드러웠다. 마치 누군가 “어서 와요”라고 낮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안은 따뜻했다.
빵 냄새가 났다. 버터와 구운 밀가루, 약간의 구수함. 배를 자극하는 냄새가 아니라, 마음을 느슨하게 만드는 냄새였다.
카운터 뒤에는 사람이 있었다. 과하게 친절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표정. 그 표정이 오히려 낯설었다. 회사에서는 대부분 ‘업무용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여기의 얼굴은 ‘사람 얼굴’에 가까웠다.
“어서 오세요.”
그는 잠깐 서 있었다. 어떤 빵을 고를지 몰라서가 아니라,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였다. 그러다 천천히 말했다.
“뭔가… 따뜻한 게 먹고 싶네요.”
말이 끝나자, 본인이 한 말이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 들어 곧 덧붙였다.
“배가 고픈 건 아닌데… 그냥… 조금 따뜻했으면 좋겠어요.”
카운터 뒤 사람은 바로 묻지 않았다.
잠깐 그를 바라봤다. 아주 짧은 시간인데도, 그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그 시선은 평가하는 시선이 아니라, ‘지금 이 사람의 속도가 어느 정도인지’ 맞춰보는 시선 같았다.
“따뜻한 걸 찾는 분들은요, 보통 단 걸 찾기도 하고… 담백한 걸 찾기도 해요.”
그는 멋쩍게 웃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요즘은 뭘 먹어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럼, 씹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리는 빵이 어때요?”
“씹는 데 시간이 걸리는 빵이요?”
“네. 빨리 먹는 빵 말고요. 천천히 씹어야 맛이 나는 빵.”
그는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빨리’와 ‘천천히’라는 단어가, 빵 말고 다른 걸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카운터 뒤 사람은 진열대 아래에서 둥근 빵을 꺼냈다. 투박한 깜빠뉴였다. 화려하지 않았다. 꾸밈도 없었다. 대신 단단해 보였다.
“이 빵은요, 한 입에 기분이 확 달라지진 않아요. 대신… 먹다 보면 숨이 조금 길어져요.”
그는 빵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숨이 길어진다고요?”
“네. 이상하죠. 근데 그런 빵이 있어요.”
그는 잠깐 입술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저… 오늘 숨이 좀 짧았거든요.”
그 말은 너무 솔직해서 자신도 놀랐다. 회사에서는 ‘숨이 짧다’ 같은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거기서는 숨이 짧든 길든, 전화가 울리면 받아야 했다.
카운터 뒤 사람은 빵을 접시에 올려주며 말했다.
“창가 자리, 따뜻해요. 비 오는 날엔 특히.”
그는 창가로 갔다. 유리창에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물방울이 바닥까지 떨어지지 못하고 중간에서 합쳐져 더 큰 물방울이 되는 걸 한참 바라봤다. 그 모습이 꼭 자신 같았다. 혼자 흘러가다, 어느 순간 감당할 수 없어져 더 큰 무게가 되어버리는.
빵을 손에 들었다. 따뜻했다. 손바닥에 온기가 눌어붙었다.
그는 빵을 천천히 찢었다. 바깥은 바삭했고 안쪽은 부드럽게 찢어졌다. 구수한 향이 조금 더 올라왔다.
그는 한 입 베어 물었다.
담백했다. 자극적이지 않았다. 대신 입 안에서 오래 머물렀다. 그는 씹었다. 천천히. 그러자 자신이 오랫동안 ‘빨리 끝내는 씹기’만 해왔다는 게 떠올랐다. 빨리 먹고, 빨리 설명하고, 빨리 처리하고, 빨리 다음으로 넘어가기. 그 사이에 자신은 늘 뒤로 밀렸다.
그는 빵을 씹으며 낮게 말했다.
“이상하네요.”
카운터 뒤 사람은 멀리서 대답했다.
“뭐가요?”
“한 입 먹었는데… 갑자기, 오늘 있었던 말들이 덜 날카롭게 들려요.”
“오늘… 말이 많았어요?”
그는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말했다.
“많았죠. 하루 종일 남의 말을 듣고, 남의 화를 받는 날이었으니까.”
잠깐 침묵.
그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근데요… 다들 ‘해결’하라 그래요. 해결해달라고. 해결을 못하면… 내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요.”
카운터 뒤 사람은 잠시 있다가, 아주 담담히 말했다.
“해결이 안 되는 것도 있잖아요.”
그 말은 위로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사실 같았다. 그래서 더 마음에 닿았다.
그는 빵을 다시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햇살이 먼저 닿았다.
눈을 뜨자 공기가 달랐다. 건조하고 따뜻했다. 비 냄새가 아니라 짭조름한 바람 냄새가 났다. 멀리서 새가 울었고, 어딘가에서는 커피 향이 아주 은은하게 섞여 왔다.
하얀 벽의 집들이 이어진 골목.
붉은 기와.
낮은 담장 위로 화분들이 놓여 있었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작은 마을이었다. 그는 그곳을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었다. 여행 프로그램, 사진, 혹은 누군가의 휴대폰 배경화면. 그곳은 늘 ‘쉬는 사람들’의 이미지로 소비되는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
길은 조용했고, 햇살은 느렸다. 시간도 느린 것 같았다.
그는 골목을 따라 걸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지만, 걷는 일이 불안하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모르는 길’이 늘 불안했는데, 여기서는 모르는 길이 그 자체로 괜찮았다.
골목 끝에 작은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 한쪽에는 벤치가 몇 개 있었고, 올리브 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그늘 아래에 노인이 앉아 있었다. 노인은 손에 작은 종이컵을 쥐고 있었고, 발치에는 신문이 접혀 있었다.
그는 노인 옆 벤치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노인은 고개를 돌려 그를 봤다. 눈빛이 날카롭지 않았다. 오래 살아서 더 부드러워진 눈빛이었다.
노인이 먼저 말했다. 스페인어였다. 그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 사실이 당황스럽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안심이 됐다. 알아듣지 못하면, 대답을 잘할 필요도 없으니까.
그가 멋쩍게 웃자, 노인은 영어로 천천히 다시 말했다.
“처음 보네.”
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네. 저도… 처음이에요. 여기.”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
그는 그 질문에 바로 답할 수 없었다. 여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갑작스러웠고,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선명했다. 그래서 그는 조금 솔직한 쪽을 골랐다.
“모르겠어요. 그냥… 숨 쉬러 온 것 같아요.”
노인이 아주 작게 웃었다. 웃음은 길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숨. 그거 중요하지.”
그는 노인의 손에 있는 종이컵을 바라봤다.
“커피예요?”
“응. 진한 거. 아침부터 밤까지 마셔.”
“여긴… 다들 이렇게 앉아 있어요?”
그는 말하면서도, 자신이 이상한 질문을 한다는 걸 알았다. ‘앉아 있는’ 걸 설명하듯 묻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게 궁금했다. 회사에서는 앉아 있는 것도 일이었고, 앉아 있어도 마음은 계속 뛰었다. 여기서는 앉아 있는 게 그 자체로 목적처럼 보였다.
노인은 어깨를 한 번 들썩였다.
“앉아 있지. 걷기도 하고. 말하기도 하고. 아무것도 안 하기도 하고.”
“일은… 안 해요?”
노인은 그 질문을 듣고, 잠깐 하늘을 봤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일은 해. 근데… 지금은 안 해도 되는 시간이야.”
그는 그 말이 부러웠다. ‘안 해도 되는 시간’이라는 표현이.
“저는… 안 해도 되는 시간이 없어요.”
노인이 그를 잠깐 보더니 물었다.
“너는 무슨 일을 해?”
그는 잠깐 망설였다. 직업을 말하면 그 직업의 이미지가 따라붙는다. 안정, 정년, 좋다. 하지만 그 이미지가 지금 그의 마음과 너무 달랐다.
“사람들… 불만을 듣는 일을 해요.”
노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아.”
그 한 글자에 많은 게 들어 있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한 글자.
“그럼 너는 매일… 화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구나.”
그는 웃으려다 말았다. 그 말이 너무 정확해서.
“화는… 제가 들고 다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제게 던져요.”
“그럼 너는 매일… 그걸 받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받아야 하니까요.”
“왜?”
그 질문이 단순해서 더 아팠다.
그는 한참 있다가 말했다.
“가족이 있어요.”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가족… 좋은 말이지만, 무거운 말이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속도를 늦춰 말했다.
“맞아요. 무거워요. 그런데… 무거운 게 당연하다고들 하잖아요. 어른이면, 가장이면. 그러니까… 제가 지겹다고 말하면 안 되는 것 같아요.”
노인은 그의 말을 끊지 않았다. 대신 기다렸다.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생각보다 큰 일이다. 회사에는 기다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민원인은 기다리지 않고, 보고는 기다리지 않고, 기한은 기다리지 않는다.
노인은 한참 있다가 말했다.
“지겹다는 말은… 도망치고 싶다는 말이 아니야.”
그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물었다.
“그럼요?”
노인은 아주 천천히, 단어를 골라 말했다.
“지겹다는 건… 너무 오래 같은 무게를 들었다는 말이야. 사람은 무게를 오래 들면, 팔이 아파. 팔이 아프면… 내려놔야 해. 잠깐이라도.”
그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울음이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울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누군가가 ‘당연한 것’을 말해주는 게 너무 오랜만이었다.
그는 말했다.
“내려놓을 수가 없어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 짧게 대답했다.
“알아.”
“그럼… 어떻게 해요.”
노인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내려놓지 못하면, 무게를 바꿔야지.”
“무게를… 바꾼다?”
“응. 같은 무게라도, 손을 바꾸면 조금 나아. 어깨를 펴면 조금 나아. 숨을 길게 쉬면 조금 나아.”
그는 그 말을 듣고, 진짜로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바람이 가슴 아래까지 들어오는 느낌이 났다. 회사에서는 숨이 늘 목구멍 근처에서 끊겼는데, 여기서는 숨이 깊었다.
노인은 그의 숨을 보더니, 아주 작게 웃었다.
“봐. 너 지금 숨 쉬잖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그러네요.”
노인은 손가락으로 광장을 가리켰다. 광장 반대편 작은 카페에서 종업원이 의자를 끌어내고 있었다. 아무도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종업원은 천천히, 정말 천천히 의자를 닦고 있었다.
“저 사람도 일해. 근데 급하지 않아. 급하면 손이 떨려. 손이 떨리면… 커피가 쏟아져.”
그는 그 말에 아주 작게 웃었다. 웃음이 오랜만이라 입 주변이 낯설었다.
노인은 다시 말했다.
“너는 급했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루 종일.”
“그러면 지겨워져.”
노인은 아주 단정하게 말했다.
“지겨운 건, 나쁜 게 아니야. ‘지겹다’는 말이 나오는 사람은… 사실 아직 살아 있어. 무감각한 사람은 ‘지겹다’고 말도 안 해.”
그는 그 말을 마음속에 넣었다. 단어들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노인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너는 오늘 여기서 ‘잠깐’ 쉬어. 잠깐 쉬고, 다시 들어. 근데… 다음에 또 오고 싶으면, 와.”
그는 물었다.
“다음에도 올 수 있어요?”
노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올 수 있지. 길이 기억하면.”
그 말이 조금 이상했지만, 이상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이상한 말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는 벤치에 더 앉아 있었다. 햇살은 천천히 움직였고, 그림자도 천천히 움직였다. 시간은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는 그 사실만으로도 조금 가벼워졌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생각했다.
‘지겨운 게 아니라… 너무 오래 버텨온 거였구나.’
그는 그 문장을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속에 두었다. 마음속에 두는 말은, 때로는 더 오래 간다.
눈을 뜨니 다시 빵집이었다.
창문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접시 위에는 깜빠뉴가 조금 남아 있었다. 빵집의 조명은 노랗고 따뜻했다. 그의 손은 여전히 빵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숨이 깊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그는 남은 빵을 한 조각 더 먹었다. 이번에는 눈을 감지 않았다. 현실로 돌아온 뒤에도, 그 따뜻함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카운터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방금, 이상한 데 다녀온 것 같아요.”
카운터 뒤 사람이 물었다.
“어땠어요.”
그 질문은 ‘무슨 일이 있었어요’가 아니었다. ‘어땠어요’였다. 그 차이가 그를 안심시켰다.
그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무도 저한테 뭘 요구하지 않는 곳이요.”
“그런 곳이 필요했나 봐요.”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필요했죠. 근데… 필요하다고 말하면, 다들 이상하게 보잖아요.”
“누가요?”
그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다 말았다. 민원인, 상사, 동료, 그리고… 스스로.
“…저요. 제가 제 자신을 제일 이상하게 봐요.”
카운터 뒤 사람은 조용히 말했다.
“그럼 오늘은요, 이상해도 돼요.”
그 말은 가볍지 않았다. 쉽게 던지는 위로도 아니었다. ‘이상해도 된다’는 말을 들을 기회가 그에게 거의 없었다. 회사에서 ‘이상’은 곧 문제였고, 문제는 해결해야 했다.
그는 빵을 내려놓고 손바닥을 바라봤다.
“제가… 계속 ‘해결’하라는 말을 듣거든요.”
“네.”
“저는 해결할 수 없는 것도 많은데요. 근데… 해결을 못하면, 제가 무능한 사람이 되는 것 같고… 그러다 보면, 그냥… 제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요.”
카운터 뒤 사람은 잠깐 침묵했다가 말했다.
“해결을 못해도, 없어지는 건 아니에요.”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알죠. 머리로는.”
“그럼요. 오늘은… 몸이 먼저 알게 하려고, 이 빵이 나온 거예요.”
그는 그 말을 듣고, 이해가 되지 않는데도 이해가 됐다. 그게 이 빵집의 방식인 것 같았다. 설명으로 설득하지 않고, 경험으로 바꾸는 방식.
그는 한참 있다가 말했다.
“저… 내일도 출근해야 하거든요.”
“알아요.”
“내일도 전화 받을 거고요.”
“그렇겠죠.”
그는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숨을 내쉬었다.
“근데… 내일 하루를, 오늘만큼 무겁게는 안 들고 싶어요.”
카운터 뒤 사람은 아주 짧게 말했다.
“그럼 하나 더 가져가요.”
그는 고개를 들었다.
“빵을요?”
“네. 같은 빵이면…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빨리 숨이 길어질지도 몰라요.”
그는 잠깐 망설였다. 포장을 부탁하는 일이 마치 ‘약함’을 인정하는 것 같아서. 하지만 오늘 스페인의 햇살을 기억하자, 그 망설임이 조금 작아졌다.
그는 말했다.
“그럼… 하나 더 포장해 주세요.”
카운터 뒤 사람이 봉투를 꺼내며 물었다.
“집에 가서 드실 거예요?”
그는 대답을 하려다가 멈췄다. 집에는 가족이 있다. 그러나 그 빵을 누구와 나눌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줄 수도 있고, 아이에게 줄 수도 있고, 아무에게도 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잘 모르겠어요. 근데… 그냥 갖고 있고 싶어요.”
카운터 뒤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죠”라는 듯이.
봉투가 건네졌다. 종이봉투는 따뜻했다. 손난로처럼.
그는 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
“저기요.”
“네.”
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물었다.
“이 빵집… 원래 여기 있었어요?”
카운터 뒤 사람은 웃었다. 아주 작게.
“찾는 사람이 있을 때는요.”
그 말은 여전히 이상했지만,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문을 열었다. 딸랑, 하고 종이 울렸다.
밖은 여전히 비였다. 현실은 그대로였다. 내일도, 그 다음 날도.
하지만 그는 우산을 펴며, 아주 조용히 생각했다.
‘지겹다는 말이 나오는 나는… 아직 살아 있는 거구나.’
걸음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숨이 조금 더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