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찾는 빵집

2화. 아직 정해지지 않은 시간

by 봉봉

교실 창문으로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있었다.

분필 가루가 빛 속에서 떠다니는 게 보였다. 누가 보면 예쁘다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는 그게 그냥 ‘공부하는 공기’ 같아서 조금 웃겼다. 왜 하필 이런 건 반짝일까.


선생님의 목소리는 일정하게 이어졌다.


“…여기서 조건을 하나 더 붙이면, 이 값은—”


그는 노트를 펴놓고 연필을 쥔 손을 가만히 올려두었다. 쓸 생각은 있었는데, 뭘 써야 하는지 모르겠었다.
옆자리 친구가 책 위로 종이를 슬쩍 밀었다. 종이 끝이 그의 노트 모서리를 톡 치고 멈췄다.


“야.”


그는 고개를 돌렸다.


“이거 이해돼?”


친구는 문제의 한 줄을 손가락으로 짚고 있었다. 손톱이 좀 뜯긴 채였다. 그 손톱이 더 눈에 띄었다. 공부가 아니라 손톱이.


그가 문제를 내려다봤다. 숫자랑 기호가 줄지어 있는데, 그건 ‘모르겠다’는 느낌을 더 정돈된 모양으로 표현한 것 같았다.


“음… 이해된 척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친구가 입을 손으로 가리고 웃었다.


“그게 뭐야.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모르는 거지.”


“근데 너 말투는 되게 아는 척이야.”


“내 말투가 그래. 억울해.”


둘은 웃다가, 선생님이 칠판을 두드리는 소리에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다시 뒤로 돌아오자 친구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친구가 앞줄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 애들 있잖아. 진짜 아는 걸까? 아니면… 그냥 끄덕이는 걸까.”


그는 앞줄을 힐끗 봤다. 어떤 애는 이미 풀이를 쓰고 있었고, 어떤 애는 선생님 말에 맞춰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속도까지 ‘성실함’처럼 보였다.


“아는 애도 있고, 끄덕이는 애도 있겠지.”


“그럼 우리는 뭐야?”


“우리는… 끄덕이지도 못하는 애.”


친구가 빵 터졌다.


“야, 너무 솔직해.”


그는 따라 웃었다. 웃다가 갑자기 친구가 말끝을 낮췄다.


“근데, 나 솔직히…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좀 웃겨.”


“웃기다고?”


“응. 이렇게 많은 걸… 언제 다 알지 싶어서. 그러니까 막… 웃음이 나.”


친구는 웃으면서도 얼굴이 조금 찌푸려졌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헷갈릴 때 나오는 표정이었다.


그는 잠깐 연필을 굴렸다.


“…나도.”


“너는 형 있잖아.”


“형?”


“너 형 공부 잘한다며.”


그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끄덕임이 빨랐다. 너무 빨리 끄덕여서 더 티가 났다.


“응, 잘해.”


“그럼 부담 안 돼?”


그는 ‘부담’이라는 단어를 씹었다. 목구멍에서 한 번 걸렸다가 내려가는 느낌.


“부담이라기보다… 그냥. 비교가 되지.”


“엄마가 비교해?”


“아니. 엄마는 비교 안 해.”


“그럼 왜 비교돼?”


친구는 진짜로 궁금해서 묻는 얼굴이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하니까.”


친구가 연필을 돌리며 말했다.


“야, 우리 아직 고1이야. 벌써 인생 정하려고 하면 너무 바쁘지 않냐.”


“정하려고 한 적은 없는데… 마음이 먼저 급해.”


“급하면 어떡해?”


친구가 진지하게 묻는 바람에, 그는 웃다가 말이 멈췄다.


“…그냥 급하지 않은 척하지.”


그때 선생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뒤에 둘!”


둘은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친구는 웃음을 참고 얼굴을 책에 파묻었고, 그는 목이 뜨거워졌다. 이상하게도 그런 순간이 좀 살았다.


종이 치자 교실이 한 번에 풀렸다. 의자가 끌리고, 가방 지퍼가 열리고, 누가 “야 뛰어!”라고 소리쳤다.


복도로 나오자 친구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야… 밖 공기 좋다.”


“교실 공기랑 뭐가 달라?”


“똑같은 공기인데 느낌이 다르지.”


친구는 손을 크게 휘저으며 말했다.


“여기서는 숨 쉬는 게 허락된 느낌?”


그는 웃었다.


“너 말 되게 멋있게 한다.”


“멋있게라도 해야지. 안 그러면 진짜 내가 너무… 멍청해 보일까 봐.”


친구가 웃으면서도 어깨를 으쓱했다. 그 웃음에는 ‘그래도 어쩔 수 없지’가 섞여 있었다.


“학원 가?”


“가야지.”


“나도.”


둘은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었다. 바람이 얼굴에 닿았다. 겨울이라 찼는데, 이상하게 기분은 좀 나았다.


친구가 갑자기 물었다.


“너, 나중에 뭐 하고 싶어?”


그는 바로 답이 나오지 않았다. 대답 대신 손을 주머니에 더 깊게 넣었다.


“몰라.”


친구가 잠깐 멈추더니 웃었다.


“나도 몰라.”


그 말이 너무 가벼워서, 오히려 마음이 풀렸다.


친구가 이어 말했다.


“근데 있잖아, 몰라도 되는 거 같지 않냐?”


“어떻게?”


“아니… 우리는 아직 고1이잖아. 나 지금 ‘정답’을 정하면, 그게 나중에 틀렸을 때 더 무서울 거 같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틀릴까 봐 더 무서운 것 같아.”


“그니까 그냥… 지금은 연습이라고 생각하자.”


“뭘 연습해.”


“앉아 있는 거.”


친구가 웃었다.


“형 말처럼. 앉아 있는 거 연습. 그거라도 잘하자.”


그는 웃으며 버스에 올랐다.


집 문을 열자 밥 냄새가 먼저 들어왔다.
밥 냄새와 세제 냄새가 섞인 익숙한 집 냄새. 바닥이 미지근하게 따뜻했다.


“왔어?”


형 목소리가 방에서 들렸다.


“응.”


형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연필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일정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 소리는 이상하게 ‘집 소리’ 같았다.


그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형 공부해?”


형이 고개도 안 들고 말했다.


“하는 척.”


“뭐야, 형도 그런 말 해?”


형이 의자를 조금 돌렸다. 눈 밑이 살짝 그늘져 있었다.


“나도 사람이거든.”


그가 웃었다.


“형은 로봇인 줄.”


“로봇이면 좋겠다. 그럼 피곤도 없을 텐데.”


형은 연필을 내려놓고 손가락을 주물렀다.


“너는 어땠어. 학교.”


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냥… 모르겠어. 공부가 재미없어.”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자연스럽게 끄덕여서 더 놀라웠다.


“재미있는 사람 잘 없어.”


“근데 형은 잘하잖아.”


“잘하는 거랑 재밌는 거랑 달라.”


형이 책상 위 문제집을 툭 쳤다.


“나도 이거 보기 싫어. 근데 그냥… 앉아 있는 거야.”


그는 그 말을 곱씹었다.


“앉아 있는 거…”


형이 웃었다.


“진짜로. 하루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어느 날은 조금 풀려. 어느 날은 안 풀리고.”


“안 풀리는 날은?”


“그냥… 그날은 그런 날이지.”


형은 말하다가 잠깐 웃었다.


“너는 나처럼 안 해도 돼. 너는 너 속도로 해.”


그 말이 뭔가 멋있어서, 그는 괜히 장난을 쳤다.


“형이 그런 말 하니까 되게 어른 같다.”


형이 코웃음을 쳤다.


“어른은 무슨. 나도 지금 무섭다.”


그가 눈을 크게 떴다.


“형도 무서워?”


“당연하지.”


형은 잠깐 손가락을 펼쳤다 오므렸다.


“무서운데… 그냥 하다 보면 지나가. 안 지나가면? 그때 가서 또 생각하고.”


형은 다시 연필을 들었다.


“너도… 너무 빨리 결론 내리지 마. 아직 네가 뭔지 ‘정답’ 나올 시간 아니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 목이 풀렸다.


저녁 식탁에서 엄마가 김치를 접시에 덜었다. 반찬이 부딪히는 소리가 작게 났다.


“오늘 학교 어땠어?”


엄마는 정말 궁금해서 묻는 얼굴이었다. ‘검사’가 아니라 ‘관심’ 쪽에 가까운.


그는 밥을 한 숟갈 뜨며 말했다.


“그냥… 평범.”


엄마가 웃었다.


“평범이 제일 좋지. 큰일 없는 게.”


그는 웃다가, 갑자기 문득 떠오른 말을 꺼냈다.


“엄마, 나 공부 재미없어.”


엄마는 바로 “공부는 원래 재미없는 거야”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김치 한 조각을 더 얹어주며 물었다.


“어떤 게 재미없어? 내용이?”


그는 젓가락으로 밥알을 툭툭 눌렀다.


“그냥… 하는 게.”


“하는 게.”


엄마가 따라 말했다. 따라 말하는 방식이 이상하게 편했다. 엄마는 그의 말을 ‘정리’하려고 하지 않고 ‘들어주려’ 하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왜 해야 하는지 확실히 모르겠어.”


엄마가 잠깐 생각했다.


“엄마도 그랬어.”


“진짜?”


“응. 엄마도 네 나이 때… 하기 싫은 게 많았지.”


그가 물었다.


“그럼 왜 했어?”


엄마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대답할 때 자세가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나중에 선택하려고.”


“선택?”


“응. 하고 싶은 걸 고를 수 있으려면… 선택지가 있어야 하잖아.”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근데 난 하고 싶은 게 없어.”


엄마가 웃었다. 그 웃음에는 ‘그럴 수 있어’가 있었다.


“없어도 돼.”


“없어도 돼?”


“응. 지금은 ‘없어도 되는 시기’야.”


엄마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근데 있잖아. 하고 싶은 게 딱 하나 있다고 해서 그것만 하는 사람도 없고, 하고 싶은 게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도 없어.”


그는 살짝 웃었다.


“엄마 말은 항상… 되게 이상하게 안심돼.”


엄마가 그를 보며 웃었다.


“엄마가 너를 안심시키는 게 직업이야.”


그 말에 그도 웃었다.


“엄마 직업은 엄마잖아.”


엄마가 젓가락을 들어 그를 가리켰다.


“정답.”


형이 옆에서 작게 웃었다.


“엄마, 나도 직업이 고3인데요.”


엄마가 바로 말했다.


“너는 직업이 아니라… 상태야. 상태.”


형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엄마 너무 정확해.”


식탁에 웃음이 났다. 그 웃음이 그는 좋았다.
공부가 재미없는 건 여전히 사실인데, 이 웃음이 그 사실을 조금 덜 무겁게 만들었다.


그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엄마 그럼… 나 지금 몰라도 되는 거지?”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몰라도 돼. 대신… 불안하면, 불안한 채로 해도 돼.”


“불안한 채로?”


“응. 불안이 없어져야 하는 게 아니라, 불안이 있어도 네가 너를 미워하지 않으면 돼.”


그 말이 따뜻해서, 그는 괜히 밥을 크게 한 숟갈 떴다.


“알았어.”


방에 들어와 책상 앞에 앉았다. 문제집을 펼쳤다.

몇 줄 읽다가 시선이 떠올랐다. 집중이 안 됐다.


그는 연필을 들어 공책 모서리에 작은 낙서를 했다.
낙서가 점점 농구공처럼 보이다가, 갑자기 축구공이 됐다.


“아…”


그는 웃었다. 자기가 한심해서가 아니라, 너무 ‘고1’ 같아서.


문이 살짝 열리고 엄마가 얼굴만 내밀었다.


“너… 잠깐 바람 쐬고 싶으면 나가도 돼. 대신 늦지는 말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잠깐만.”


골목으로 나오자 밤 공기가 차가웠다.
차가운 공기가 폐까지 들어와서,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손을 주머니에 깊게 넣고 걷다가, 작은 불빛을 발견했다.

빵집이었다. 유리창 안쪽이 따뜻하게 빛나고 있었다.


문을 열자 종이 울렸다.


딸랑.


따뜻한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밖에서 들어왔을 때만 느껴지는 그 미묘한 온도 차이. 버터 냄새와 구운 밀가루 냄새가 섞여 있었다.


카운터 뒤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오래 머무는 시선은 아닌데, 그냥 지나가지는 않는 시선.


“학생이네요.”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가방끈을 한 번 잡았다 놓았다.


“네.”


“이 시간에 오는 학생들은 보통 두 종류예요.”


그는 고개를 들었다.


“두 종류요?”


“배가 고픈 학생이랑…”


잠깐 말을 멈췄다.


“…집에 바로 들어가기 싫은 학생.”


그는 피식 웃었다.


“그럼 저는 두 번째인 것 같아요.”


“배는 안 고파요?”


그는 잠깐 생각했다.


“배가 고픈 건 아닌데… 음…”


말을 찾다가 웃었다.


“…뭐라도 씹으면 좋겠다는 느낌은 있어요.”


“그게 배고픈 거랑 비슷해요.”


“그럼 배고픈 건가요.”


“마음이요.”


그는 웃다가, 잠깐 말이 없어졌다.
‘마음이 배고프다’는 말이 웃기면서도… 어딘가 맞았다.


“…그런가요.”


그 사람이 물었다.


“학교 끝나고 학원 갔다 왔어요?”


“아니요. 학원 가야 하는데… 오늘은 좀…”


그는 말끝을 흐렸다. 자기 입으로 ‘가기 싫다’를 말하는 게 어색했다.


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기 싫은 날도 있죠.”


그는 진열장을 보며 말했다.


“저 공부 재미없어요.”


그 말은 갑자기 튀어나왔다. 말하고 나서 ‘왜 내가 이런 말을 하지’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그 사람은 웃었다. 비웃는 웃음이 아니라, ‘그래, 그럴 수 있지’ 하는 웃음.


“재미있는 사람 별로 없어요.”


그는 조금 안심해서 웃었다.


“형이 공부를 잘해요.”


“형이요?”


“네. 고3. 집에 가면 항상 먼저 앉아 있어요. 연필 소리만 들려요.”


그 사람이 그의 손을 한 번 봤다. 손가락 끝이 괜히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그럼 집에 들어갈 때마다 시험장 들어가는 느낌이겠네요.”


그는 웃었다.


“맞아요. 아무도 뭐라고 안 하는데 혼자 긴장해요.”


“그게 제일 피곤하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사람은 진열장 아래쪽에서 길쭉한 빵을 꺼냈다.
겉이 반질반질했고 초코칩이 박혀 있었다.


“이거. 초코바게트.”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바게트요?”


“바게트는 원래 단단하죠. 겉은 빠작하고.”


그 사람은 빵을 살짝 눌렀다. 손끝에서 ‘딱’ 하는 탄력이 느껴지는 듯했다.


“근데 이건 속이 달아요. 씹으면 초코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빵맛이 따라와요.”


그는 괜히 웃음이 나왔다.


“설명 되게… 자세하시네요.”


“학생들한테는 자세히 설명해야 해요. 대충 말하면 더 불안해하거든요.”


그 말이 웃기면서도 찔려서, 그는 웃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요.”


그 사람이 접시를 꺼내 빵을 올리면서 말했다.


“형이 기준이 되는 집의 애들한테는… 대개 이런 날이 와요.”


“이런 날이요?”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뭐지’ 하는 날.”


그는 접시를 바라봤다. 빵의 단면이 진한 갈색으로 보였다.


“…제가 그렇게 보여요?”


그 사람이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네.”


그는 조금 부끄러워 웃었다.


“…괜히 들킨 느낌인데요.”


“괜찮아요.”


그 사람이 포크를 같이 내려놓으며 말했다.


“사람이 크는 표정이니까.”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을 풀어줬다.
‘크는 표정’이라니. 그런 게 진짜 있나? 근데…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물었다.


“그럼 이거 먹으면 괜찮아져요?”


그 사람은 바로 “응”이라고 하지 않았다. 잠깐 생각한 다음 말했다.


“완전히는 아니죠.”


그는 괜히 웃었다.


“역시.”


“대신… 먹는 동안은 괜찮아요. 그리고 그게 생각보다 커요.”


그는 접시를 들고 창가 자리로 갔다.
의자가 살짝 삐걱했다.


빵을 손에 들었다. 따뜻했다.
그는 한 입 베어 물었다.


겉이 먼저 빠작 부서졌다.
그 다음에 달콤함이 천천히 퍼졌다.


그는 작게 웃었다.


“…진짜다.”


그는 눈을 감았다.





해 질 무렵 놀이터였다.
모래바닥은 낮의 온기가 조금 남아 있었고, 철봉은 손바닥에 차갑게 닿았다. 그네는 삐걱거렸고, 누군가 미끄럼틀을 타며 소리쳤다.


“야! 너 왜 이제 와!”


친구가 공을 끌고 뛰어왔다. 운동화 끈이 반쯤 풀린 채였다. 숨을 헐떡이면서도 성질 급한 목소리를 유지했다.


“빨리 와. 우리 벌써 두 판 했어.”


“두 판이나 했어?”


“응. 너 없어서 팀을 바꿔가면서 했는데… 너 없으니까 재미없어.”


“왜?”


친구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너는 못하잖아.”


그는 발끈했다.


“나 안 못해.”


“못해.”


“안 못해!”


친구가 웃었다.


“그럼 증명해. 너 공격.”


친구가 공을 발 앞으로 툭 밀어줬다.


“규칙 알지? 두 번 튕기면 반칙. 골대는 저기. 골키퍼는… 야, 상우야! 너 골키퍼 해!”


멀리 있던 애가 “아 왜 내가 또!” 하고 소리쳤다.
그래도 골대 앞에 섰다.


친구가 그의 등을 툭 쳤다.


“자, 생각하지 말고 그냥 차. 너는 생각하면 더 못해.”


“야, 그게 무슨 말이야.”


“진짜야. 너는 그냥 툭 차면 괜찮아.”


그가 공을 툭 찼다.
공은 엉뚱한 방향으로 굴러갔다.


순간 정적.


친구가 한 박자 늦게 크게 웃었다.


“야 뭐야 ㅋㅋㅋㅋㅋㅋ”


그는 얼굴이 빨개졌다.


“미끄러졌어.”


“미끄러진 게 아니라 네 발이 공이랑 싸운 거지.”


그는 억울해서 공을 다시 가져오며 말했다.


“한 번 더. 진짜 한 번 더.”


친구가 손을 번쩍 들었다.


“오케이. 다시. 근데 이번엔 ‘발’로 차. ‘마음’으로 차지 말고.”


그 말이 너무 웃겨서, 그는 웃으면서 공을 차려다가 또 웃음이 터졌다.


“야 웃지 말고!”


“너가 웃겨서 그래!”


그들은 웃다가, 결국 제대로 차지 못하고 공을 한 번 더 굴렸다.
이번엔 공이 골대 근처로 갔다. 골키퍼 상우가 허둥지둥 막아냈다.


“아 뭐야! 거의 들어갈 뻔했잖아!”


상우가 소리쳤고, 친구는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봐봐. 너 그냥 하면 되잖아.”


그는 숨을 헐떡이며 웃었다.


“그냥… 하면 되네.”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냥 하면 돼. 못하면 못하는 대로.”


그 말은 진짜 아무 의미 없이 나온 말이었다.
그 시절에는 대부분의 말이 그런 식이었다.


조금 놀다 보니 목이 말랐다.
그들은 벤치 앞 자판기에서 서로를 밀었다.


“너 먼저 뽑아.”


“아니 네가 먼저.”


“야 네가 늦었잖아. 늦은 사람이 뽑아.”


“늦은 사람 벌금이야?”


“응. 오늘부터.”


그는 투덜거리면서 동전을 넣었다.


자판기가 덜컹 소리를 내며 음료를 떨어뜨렸다.


“야, 이거 안 떨어지면 어떡해.”


친구가 말했다.


“발로 차.”


“왜 모든 걸 차로 해결하냐?”


친구가 웃었다.


“그게 우리 스타일이잖아.”


둘은 음료를 나눠 마시며 그네 쪽으로 갔다.
그네는 삐걱거리며 천천히 흔들렸다.


친구가 물었다.


“야 너 커서 뭐 될 거야?”


그는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몰라.”


친구가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나도 몰라.”


둘은 동시에 웃었다.


“근데 너는 뭐 하고 싶어?”


친구가 다시 물었다.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게임.”


“게임? 야 나도. 근데 엄마가 게임 하지 말래.”


“나도.”


“그럼 우리 어른 되면 게임 실컷 하자.”


“어른 되면 더 바쁠걸?”


친구가 잠깐 멈췄다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럼… 바쁘기 전에 놀자.”


그 말이 너무 당연해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멀리서 누군가 엄마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지훈아! 밥 먹어!”


친구가 벌떡 일어났다.


“야 나 간다.”


“벌써?”


“엄마가 세 번 부르면 진짜 혼나.”


친구가 뛰어가다가 뒤돌아 소리쳤다.


“내일도 와! 늦지 말고!”


그는 손을 흔들었다.


“응! 내일!”


그네가 천천히 멈췄다.
그는 조금 더 앉아 있었다.
그때는 ‘앉아 있는 것’에 의미를 붙이지 않았다. 그냥 앉아 있었다.






눈을 떴을 때 다시 빵집이었다.


접시에 남은 초코바게트 끝을 바라보다가,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까 그 말이 떠올랐다.


‘그냥 하면 되네.’


그는 빵집 안을 한 번 둘러봤다.
오븐이 식는 소리, 바닥의 나무결, 카운터 뒤 사람의 손.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냥 하면 되는 시간도 있었구나.”


카운터 뒤 사람이 듣고 있었는지, 아니면 그냥 혼잣말로 흘러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게 괜찮았다. 혼잣말도 누구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 말이니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운터로 가자 그 사람이 물었다.


“맛있었어요?”


“네.”


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되게… 이상하게요.”


“이상하게?”


“그냥… 웃기고요.”


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네요.”


그가 물었다.


“뭐가요?”


“웃겼다는 거요.”


그 사람은 빵을 정리하며 말했다.


“학생들한테는 가끔 그게 제일 중요해요. ‘나 괜찮나?’보다 ‘아 웃기네’가 먼저 나오면… 몸이 먼저 풀려요.”


그는 웃었다.


“그럼 저 지금 풀린 건가요?”


“조금.”


“조금이면… 내일은요?”


그 사람이 잠깐 생각했다.


“내일은… 내일의 학생이 결정하죠.”


그 말이 엄마가 했던 말처럼 들렸다. ‘선택’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밤 공기가 덜 차갑게 느껴졌다.
현관문을 열자, 집 안의 따뜻한 냄새가 다시 반겼다.


방으로 들어가 책상 앞에 앉았다.
문제집을 펼치니 여전히 모르는 문제가 있었다.


그는 연필을 들고 잠깐 멈췄다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냥… 앉아 있자.”


그리고 아주 천천히, 첫 줄을 따라 써 내려갔다.


모르는 건 여전히 많았다.
그런데 오늘은 그게 좀 덜 무서웠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시간이라서.
그게 오히려 다행이라서.



작가의 이전글행복을 찾는 빵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