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고 정신없이 살다 보니, 나의 지난 시절들이 자주 떠오르곤 했다. 그러다 문득 관계를 돌아보게 되었는데 이상하게 씁쓸한 기분이 만연했다.
20대 중반에 상하이에 나와서 일을 하게 되었다. 해외살이가 처음이었고, 현지인들과 언어 소통이 불가능했기에 친구 사귀기는 힘들었다. 그 시절엔 스마트폰이 존재하지 않았고, 국제전화 카드 사서 전화하던 시절이라 한국에 연락할 방법이 많이 없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너무 보고 싶었고, 그들에게 나의 외로움을 공유하고 위로받고 싶었다.
설에 한국 갈 때면 늘 친구들에게 연락하고 만났다.
2주는 매일매일 친구들과의 약속으로 바빴고 가족은 늘 뒷전이었다. 5년을 반복했다.
한국 갈 때만 보는 친구들.
그들은 상하이가 어떤 도시인지 내가 어떤 생활을 하는지 몰랐고, 딱히 궁금해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타지 생활 힘들지’라고만 이해했다.
20대 초반에 알게 된 부산 언니가 있었다. 나는 그 언니를 무척이나 따랐다. 상하이에서도 늘 먼저 연락하고 한국 가면 부산으로 포항으로 언니를 만나러 부지런히 다녔다.
어느 날은 나만 언니에게 연락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일방적인 관계가 맞는 건가? 내가 연락을 해야만 볼 수 있는 사이가 건강한 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할 무렵 나는 상하이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내가 한국에 있어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어찌어찌해서 나는 다시 상하이에서 일을 찾았다. 다시 적응하고 일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엔 내가 먼저 연락하지 말아 보자. 언제 문자가 오는지 기다려보자.‘ 우리의 관계를 시험해 보았다.
지금까지 언니에게서 어떤 문자를 받은 적이 없다.
연락 안 한 지 10년이 다 되어 간다.
‘아. 나 혼자 짝사랑이었던가. 언니에게 나는 무엇도 아니었나? 지난 10년간의 세월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한 거지? 씁쓸했다.
20대 때는 영원할 줄 알았던 친구들이 사소한 이유로 멀어지기도 하고 내가 연락을 하지 않으니 끊어진 관계가 태반이다.
후회는 없다. 내가 모든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할 수 없으니까.
그래도 섭섭하고 아쉬운 건 사실이다.
가끔 운동을 하거나 길을 걸을 때 갑자기 그 시절의 친구들이 떠오른다.
그때 그 시절만이 가질 수 있던 공기 안에서 우리는 많이도 웃고 울면서 서로에게 든든한 존재였는데.
무엇이 우리를 멀어지게 만들었을까? 해외살이가 정말 원인이었을까? 아니면 시간이라는 것이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일까?
시간은 슬픈 감정도 서서히 산화시키지만 관계라는 것도 산화시키는 것 같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시절이 가끔은 사무치도록 그립다. 시간을 돌릴 수도 지금의 내가 지어낼 수도 없는 그 이야기들이 아쉽고 미안하고 아련하다.
마흔 넘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관계는 마치 정원 같다.
봄이 되면 분갈이도 해주고 가지치기도 해주면 식물들은 더 잘 자란다. 가끔 ’ 꽃들아 안녕. 잘 지내니?‘라고 얘기해 주면 더 잘 자란다고 한다. 신경 쓰지 않고 방치해 두면 물 주는 것을 까먹어서 말라죽기 십상이고 가지들도 제멋대로 자라서 이쁘지가 않다.
관계도 내가 어떻게 잘 가꾸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정성껏 가꾸어야지 내년에도 후년에도 꽃이 피어난다.
친구의 정원에서 자라고 있는 ‘나’라는 꽃도 주인의 정성에 따라서 내가 죽거나 살아남는다.
내가 상하이에 살든 한국에 살든 장소는 중요하지 않는 것 같다.
언제 봐도 반가운 관계가 되려면 정원을 가꾸듯이 관심과 정성으로 보살펴야 한다.
이제 나는 원래 연락을 먼저 안 하는 사람이라는 핑계 대신 주위 사람들에게 안부 인사 먼저 건 네 보는 건 어떨까?
씩 하고 웃을 그들을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