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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ille Jul 01. 2024

여명이 석양을 만났던 표현주의의 도시... 비엔나


스마트폰을 아직 쓰지 않던 시절...


비엔나 공항에 도착한 것은 늦은 밤이었다. 렌터카를 픽업한 우리는 윤곽을 감춘 어두운 도시의 뱃속을 느릿느릿 더듬어 숙소를 간신히 찾았다. 자다 나온 주인에게 키를 받고 짐가방들을 밀고 끌며 삐걱거리는 시커먼 계단을 끙끙대며 올라 마침내 방에 도착. 피로는 쌓이고, 긴장은 풀린 우리는 씻자마자 침대에 누워 곯아떨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떠보니 날이 밝아있었다. 핸드폰을 켜니 7시 35분. 로밍이 에러가 났는지 이게 오전인지 오후인지 아무 표시가 없다. 일어나서 창밖을 보고 하늘을 봐도 아침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설마 우리가 저녁까지 잤다고? 곤히 자고 있는 짝꿍 인프피를 깨워 이 불확실한 상황을 알려주자...


인프피: 어떡해~! 설마 여행 첫날을 자느라 다 날린 거야?!


엔티제: 그건 아직 모르지. 근데 창을 봐봐. 이게 아침인지 저녁인지 잘 모르겠어.


인프피: 그럼 나가서 알아봐야지... 아, 나간 김에 빵도 좀 사 와.


엔티제: 빵? (이 상황에?)


인프피: 치즈랑 잼도. 커피 마시자.


엔티제: (문제를 먼저 해결...) 어... 알겠어.


눈을 비비고 계단을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서니 비엔나 거리의 모습이 생경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묘한 청회빛 하늘 아래 거리는 한가롭고 지나가는 행인도 거의 없었다. 빵집을 찾으며 동시에 시간의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열심히 거리를 스캔하던 중....


작은 펍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야외 테이블에 앉은 한 남자가 한가롭게 맥주를 마시고 있었고, 펍의 주인인지 직원인지는 호스로 바닥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가만... 맥주를 마시는 거 보니 저녁!? 낭패다. 역시 하루종일 잔 건가.... 아니지, 유럽은 아침 맥주도 많이 마신다던데... 음... 물청소... 가게 열 준비? 아님 닫는 건가? 대체 저 하늘색과 노리끼리한 이 빛은 여명인가 석양인가...'


AI로 만들어 본 그 날 아침. Microsoft Designer

환상특급 주인공처럼 초현실적인 시공을 헤매다가 마침내 눈에 띈 빵집. 급히 뛰어들어가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8시를 향하고 있었다. 이것저것 빵을 주문하고 계산을 하면서 점원에게 어이없는 질문을 하고야 말았다.


"실례지만, 지금이 아침인가요, 저녁인가요?"


점원은 두어 번 눈을 꿈뻑대다가 건조하게 답한다.


"아침."


"오 감사합니다!"


엔티제이는 총알같이 빵집을 뛰쳐나왔다. 여유와 안도감으로 세상을 다시 둘러보니 '아침' 맥주와 '아침' 물청소와 '아침' 하늘이 비로소 자리를 잡았다. 미션에 성공한 그는 바게트를 가슴에 안고 숙소로 돌아와 수탉처럼 울었... 아니 외쳤다. 비엔나의 아침이 밝았음을...




이 아침 때문이었을까. 비엔나의 기억은 화려한 왕궁도, 오페라극장도, 슈니첼도 아닌, 시간과 빛의 미로에 갇혀버린 것 같은 그 짧은 순간이 강렬한 한 컷으로 남아있다. 그날 레오폴드 미술관에서 만난 표현주의 작품들, 객관적 사실의 표피적 허상을 깨고 내면의 정서와 충동으로 세상을 그려낸 한 컷, 한 컷은 예사롭지 않게 와닿았다.


"때론 내가 보는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때가 있고..."(Sometimes I don't know whether my visions are dreams or reality.")

                              - 구스타프 클림트-

Death and Life (1908) by Gustav Klimt


"살아있는 모든 것은 동시에
죽어가고 있으며..."
(Everything is dead while it lives.)

                                     -에곤 쉴레-

Blind Mother (1914) Egon Schiele


"자연은 눈에 보이는 것뿐 아니라...
영혼이 그려낸 내면의 그림까지 포함한다." (Nature... also includes the inner picture of the soul.)

                                -에드바르트 뭉크-

Two Children on the Beach (1904) by Edvard Munch "바다네" "왜 그렇게 생각해?" "그럼 강이네." "꼭 그렇게 볼 필욘 없지" "가자,"


로밍이 사치였고, 구글맵이 별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시절이었기에 가능했던 해프닝이었다. 그러나 덕분에 여명에서 석양의 빛을 봤던 그 역설의 진실은 빼꼼히 내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이 무슨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어차피 내가 눈을 뜨면 세상은 살아나고, 내 눈이 감기면 온 세상이 끝나는 것을....


보너스처럼 얻은 하루를 만끽하며 미주알고주알 수다와 함께 비엔나의 거리를 쏘다니던 두 사람은 세상을 신의 곡선으로 놀랍게 재창조해낸 또 다른 거장의 세계를 만나 한참을 그곳에 머물렀다.

Hundertwasserhaus

사연은 다음 기회로....


사족. 하나만 쓰기 이까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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