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에게 연차란 별 거 없다. 평일에 맞이하는 휴일, 그마저도 금방 가버리는 아까운 시간, 그럼에도 할 거 없이 빈둥거리며 흘려보내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아까워지는 하루 그 정도? 평일에 맞는 휴일은 유독 조용한 것 같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24도로 맞춰진 쾌적한 카페 안에서 여유롭게 비바람 치는 밖을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랄까.
간만에 오늘은 날씨가 좋았다. 일본은 이른 장마와 싸우고 있다는데 그 영향인지 여기도 꽤 자주 비가 왔더랬다. 이웃이지만 이웃같지 않은 일본의 장마에는 사실 관심 없고, 비가 자주 온다는 게 짜증이 나면서도 운치 있어 좋았던 날들이었다. 그러다가 잠깐 찾아온 해 좋은 날이므로, 열심히 뽀송뽀송해지고 있는 빨래들처럼 나도 열심히 베란다에서 비타민D를 먹어야 하는 날이다.
예전에는 이렇게 해가 좋은 날 연차를 쓰면 나는 멀리멀리 싸돌아다니기 바빴다. 그때는 그랬다. 밥을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고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게 몸과 마음이 망가져 있던 때였다. 안 먹어도 배가 고프지 않았고 배가 고플라치면 꼬르륵 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물을 먹었다. 무언가를 씹기도 귀찮고 짜증나던 때가 있었다. 누가 툭 건드리면 한참을 울 것 같았던 시간들, 그런데 누가 건드리지 않아서 울어야만 했던 시간들은 끔찍했다. 죽지 못해 살았고 살아도 의미가 없어 슬펐고, 나만 빼고 다 행복해서 슬펐다. 그래서 일단 밖으로 나갔다. 글을 쓰기 위해 책, 노트북, 펜만 들고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또 타고 조용하고 예쁜 카페를 찾아다녔다. 그걸로도 충족이 안 되면 에라 모르겠다 기차를 타고 더 먼 곳으로 곧장 떠나보기도 했다.
그 시간 내가 좋다고 느꼈던 건 단 한 가지였다. 옷 테. 불쌍하게 마르니까 뭘 입어도 마음에는 들었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냈다. 에너지 넘치던 모습은 생기를 잃었고 매사에 설레던 모습은 쓰러질 것 같이 위태로웠다. 그 와중에 다시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글을 쓰지 않아서다. 난 내 마음을 글로 풀어내기 바빴는데 쓰기 위해 우울했고 우울해서 또 썼다. 우울해야만 글이 나온다는 핑계로 거의 매시간 우울함과 함께 했으나 많은 시인들이, 그리고 작가들이 우울하고 예민한 사람들이라는 게 내게는 또 그만큼의 위로로 다가와서 글 쓰는 걸 그만둘 수가 없었다. 이렇게 우울한 나의 글을 읽는 사람들도 어느새 늘어나서 그걸 포기하기에는 또 욕심이 생겨서, 그래서 그만둘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끝까지 갔다.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땅속에 푹 처박히고 나니까 글 쓰는 것도 그제서야 짜증이 났다. 우울함을 넘어서는 화가 났다. 그래서 그만뒀다. 생각이라는 걸 그만뒀다. 생각하지도 않고 쓰지도 않고 읽지도 않았다. 그냥 보고 그리고 놀고먹었다. 그랬더니 괜찮아졌다. 거짓말처럼 조금씩 나아졌다. 역시 사람은 먹어야 하고, 놀아야 한다.
나의 글은 두서가 없었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지금도 없다. 아주 간단한 쪽지를 쓸 때나 나름 긴 편지를 쓸 때도 어김없이 생각나는 것부터 적었다. 그래서 더 쓸 공간이 없을 때까지 주절주절 쓰다가 정작 중요한 말(생일 축하해, 결혼 축하해 등)은 "OO에게"라고 적은 맨 첫 줄로 뜬금없이 올라가, 그 옆에 조그맣게 적히곤 했다. 누군가는 그 글을 보고 정리가 안 되어 있다고 말했지만, 누군가는 그게 매력이라고도 했다. 말은 못 해도 글로 말을 대신하는 재주가 있다고도 했다. 한때는 깔끔하게 글을 쓰고 싶어서 서론 본론 결론을 정해놓고 적기도 했지만 그렇게 쓴 글을 나중에 읽어보면 기계가 쓴 것 같이 아무런 느낌도 동요도 없어서 다시 찾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대개 정보를 얻으려고 글을 읽는 것 같지만, 누군가는 공감하기 위해 읽기도 하고, 누군가는 세상이 시끄러워서 읽기도 한다. 나의 글은 그중에 어떤 것에 속할까. 개인적 바람으로는 그냥 읽고 잊히는, 가볍게 읽고 지나치는, 아는 사람과 한껏 떠들다가 각자의 삶으로 헤어지는, 그런 글이었으면 좋겠다. 속 시끄러울 일도 없고 찬반을 나눌 일도 없고 아니꼬운 것도 없이 밋밋한, 그러면서도 조금은 사람다운 글이었으면 좋겠다.
다시 연차로 돌아와서. 연차를 쓰기 위해 그전날 늦게까지 야근을 했어도, 나는 아주아주 괜찮다. 왜? 나에게는 종일 벽과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는 회사에서의 시간과,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가라앉을 수 있는 시간의 가치가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오래 쉬는 것도 고역이지만 오래 일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물어 무엇하고 말해 무엇할까.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란 사람은 그렇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조용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멍하니 하늘과 나무와 새를 바라볼 수 있는, 세상 걱정 없는 베짱이 같은 시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