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이 대체할 언어
다양한 블록체인 거버넌스의 논의 중에서 결정적으로 빠진 건, 거버넌스의 역사다. 블록체인을 앞세우다 보니 블록체인과 관련한 논의는 2008년부터 정리한 글들이 꽤 있지만, 거버넌스와 관련한 논의는 거의 없다. “왜 거버넌스가 필요한지?”, “블록체인 거버넌스는 가능한지?” 등 거버넌스 논의가 심도 있게 다뤄진 글은 보기 힘들다.
거버넌스의 등장은 앞서서도 정리했지만, 국가 정부의 한계, 대의 민주주의 한계, 그리고 복지 국가의 한계, 세계화 등의 문제로 현재 거버먼트로는 합리적으로 국가와 사회를 운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글이 4차 산업혁명을 운운하고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시스템으로 ‘블록체인 거버넌스’를 제안한다. 시스템을 논한다면, 방점은 ‘거버넌스’에 찍혀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많은 글은 블록체인에 방점을 찍고 있다.
블록체인은 기술이다. 즉 방법, 도구이다. 기술이 추상적인 개념보다 현실적이고 가시적이라는 의미에서 쉽게 잡힐 수 있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거버넌스를 실현하는 방법으로써 블록체인이지 거버넌스 자체로 블록체인을 대신 쓸 수는 없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거버넌스는 블록체인이라는 말과 같이 사용하지 않아도 그 의미가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블록체인 거버넌스라고 할 때, 거버넌스가 빠지면 그저 우리가 아는 암호화폐가 등장하는 블록체인이 된다.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블록체인의 기술적인 혁신은 인정할 수 있지만 실제로 블록체인 자체가 거버넌스 역할을 대신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블록체인은 그 정착과 활용에 이르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꽤 존재한다.
블록체인은 제2의 인터넷으로 불리고 있다. 인터넷도 초기에 사용자가 별로 많지 않았을 때는 그 사용 범위와 의미가 과소평가됐다. 이후 사용자가 많아지고 그 편리성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도구로써 활용이 활발해지자, 인터넷 없이는 아무 일도 못 하는 상황이 됐다. 블록체인이 인터넷 수준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새로운 시스템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기본적으로 수많은 사용자, 제도적 지원, 인터넷 수준만큼의 많은 개발자 등이 요구된다. 그런데 현실은 초기 인터넷 상황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리고 한 가지 놓치고 있는 사실이 있다. 바로, 경쟁이다.
“파괴적 혁신”의 클레이턴 크리스텐슨(Clayton M. Christensen)가 공저한 『일의 언어』에서는 “언어의 존재 이유는 언어가 하는 역할을 의미한다”라고 한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라고 한다면 스마트폰을 만들고, 가전제품을 잘 만드는 회사 언어인 셈이다. 물론, 이러한 언어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변한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삼성전자 대신 소니가 대표적인 전자 회사를 의미했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새로운 언어가 과거의 언어를 대체하는 과정은 자연도태가 아니라 약육강식이다.
그 역할을 다 해서 자연스레 소멸하거나 퇴보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강자한테 그 지위를 강제로 뺏기고 약자가 돼서 잡아 먹히거나, 사라져 버린다. 그렇다면, 블록체인이라는 언어는 어떤 ‘일의 언어’가 될 수 있을까? 다양한 분야에서 블록체인은 새로운 일의 언어로 등극하게 될 텐데, 몇 가지만 살펴보자.
블록체인이 대체하게 될 언어
첫째, 블록체인이 대체할 언어는 인터넷이다.
제2의 인터넷으로 불리고 있으니 당연하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이 꽤 많다. 인터넷 개발은 1960년대 후반에 이뤄졌지만, 그 상용화는 1990년 이후나 돼서 가능했다. 물론, 이후 등장한 기술은 인터넷을 범용 기술(general purpose technology)로 해서 발전하고 개발됐다. 블록체인도 인터넷을 바탕으로 발전한 기술이다. 적어도 블록체인을 원활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인터넷이 필요하다.
이렇게 따져보면, 블록체인은 그 혁신적인 의미와 앞으로 개발, 발전 측면에서 인터넷과 같은 수많은 창의적 성과물을 낳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인터넷 자체를 대체할 수는 없다. 블록체인 역시 인터넷을 범용 기술로 활용해서 발전할 테니 말이다. 따라서 인터넷과 블록체인은 상보적인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둘째, 금융이다.
2008년 금융 위기가 블록체인을 태동시키고 개발하고 발전하게 만든 계기였다. 암호화폐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화폐다. 모든 화폐가 그렇지만, 무형의 신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현재 비트코인을 필두로 많은 암호화폐가 사용되고 있고, 국내에도 지역마다 지역 화폐를 쏟아내고 있다.
안타까운 점은 암호화폐를 만드는 건 좋지만, 그 사용 정도와 효과가 얼마나 있는냐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과거로부터 트렌드에 민감해서 그 효과를 따지지 않고 일단 실행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가 결국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한 하드웨어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2002한일월드컵을 준비하면서 지방마다 월드컵 경기장을 신설했는데, 월드컵 경기장은 종합 경기장이 아니라 오직 축구만 할 수 있는 용도로 건설해야 해서 월드컵 이후 활용도가 현저히 떨어졌고, 결국 지방자치단체 예산을 수혈받아야 유지되는 구형 뱀파이어 신세를 면치 못했다.
블록체인은 분명 금융 분야에서 혁신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금융이라는 말 대신 ‘블록체인’이 사용되지는 않겠지만, 은행, 인터넷(모바일 포함) 이체, 수수료 등과 관련한 언어는 블록체인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 “은행 가서 정리해!” 대신 “블록체인으로 정리해!”, “인터넷 이체해!” 대신 “블록체인으로 이체해!”, “수수료가 얼마네.” 대신 수수료라는 언어가 사라질 것이다. 실제로 금융을 대표하는 오프라인 은행이 점점 줄어들고 있고, 길게 번호표를 뽑고 대기하는 일도 과거의 추억이 될 공산이 크다.
실제로 사토시 나카모토가 블록체인을 만들었던 시점이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시점이었음을 고려할 때 블록체인은 금융을 대체할 수 있는 언어라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단,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단, 금융을 지배하는 권력과 대결해서 승리해야만 가능한 시나리오다.
블록체인이 아무리 민주화, 탈중앙, 분권화 등을 외친다고 해도 기득권은 존재할 것이고 역사가 보여주듯이 새로운 지배계층이 등장하는 것이지 완전한 평등과 자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블록체인 집권층이라는 표현이 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거버넌스 블록체인’이 필요하다.
셋째, 유통 검수이다.
유통은 원산지부터 소비자에게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의미한다. 실제로 원산지에서 택배로 토산품 등을 받으면 여러 중간 유통 단계를 거치는 상품과 비교해서 훨씬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상품 원산지를 조회해서 구매한다는 게 쉽지 않으니 대부분 상품은 중간 유통과 검수가 있다. 하지만 블록체인을 활용하면 중간 검수 과정을 생략할 수 있다. 블록체인을 활용해서 바코드나 QR코드를 부착하면 원산지부터 내 집 앞에까지 도착하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블록체인 대신하게 될 더 많은‘일의 언어’가 있겠으나, 위에서 다룬 언어만 보더라도 기존 산업 종사자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는 걸 예측해 볼 수 있다. 결국, 블록체인은 인간이 하는 업무를 대신하게 될 것이다. 은행 직원을 대신하고, 중간 유통자를 대신하는 등.
그런 의미에서 블록체인이 대체할 가장 큰 언어는 ‘노동자’이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이자, 혁신성을 인정받는 기술이지만, 인간의 미래 노동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때는 양날의 검과 같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거버넌스가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