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복신앙의 한계, 몰락하는 교회
권력
나이가 들면 변화를 싫어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나이 든 교인은 교회의 어른으로 대접받으면서 현재 교회가 본인들 중심으로 유지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변화에 대한 거부와 때늦은 반응이 교회의 특징이 됐다.
정치적 성향도 여러 번의 선거를 치르는 동안 보수적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아홉 번째 헌법을 개정한 후 2명의 장로 대통령이 선출됐는데, 둘 다 보수당 출신(신한국당 전 김영삼 대통령, 한나라당 전 이명박 대통령이다)이었다. 지역 성향이 반영된 것만큼이나 종교적인 성향도 크게 반영됐는데, 전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 기독교인 70% 이상이 지지했다. 이와 같은 성향은 기복신앙과 연결된다. 권력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MB 집권 당시 유행했던 말이 ‘고소영’이었다고 한다(고려대학교 출신으로 소망교회를 다니고, 영남 출신). 교회에 목회 권력자뿐만 아니라, 세속 권력자들도 모인 것이다. 이러한 권력의 야합에 대해 교인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교인들은 권력자들 즉, 성공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가 축복받았다고 생각한다. 원래 교회는 일요일 11시가 되면, 전국 각 지역 교회에서 위정자를 위한 대표 기도가 거의 동시에 진행된다. 물론, 국가와 사회를 위한 기도는 필요하다. 개인의 구원을 넘어서 사회구원의 시작이 기도에 있음을 부인하지 않겠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렇게 기도해도 위정자들은 복지부동하며, 사회 역시 선한 방향으로 진전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가 공평한 세상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위정자를 경외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기도 내용은 위정자들이 하나님 뜻에 맞는 통치를 기원하지만, 교회의 성향에 따라 위정자를 위한 기도 내용도 다르다.
진보를 자처하는 교회와 보수적인 교회의 기도 내용은 차이가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유사한 점을 찾는다면, 권력에 대한 소망이다. 세상을 보다 선하게 만들 수 있는 주체가 권력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르지 않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을 믿는 장로 대통령과 그를 추종하는 위정자들이 교회에 모이는 현상에 대해서 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가 성장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결과는 어떤가? 믿음이 좋은 사람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정치적으로는 완벽하게 실패했다. 현재 전 대통령은 구속 수감 중이고, 당시 국가 운영 중에 저질렀던 많은 과오(過誤)가 밝혀지고 있다(물론, 정치적 성향에 따라 의견이 다를 수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교인들은 그들의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기복신앙’의 영향이다. 즉,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잘못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범죄를 저지르거나 실수를 범한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이 나온다. 이들의 위대한 점은 초인적인 선함이 아니라 잘못을 인정할 줄 알았음에 있다. 그들도 축복의 근원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었다. 단, 한국 교회의 교인들과 다른 점은 그 축복을 거둬 갈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점이다.
성공을 갈망
교인들은 부자들을 좋아하고 정치인도 좋아한다. 성공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증거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복신앙(祈福信仰)’은 그 시비(是非)를 떠나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한국 교회를 유지하는 큰 동력이다.
교회는 성공을 위한 부적이 아닌데, 한국 교회는 교회가 여전히 부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광고한다. 천지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께서 자신한테 열심 있는 한 인간을 출세시키는 일은 어렵지 않다는 게 교회의 논리다. 논리적으로 보면 틀린 내용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가 틀렸다. 쉽게 생각해 보자.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열심인 한 인간을 출세시킬 이유가 있을까? 세상을 아름답고 평화롭게 만들기 위해서 인간을 출세시킬 이유가 있을까? 소수를 택해서 성공시키는 것보다, 지금도 몇 초 만에 한 명씩 굶어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과 그런 사회에 '만나'를 내려주시는 것이 더 전지전능한 신처럼 여겨지지 않는가?
구약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주인공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이 좋은 본보기인 것은 분명하지만,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들을 개인 성공의 표본으로 이해해서도 안 된다. 아울러 수많은 등장인물, 특히 선지자들의 최후는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바알을 섬기던 제사장들을 도륙한 후 자신감 충만했던 엘리야마저도 죽기를 청했을 정도였다. 가장 두툼한 선지자 서의 이사야조차도 잔혹한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신약 시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주인공인데, 십자가형으로 죽었고 대표적인 사도 베드로와 바울도 순교를 피할 수 없었다.
교회는 순교로 세워졌다. 그러다가 교회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순교자로 만들었다. 역할이 바뀐 것이다. 이런 교회를 하나님이 참된 종으로 인정하실까? 지금처럼 거대 권력을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더 큰 부와 힘을 추구하고 세상을 멋대로 지배하려는 교회를 과연 전지전능한 신이 칭찬할까?
최근 보수라 자처하는 교회들이 시위와 예배를 강행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래야만 살아남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살아남는 게 아니라, 이념적으로, 물질적으로 연명할 수 있다는 의미다. 대한민국 국민 90%가 반대해도 10%만 찬성하고 서포트하면 그런 집단은 죽지 않는다. 물론, 시위할 수 있다. 그리고 반대 집회할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순교자 코스프레하면서 모이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교회의 인맥은 과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영향력 행사를 당연하게 여기고 그 영향력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까 봐 노심초사한다.
1907년 평양 부흥 시기 기독교 인구 비율은 현재와 비교할 때 한 참 못 미친다. 1907년 대부흥을 기념하고 큰 의미를 회고하는 전국적 기독교 행사를 2000년대에 진행했지만, 초기 한국 기독교 인구 비율은 전체 인구의 1% 수준이었다. 그 시기의 부흥은 영적인 각성이었다. 개인의 정직, 사회 정의를 부르짖었다.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대표 중 대다수가 기독교인이고, 기독교인이 가장 많이 참여하고, 옥살이를 경험했다.
오히려 수적으로 부흥한 기간은 6·25 이후이다. 북한에서 기독교의 위세를 떨치고 명망이 높았던 목사들이 월남하고, 반공을 가장 큰 푯대로 세운 정권과 적절하게 타협해서 기독교가 성장한 것이다.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관계를 고려하면, 당연지사다.
이후 교회는 미군정 시대부터 한국과 미국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로 성장했고,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흔히 말하는 통역 정치인데, 당시 통역자 중에는 기독교인이 상당수였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교회의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하나님의 영향력이 커졌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교회의 영향력만 커졌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생긴 것이다.
과거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현재와 같이 외부로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의 거센 비판은 피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도 현재의 교회 권력은 회개의 기회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죄 많은 세상의 억압과 핍박이라고 해석한다.
많은 교인이 기독교 선진국이라고 착각하는 유럽 교회 상황은 인구 비율로 볼 때 10% 이하로 떨어졌으며, 로버트 퍼트 냄(Robert David Putnam)의 『아메리칸 그레이스』에서는 세계 최고 기독교 인구를 가진 미국도 그 정서가 예전 같지 않음을 분석했다.
남반구에 위치하는 국가들에서는 기독교 인구가 늘어나서 그 덕에 기독교 인구는 늘어나고 있고 3대 종교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한다. 그러나 웬만큼 경제적 성장을 이룬 국가에서는 기독교 인구가 줄고, 오직 가난한 국가를 중심으로 해서 기독교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부자의 종교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종교인 셈이다. 가난한 자가 복을 받으리라는 예수의 말씀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일까?
2차 산업혁명 시대의 산업화를 겪고 3차 산업혁명 시대의 정보화의 파고가 훑고 지나간 국가들에서는 기독교 인구는 줄고 있다. 경제적으로 일정 수준이 되면,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지는 경향을 볼 수 있는데 마찬가지로 종교를 믿는 신자들의 수도 줄어든다. 원인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우선, 과학 기술 발전이 초월적 절대자를 미신으로 추락시킨다. 다음으로 기존 종교기관의 절대 권력 부패 현상으로 비 신앙인뿐만 아니라 기존 신앙인들도 외면하는 과정을 거친다. 인간 지성의 발달이든, 아니면 교회의 자승자박(自繩自縛)으로 인한 몰락이든, 한국 교회의 현재 상황은 사면초가(四面楚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