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세상 읽기 : 4차 산업혁명과 기독교(13)

무너진 방어벽 : 적응력의 부재, 소통의 부재

by 조작가Join



무너진 두 번째 방어벽 : 적응력의 부재


2차 방어벽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기독교 도입 당시부터 산업화 시기까지 한국 사회의 발전을 이끌 수 있었던 가치와 동력이었다는 것, 이후에는 그 반대의 위치에 놓였거나 혹은 발전을 따라가기 힘든 수준으로 전락했다는 의미다.


과거 한국 기독교는 한국 사회를 리드했다. ‘만민평등’ 사상을 전했고, 교육, 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근대화에 관련한 제도와 문화를 전파했다. 당시에는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혁신적인 가치 생산자였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교회는 세상의 과학 기술, 사상 등의 발전에 이렇다 할 대응이나 반응을 하지 못한다. 그저 ‘창조의 질서’만 무한대로 반복했을 뿐이었다. 복제 양 돌리가 출현했을 때도 기독교는 ‘창조의 질서’를 운운했고, ‘신은 죽었다.’라고 하니, 말장난으로 간주했다.


2000년대 초반에 트랜스 젠더 하리수가 공중파에 출현하고 대중의 관심을 받자 교회는 역시‘창조의 질서’를 운운하며 방어한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구분해서 창조했다는 것이 반대의 이유였다. 논쟁을 할 수 없었다. 많은 토론 속에서 기독교 대표들은 '창조'만 부르짖었고 현대 과학과 철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무엇보다 심각한 일은 그들이 가진 사고가 절대 선이자 진리라고 생각하는 교만이었다.


3차 산업혁명 시대에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정보화 시대가 도래하자, 교회는 휴대폰 사용을 중지해 달라는 메시지를 예배 화면에 띄웠다. 그리고 홈페이지에는 담임 목사의 설교를 올려서 교인들이 아무 때나 시청할 수 있도록 했다.

2차 산업혁명 시대의 파이프라인은 일방적인 흐름이었지만 3차 산업혁명 시대에 이르면, 흐름이 쌍방향으로 바뀐다. 미래학자들이 ‘프로슈머(prosumer)’를 말하고, 소통을 강조하고, 개방을 강조하고, 긴장 상태를 즐기는 가운데 토론을 즐겨야 하는 공동체를 강조했지만, 교회는 철저히 무시했다.


‘하나님의 종(목회자)’은 절대적이어서 비판받는 걸 견디지 못했고, 절대적인 진리였기에 쌍방소통은 애당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창 유행했던 ‘프로슈머’라는 개념은 교회 내에서 존재할 수 없었다. 실제로 1주일에 단 한 시간 만나는 교인들한테 소통을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리고 외부인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교회에서 개방성을 논하는 것도 어불성설이었다.

교회 내에서의 토론은 분란을 조장하는 사탄의 계교로 취급받는 상황에서 교인들은 그저 교회에 헌금 내고, 축복을 빌어주는 목회자의 말씀을 믿으면 됐다. 토론이 필요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정답을 말해주는 ‘하나님의 종’이 있는데 “웬 토론이냐?”는 것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제대로 적응하지도 못한 교회는 장년층에게는 익숙함을 줬는지 모르지만, 새로운 세대들에게는 멀리하고픈 ‘꼰대’가 돼 버렸다. 그런데 그 ‘꼰대’라는 것이 좋지 않은 이미지라는 걸 인식했는지, 청년들만 별도로 모여서 드릴 수 있는 새로운 예배를 제공했다.

처음에는 세대 간의 다른 사고를 존중한 조치로 보였다. 청년들이 능동적인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교회는 세대별로 구분됐고 더는 연합할 수 없는 구조가 돼버렸다.

교회는 원래 다양한 계층을 포용할 수 있는 관용과 협력의 정신으로 세워지고 운용돼야 하는데, 교회는 스스로 세대 간의 구별을 인정하고, 그 역할을 분리해서 또 다른 분열과 갈등의 원인을 만들었다.


이런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면서 왜 청년들만의 예배가 필요합니까?라고 질문하면, 답은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달라서이다. 그런데, 세상의 변화에 따라서 예배가 변화했는가를 질문해보면, 특별한 답이 없다. 왜냐하면, 예배 형식은 크게 바뀔 수 없기 때문이다. 찬송하고, 설교하고, 기도하고, 예배 끝에 목사의 축도로 끝나는 형식이 얼마나 바뀔 수 있을까?


물론, 설교 메시지가 다르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설교 30분으로 인생이 바뀌는 경험한 교인은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적을 것이다. 취지야 어쨌든 결론적으로 예배의 구분은 준 장년층이라고 할 수 있었던 청년부를 주일 학교에 가깝게 바꿔버렸다.

교회마다 다를 수 있지만, 과거 청년부는 담당 목사가 배정된 거를 제외하고는 다른 장년층의 지도나 도움을 받지 않는 자치조직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청년들의 연령층은 계속 높아지고 있으나, 장년층의 보조를 받고 있는 형국이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긴 것일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세상을 독해하는 교회의 눈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세상에 교회가 적응해야 한다는 관점은 좋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눈이 없었다. 과거의 틀로 새로운 세상을 보니, 이해와 해답이 제대로 나올 수 없었다. 2차 산업혁명 시대의 틀로 3차 산업혁명 시대의 변화를 이해하려 했으니, 그 해결방법은 오히려 족쇄가 돼버린 것이다. 오히려 역효과를 유발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교회 밖의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목회자가 서 있었다. 스스로 절대화를 외치던 목사들은 이후에 세상 속 다윗의 다양한 물맷돌을 골리앗처럼 맞기 시작했다.


세 번째 방어벽 : 소통의 벽(부재)


세 번째 방어벽은 소통의 벽이다. 소통의 벽은 두 가지로 나눠서 살펴볼 수 있는데, 하나는 교회 내에서의 소통의 부재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과 소통 부재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예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예수는 유대인의 선민사상을 부정했고(어떤 의미에서는 부정하기보다는 선민답게 살라는 가르침을 전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만민이 자녀임을 전파했다.


예수는 공생애 3년 동안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가르치고, 치유하고, 선교했다(흔히 말하는 세 가지 사역이다). 수많은 군중이 예수를 따라다녔지만, 세상과 구별된 건물을 짓거나, 경계를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들면서 종교의 허례허식(虛禮虛飾)을 지적하고, 언행의 일치를 강조했다. 가난한 자를 직접 도와주었으며, 병든 자들을 직접 안수해서 낫게 했다. 복음은 정주해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임을 몸소 보여주었다.

그러나 현재 한국 교회는 어떠한가? 내부에서는 세대별로 소통이 단절됐고, 세상과 소통은 하지 않으면서 세상의 공격과 비난, 비판 등에 대응하려 하지 않고 교회 건물 뒤에 몸을 숨기고 있다. 먼저, 내부의 단절을 살펴보자.


교회 내부의 단절 : 예배의 분열

교회 내부의 소통 부재는 세대 간 단절이다. 대표적인 예가 세밀하게 나눠진 예배이다. 교인 수가 수백 명이 넘 으면 예배 시간을 나눈다. 초대형 교회가 즐비한 한국에서 동시에 한 공간에서 예배드리는 건 물리적으로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모든 성도가 한 번에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가 더 많다.

흔히 말하는 대예배는 1부, 2부 등으로 구분돼 진행되고 있으며 청년들, 혹은 대학부 예배가 별도로 존재한다. 각 연령층에 맞는 예배를(스타일? 혹은 설교 내용?) 추구한다는 것이 명분인데, 이런 식으로 구분하면 예수를 보기 위해 모였던 남녀노소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혹, 더 세밀하게 구분하고 싶다면 각 개인에게 어울리는 맞춤별 설교를 해줘야 하는 거 아닐까? 결론적으로 나이가 다르면 새로운 말씀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복음의 보편성은 실종된 것일까?


교회 부서 운영은 그 특성을 고려해서 별도로 운영하는 것이 좋을 수 있다. 하지만, 예배를 세밀하게 쪼개서 드리는 것은 교회가 예배를 통해 하나 될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다.

예배로 통합되지 못한 교회는 분열의 시한폭탄을 설치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갈등은 오직 모든 성도가 함께 예배드림으로써 해소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업도 대표의 의지가 말단 사원에게까지 전달되는 수준에 따라 그 운영의 성패가 결정된다고 하는데, 교회 역시 같은 메시지를 듣고, 생각하고 나눔이 있어야 건강한 성도의 교제가 이뤄지지 않을까?


청소년들은 교사가 기성세대여서 거리감을 느끼고, 청년들은 장년층이 부모 세대여서 공감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가족 간의 세대 갈등이 교회에도 그대로 반영돼 있다. 열린 예배, 혹은 청년부 예배 등으로 포장해서 나눠진 예배는 교회 공동체를 지켜주는 예배라는 방어벽에 실금을 남기는 꼴이며, 결국에는 큰 둑이 무너지듯이 무너지게 될 것이다.


세상과 소통 부재

세상과의 소통 부재는 결과적으로 교인 수를 줄게 할 것이고, 세상을 향해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교회의 복음은 웅덩이의 물처럼 고여서 고루해지고 부패하고 말 것이다.


초대 교회 시절 외부에서는 성찬식을 식인 행위로 오해했듯이 복음을 ‘웃픈’ 미신으로 간주할지도 모른다.

현재 코로나 상황에서 집회를 강행한 종교 근본주의자들의 행태는 많은 오해를 양산하고 있다. 이전부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간의 십일조를 탐하는 재물에 눈먼 욕심 많은 신으로 인식되고, 예수 또한 그 신성이 역사와 과학을 통해 계속 부정되면서 인간화되고 있다. 이미 그의 무덤까지 발견됐다고 고고학자들은 선언했다.

천동설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모든 기독교인, 그리고 의학과 과학의 힘을 믿는 많은 기독교인이 있지만, 교회에서 신성하게 여기는 부분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면, 신성모독이라 하여 강력하게 비판한다.

도대체 수용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저 작위적인 기준일 뿐이다. 시간이 더 지나면, 이 기준이 더 무용화될 가능성이 크다.


90년대에 ‘할렐루야(1997년 작품)’라는 영화가 제작되고 상영되자 교회를 모독했다 하여 반발이 있었다(참고로 ‘달마야 놀자’라는 불교를 배경으로 한 영화도 있었는데, 불교계에서는 오히려 장려했다고 한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가 영화로 제작되고 상영하려 하자, 역시 기독교 단체는 거세게 방해했다. 픽션과 논픽션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기독교는 창작물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예수의 무덤』과 관련한 내용이 영국 BBC에서 방송되자 해외 기독교 단체는 거세게 비판했다. 국내에서는 많은 목회자가 언급조차 하고 있지 않으며, 이 내용을 접한 목회자는 거의 없다.


세상을 모르는 신학생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신학대학원을 반드시 나와야 한다. 학부를 졸업하더라도 신학대학원을 나오지 못하면 목사 안수를 받지 못한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신학교가 있으며, 목사 안수를 주는 대학원도 상당히 많은데, 그중 대부분은 비인가 신학교이다. 해외 유명한 신학교에 한국인이 제일 많고, 서울시 택시 운전기사 중 절반이 신학교 출신이라는 것은 2000년대 초반에 들은 이야기들이다.

현재 모든 학문의 과정이 그렇듯이 신학대학원에 들어가면, 신학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동시에 특정한 교회에서 교역자 활동을 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 전공자들 역시,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학습이 충분하지 않다. 현실적으로 다른 학문에 관심 두는 것 자체가 힘들다.

과거에는 종교인에 대해 존중의 시각이 있었는지 몰라도 현재는 스스로 선택받은 자라고 착각하고 있는 광인(狂人)으로 본다. 그들은 세상을 잘 모르고 과학은 더 모르며 새롭게 도래할 산업혁명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세상에 몸소 뛰어들어 설교했던 예수와 죽도록 선교 여행을 다니면서 교인들과 교류했던 바울의 모습이 현재 한국 교회 목회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평일에도 교회를 나와서 업무를 하고, 주일에는 깨끗한 양복과 넥타이를 매고 친절한 미소를 짓는, 흡사 고급 레스토랑의 지배인을 보는 듯한 목회자가 있을 뿐이다. 목회자가 현실을 모르고 전하는 메시지를 교인들은 피상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마치, 현대라는 험난한 길을 맹인의 안내로 움직이는 것과 같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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