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세상 읽기 : 4차 산업혁명과 기독교(14)

나 홀로 ‘창조 질서’

by 조작가Join

방어벽은 겁쟁이의 변명일 뿐이다


‘진격의 거인’의 세 가지 방어벽을 빗대어 교회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세 가지 이유를 말했다. 과거 역사를 돌아볼 때 장벽을 세우거나 성을 쌓는 것은 개방이나 확장을 위함이 아니라, 방어와 현 상태 유지를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자신감을 거두고 철저히 수세로 돌아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도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때는 방어벽이 필요 없었고, 오히려 더 멀리 나아가 땅을 개척하는 데 여념 없었다. 로마의 경쟁국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편에 있었던 중국도 성을 쌓지 않았다. 그러다가 흉노족의 침입에 대한 방어책으로 만리장성을 축성했다.


예일 대학교 로스쿨의 교수인 에이미 추아의『제국의 미래』에서는 제국의 특징이 다양성의 존중과 개방성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큰 원인이 자신감이었다고 한다. 어떤 상대와 겨루어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그래서 제국 문화의 자부심이 다양성을 인정하고 다채로운 문화에 개방적일 수 있었다.

최근에 나온 많은 서적에서는 ‘포용’을 강조하면서 경제, 정치, 문화 등을 포용할 수 있는 국가나 도시가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다양성을 인정하고, 개방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조직이나 사회가 미래에 경쟁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어떠한가? 다양성을 존중하고 개방적인 교회의 모습일까? 한국 교회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국가라는 자부심이 있으며(최근 자료를 보면, 두 번째가 아니다), 유럽의 기독교가 몰락한 이후에 유럽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물론, 한국 유학생들이나 교포를 대상으로 한 경우가 대부분일 테지만, 수많은 국가에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대국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이미, 유럽은 기독교 국가라고 하기 힘들다. 유럽의 현상에 대해서는 다르게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기독교의 역사』에서 “유럽의 비기독교적인 현상을 오히려 특이한 것이라 이해하면서 남반구에서는 기독교 인구가 늘어나고 있으며 한국, 미국 등은 기독교가 주요 종교로 자리 잡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기독교 성장이 대부분 개발도상국 수준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며, 어느 정도 경제적 부를 달성하면 기독교가 쇠퇴하는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미국의 기독교 수준도 로버트 퍼트냄의 『아메리카 그레이스』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종교적인 수준에서 문화 활동 수준으로 변하고 있으며, 작고한 사무엘 헌팅턴은 9·11테러 이후 출간한『미국』에서 미국의 기독교 신자가 세계 최고(최다) 수준임을 보여주었지만, 이 부분도 논쟁의 여지가 있다. 테러 이후, 일시적인 현상이었을 수도 있고, 그가 이전에 저술했던 『문명의 충돌』의 연장 선상에서 종교를 분석했기 때문에 정해진 결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왜 기독교는 쇠퇴할까?


전 세계적으로 볼 때 기독교의 쇠퇴는 선진국에서 두드러진다. 그 원인은 세상 변화라는 거센 파도에 올라타서 서핑할 수 있는 유연함이 부족했고, 파도 위에서 서핑을 즐기기보다 오히려 파도의 높이에 겁먹고 제방을 높게 쌓아 버렸기 때문이다.

파도의 높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스릴을 즐기면서 세상에 떠올랐거나 떠오르는 기업들은 파고가 좀 더 높아져도 쉽게 적응할 수 있지만, 낮은 파도에도 제방을 쌓은 교회는 더 큰 파도에 몸을 더 움츠리며 더 높은 제방을 건설해야만 한다.


그러나, 얼마나 높게 제방을 쌓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제방을 넘어 들어오는 물은 어떤 방법으로 얼마나 제거할 수 있을까? 눈치 빠른 교인들은 이미 교회와 세상에 양다리를 걸쳤고, 교회의 제방 안쪽에 머무르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의 파도 속에서 서핑을 즐기는데 더 큰 노력을 기울인다.

세상에 잘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개인은 교회 내부에서 세상에 적응했다는 사실을 숨기면서 생활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외부와 공개적으로 연결되는 것을 꺼리고, 구별된 자로 남기 원하기 때문이다. 혹은 속세에 찌든 인간이라 할지라도 교회에 재정적으로 도움이 된다면, 묵인해 주는 경우도 허다하다.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하고, 기독교의 가치로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해야 함에도 교회는 현상 유지에 급급한 실정이다. 게다가 교회의 불투명성은 여전해서 세상에서 당연히 여기는 투명성도 거부한다. 교회가 여전히 소수만의 밀실 회의로 결정하는 구조로 돼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복음 수호를 위해 제방을 쌓는다고 말하지만, 그 제방은 복음을 제대로 수호하지 못할 것이다. 복음은 수호해야 하는 성격이 아니라 퍼져나가는 게 근본이기 때문이다. 널리 퍼져야 하는 성격의 복음을 묶어 놓는 것은 기본적으로 현재 교회가 제대로 복음 전파를 못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반론할 것이다. 노방전도하고 선교도 하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여러모로 애쓰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전하는 방법과 메시지는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목사들의 설교는 신약 시대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라는 그들의 아우성은 맞다. 그러나 전달하는 방식이나 적용 방법은 시대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


다음으로 복음의 힘이 세상의 거센 풍파를 이겨내지 못하리라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예수 복음은 죽음도 막지 못했고, 그 십자가 피로 교회가 세워졌다는 사실을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안다. 거센 세상의 파고를 이기지 못하는 건 복음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다. 즉, 현재 권력을 계속 유지하고 싶은 교회 기득권층의 바람이다.

소수 권력층을 위한 제방은 반드시 무너지게 돼 있다. 그리고 4차 산업혁명 시대는 그 붕괴를 더 빠르게 가져올 것이다. 모이제스 나임의『권력의 종말』에서는 거대 권력으로 상징되는 기관으로 글로벌 기업, 정부와 함께 초대형 교회를 포함했는데, 과거 힘의 상징이라고 여겨졌던 거대한 권력이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 이유는 거대 권력의 힘이 그 규모에 발목이 잡혀 변화에 유연하게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성장과 부침


1차 산업혁명은 유럽에서 시작했고, 정치발전, 경제성장, 사회변혁 등이 있었지만, 교회는 붕괴됐다. 특히, 계몽사상으로 무장한 새로운 지배계층은 기독교를 숭배하지 않았다.

한국은 산업혁명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고, 결국 2차 산업혁명의 수혜를 입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다. 자발적인 근대화 수용은 아니었지만,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기독교는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었다.


물론, 근대화만이 교회 성장의 원인이었던 건 아니다. 해방 이후 전 세계는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로 나뉘어 이념전쟁을 시작했는데, 이러한 냉전 기간이 기독교가 성장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한 것이다. 남북의 대치 상황에서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의 동아시아 방파제 역할을 해야만 하는 남한을 원조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는 여타 종교보다 성장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3차 산업혁명,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보화 시대에 교회는 성장과 규모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지 못해서 ‘개인’이 새로운 주체가 된 시대에 민첩한 연결에 실패했다. 네트워크를 제대로 구성하지 못한 것이다. 혹 기독교를 잘 모르는 사람은 기독교의 세계적 네트워크를 축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후원과 피후원 관계로 연결된 경우가 대부분이고, 혹 조직끼리 연결된 경우라 하더라도 원활하게 소통 할 수 있는 채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연결선이 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갈등도 극복할 수 없는 얇은 연결망이어서 곧 끊어질 것 같은 썩은 동아줄과 다를 바 없다.


새로운 시대는 규모와 민첩성을 겸비한 조직이 경쟁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이해하지 못한 교회는 제대로 준비할 수 없었고, 여전히 준비가 미흡한 상황이다. 과거에는 스스럼없이 교회 다니는 걸 밝혔던 청년, 청소년들이었는데, 현재는 기피 하는 종교가 됐다. 또한, 과거에 한국 사회를 선도했던 교회는 이제는 사회를 따라가지도 못하고, 심지어 사회와 교회 사이에 고랑을 내고, 성벽을 쌓아서 스스로 구별된 자로 칭하고, 외부와의 접근을 회피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 부흥을 외치는 건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공허한 울부짖음(세상에 대한 연민)과 함께 흐르는 눈물은 당장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게 해주지만,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개신교는 선(善)(실천이라고 할 수도 있다)으로 구원 얻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변화라는 말은 행동으로만 증명할 수 있다. 즉, 악(惡)이 선(善)으로 변했다는 건 드러나는 모습으로만 알 수 있다.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말로만 선포하고 실천하지 않았다면, 그 제자들이 죽음으로 스승을 따랐을까? 그들이 모두 죽음으로 진리를 수호하고자 했기에 지금 기독교가 존재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도 말로만 부흥을 외치지 말고, 세상을 이해하고 다시 선도하기 위한 피나는 노력과 실천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기독교는 몰락할 수밖에 없다.


나 홀로 '창조 질서'


한국 교회의 지금은 대학교 아카데미즘이 상아탑이라고 비판받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세상은 인간의 인지능력을 뛰어넘는 속도로 변화하는데, 세상을 바꾸겠다고 선포하는 교회의 담당자들은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한 교역자가 페이스북에 담당 부서의 청소년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자마자, 그 학생이 교역자에게 올린 사진을 삭제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한 교회의 여성 청년은 인스타그램으로 담당 목사의 친구 요청이 들어오자, 보류했고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받아줄 의향이 없음을 밝히기도 했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알리기 싫은 것으로 해석한다면, 확대해석한 것일까? 공중파에서도 하나님께 그토록 감사했던 ‘스티브 유(유승준)’도 SNS에서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듯하다.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면, 당연히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교인들을 이해하기도 힘들다. 언제까지 자기가 학교에서 배운 것을 토대로 설교하고 교인들에게 믿음을 강조할 것인가? 서울대 종교학과 배철현 교수는 『신의 위대한 질문』에서 에머슨의 일화를 인용하면서 머리로만 신학 하는 종교인들을 비판했다. 체험 없는 책으로 학습한 신학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제대로 적용될 수 없다는 의미다.


앨빈 토플러는 “20세기의 문맹자는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21세기의 문맹자는 더이상 배우지 않고 낡은 지식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성경을 절대 진리로 여기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의미해석과 전달 방식이 과거와 같다면 그 목회자는 이 시대의 문맹인과 다를 바 없다. 그러한 문맹인을 '하나님의 종', '우리 목사님'이라고 떠받드는 성도 역시 문맹이긴 마찬가지이다.


진화론에 대항해서 창조과학이라 일컫는 유사과학을 만들어 냈고, 현재는 지적설계론으로 그 이름을 바꿨다. 지적설계론은 이미 미국에서 과학이 아니라는 판결을 받았으며(2005년 12월 20일 미국 펜실페이니아 중부 미국 연방 지방법원 판결문에서는 지적 설계가 과학이 아님을 판결했다), 실제로 과학이 될 수 없다.

과학은 실험 가능해야 하며 비판에 열려 있어야 하는데, 창조과학은 실험 불가능하며, 비판에 대해서는 스스로 도그마에 빠져 어떤 비판도 거부한다. 황당한 것은 그런 미신을 별도로 공부하고 전하는 교인들이 있고, 그런 거짓을 ‘아멘’으로 확답하는 교인도 많다. 과학적 무지야 전문가가 아닌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삶의 문제에서도 무지한 목회자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성경에 무지한 교인들은 세상에 말씀을 적용하면서 살기 힘들고, 교역자들은 중세의 사제와 수도원에 파묻혀 사는 수도사가 결합한 모습으로 말씀의 해석을 독점하기 때문에 교인들은 목회자의 말씀 해석에 절대적으로 맹신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목회자가 세상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그들의 삶은 세상을 배우고 이해하는 걸 거의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인으로서 방향을 잃어버린 교인, 그리고 그 교인들에게 방향을 제시해 주기 힘든 교역자의 조합이 현재 한국 교회의 모습이다.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한국 교회는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간을 신의 경지에 이르게 만들지도 모른다. 2000년대 후반에 레이 커즈와일은 『특이점이 온다』를 말했고, 2010년이 넘어서면서 빅데이터, 클라우드, 알고리즘, 그리고 인공지능 등의 발달을 관찰한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를 말했다. ‘포스트 휴먼’, ‘트랜스 휴먼’이라는 단어를 뛰어넘어 ‘데우스(Deus)’가 등장했다. 유전자 분야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가 등장해서 이미 많은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고, 인간의 유전자 지도를 분석하는 것은 구글에 맡기면 100달러 정도면 할 수 있다고 한다.


교회가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진화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19세기 다윈의 진화론에 대응한 이후 전혀 발전하지 못한 것에 비해 과학 기술은 상상을 초월한 수준으로 발달했고, 상용화된 기술 수준도 인간의 인지능력을 훨씬 뛰어넘었다. 교회의 나 홀로 ‘창조의 질서’에 대한 외침은 이제 세상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독백이 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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