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관심 없는, 혹은 무지한 강단 설교
한국의 현재는 3차 산업혁명의 막바지를 달리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지수 등을 보면, 20위 권 안에 안착해 있다. 현재 산업 수준도 세계적인 평가 기관에서 나오는 자료를 볼 때 항상 상위권에 속한다.
2015년에 스위스 은행에서 한국의 4차 산업혁명 관련 순위를 25위로 올려놓았고, 아시아에서는 5위였다. 전 세계적인 순위를 보면, 약 200개 국가 중의 순위니 나쁘지 않고, 아시아에서는 5위라 하면 굳이 처지는 순위는 아니다. 이후 한국과학기술평가원에서 나온 자료를 보면 2018년 순위는 15위다.
3차 산업혁명 시대에 우리나라는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한 산업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 인터넷 속도, 스마트폰 보급 등의 순위는 최상위권이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세계적인 수준이다. 그러나 기술 사용자 측면을 생각하면, 별로 생산적이지 못하다.
이러한 추세는 전 세계적이기도 하다. 타일러 코웬은 『거대한 침체』에서 “대부분 사람은 3차 산업혁명의 결과물을 사용하는 소비자로 머물지 생산자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쉽게 말해서, 요금을 내고 사용하기는 하지만, 돈을 벌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모바일 상거래를 하지만, 대부분 구매자로서 사용하고 있고, 다양한 SNS를 통해 교류하고 자신을 알리지만, 그런 활동으로 수익을 올리는 사람은 별로 없다. 물론 극소수의 파워 블로거나 잘나가는 유튜버 등이 있긴 하다.
어느 시대보다 소비가 중요하고 세밀해졌고, 그래서 소비가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처럼 과대광고한다. 그러다 보니, 대표적인 기업들이 모두 사용자들을 소비자들로 만들어 광고 수익을 올리는 데 혈안이 돼 있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인재들이 소비자들의 마우스 클릭 수를 늘리는 데 좋은 머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현재이다.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다. 스마트폰 보급률은 세계 정상급이고, 인터넷 속도도 세계에서 가장 빠른 편이지만, 생산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대부분 수익은 거대 기업의 블랙홀에 다 빨려 들어가고, 부의 격차만 심해졌다. 말로는 공유 경제지만, 사이비 공유 경제다. 실제로 현재 공유경제를 공유경제 1.0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진정한 공유경제는 2.0부터라고 주장 하기도 한다. 수익은 소수에게 집중되고 다수는 돈을 내는 형국이니 말이다. 뭘 공유하는지 알 수 없다.
산업화 시대에 국가는 대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 대기업에서는 인력도 많이 뽑았고, 그 하부업체에도 적지 않은 낙수(落水)를 흘려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대기업은 문어발식으로 모든 산업에 손대기 시작했고, 새로운 기업의 탄생을 원천적으로 막아 버렸다.
과거 대마불사(大馬不死)는 옛말이 됐지만, 대기업이 휘청거리면 국가가 위태롭고 그 위태로움의 대가는 국민의 세금이 충당한다. 이런 의미에서 대마불사는 새롭게 해석된다. 잘못은 대기업 총수가 하고, 그 책임은 국민이 져야 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물론, 이런 일들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8년 미국 금융위기 때 벌어졌다.
이러한 구도는 한국 교회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대기업의 성장과 더불어 교회도 규모의 성장을 추구했고, 일부 교회는 수만 명이 넘는 초초대형 교회로 성장했다. 교회의 성장은 한국 사회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교육과 복지 측면에 있어서 많은 역할을 담당했다. 국가가 돌보지 못한 사회적 약자를 돌보기도 했고, 교육을 통해 많은 청년을 계몽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가 성장주의에 편승해서 기독교는 동반 성장했고, 국가 관료주의는 곧 교회의 모습이기도 했다. 흡사 로마 제국과 교회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것과 사뭇 닮았다.
대한민국 성장과 부패의 모습은 한국 교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3차 산업혁명 시대에 이르러 소비주의가 판치고, 정체성이 명확하지 않은 개인들이 등장하자, 기업은 수익을 위해 방향을 전환하려 노력했지만, 국가와 교회는 쉽게 방향을 전환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기업은 수익을 위해서 기존의 인력을 내보내고 새로운 인력을 고용하는, 흔히 말해 구조조정을 하면 된다. 하지만 국가와 교회는 공무원과 교역자를 쉽게 내보내는 등의 구조조정을 할 수 없다.
오히려 교회는 목사들의 정년을 더 늘리면서 불안한 시대에 자신의 위치를 견고하게 다지는 일에 혈안 돼 있었다. 원로 목사가 돼서도 계속해서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는 어느 교회나 일반적인 일이었다. 그 위대한 성군 세종대왕도 태종이 죽기까지는 그 기를 펴지 못했다고 하는데, 교회의 현실도 유사하다.
교회와 기업, 두 조직은 비슷했다. 왜냐하면, 초기 근대화 시기에 조직을 조성할 때 참고할 수 있는 기존 기관이 군대와 교회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과학이 종교의 시녀였던 시대가 있었듯이 기업도 교회를 롤 모델로 삼아 발전했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역전됐다. 교회가 과학을 무시하는 듯하면서도 발달한 과학 기술 제품을 사용하고 있듯이 기업과 교회가 다르다고 생각하면서도 기업의 운영 방법을 교회에 조금씩 도입한 것이다.
이제 기업은 성장을 추구하되 국가와 교회와 비교해서 유연하게 방향을 전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같은 부류가 아니고 한 단계 진화했다. 삼성 같은 기업은 이런 전환을 통해 세계적인 기업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물론, 대한민국과 한국 교회의 위상도 세계적이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한국에 몰려 있다는 사실을 볼 때 교회의 성공은 다른 국가와 비교할만한 것이 아니다.
국가는 성장도 중요하지만, 국민의 복지와 안정을 추구해야 할 의무가 있고, 선거가 정기적으로 돌아오기에 유권자의 눈치를 계속 봐야만 한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다. 오직 하나님 앞에 떳떳하면 되기에 교인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목사들은 별로 없다. 목사는 스스로 ‘하나님의 종’으로 살기로 작정한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 물론, 정말로 소명 받은 목회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많은 사람이 목사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주변에 신학을 전공한 지인들이 많이 있는데, 실제로 소명 의식을 가지고 목회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쩌다 보니, 목회하는 사람도 있고 혹은 소명을 갖고 목회하다가 현재는 일반인으로 사는 경우도 있다.
한국 교회는 기업화를 추구했지만, 기업처럼 방향을 전환하지 못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목사가 정치인 흉내를 낸다. 지지세력을 모으고, 정부에 반대하거나 이득을 얻기 위해서 현상황을 이용한다. 그러나 코로나 전염병을 이용해서 세력을 불리려는 생각은 패착이었다. 대부분 교인이 크게 동조하지 않았았다.
그 결과 도덕적으로도, 성장에 있어서도 추락을 경험하고 있다. 그런데 기업 같았으면, 벌써 몰락했어야 했는데, 지금까지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비결은 일단, 책임 주체가 책임지지 않기 때문이다. 비자금을 조성한 것이 알려져도, 성추행해도, 헌금을 횡령해도, 책임 주체는 잘 회피한다.
일반 기업은 노동자들이 파업하기도 하고, 노조를 결성해서 대항 세력을 구성하는 데 반해, 교회는 그런 조직을 만들 수 없다. 교인들이 애당초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종’에 대한 처벌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우매함을 신앙이라고 착각한다. 법적으로는 구속될 수 있고, 처벌받을 수 있는 존재인데, 왜 성도들의 머릿속에는 왜 허물 많은 존재로 인식되지 않는 것일까? 최근에 이슈가 되고 있는 전 00 목사의 사례를 보면 한국 교회 일부는 교역자를 여전히 신격화 하고 있다.
그리고 국가와 다른 점은 선거와 같이 재신임을 묻는 제도가 없다. 간혹 교회에 따라 목회자의 재신임을 정기적으로 투표로 묻는 경우가 있는데, 요식 행위에 불과하다. 또한, 국가는 국민의 안전, 복지 등을 책임져야 하지만, 교회는 성도들의 삶의 안전과 복지를 책임질 이유가 없다. 오히려 성도들의 쌈짓돈을 털어서 교회를 먹여 살리고 있는 형국이다.
기업이 새로운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결국, 자기 살을 깎는 구조조정을 통한 것이었다면(물론, 부정적인 방법이 많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는 새로운 신임을 국민, 즉 인간에게 물어야 했기에 현실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오히려 이런 과정이 없어서 살아남을 수 있다. 구조조정을 해서는 안 되며(가난한 사람도 교회에 헌금 한다), 그리고 재신임을 물을 이유도 없다(모든 목회자는 다윗이다. 그저 하나님이 나중에 판단해 주시면 된다). 더불어 한국 사회는 혁명과 같은 사회적 변혁이 있었지만(4·19혁명, 6·29혁명 등), 교회는 혁명의 대상이 되지 않았고, 혁명이나 개혁도 없었다. 대부분 교회가 민중의 편에 섰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분명 일부 교회가 민중들 편에 서서 동조하고 후원했지만, 대부분 교회는 관망하거나 오히려 국가 편에 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파괴되지 않은 것이 놀랍기만 하다.
사회는 변하고 그 과정에서 진통을 겪었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특히, 공룡처럼 성장하고 나서는 변화는 남의 일이 돼 버렸다. 메시지 전달하는 방법도 군중을 향해 크게 소리만 지르는 확성기로 세밀하게 전달할 수 없었다. 음향을 키우고, 더 큰 예배당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 영광을 위한 일이고, 교인들을 위한 것이라는 착각은 계속됐다. 교인들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담임 목사의 설교는 가슴을 울리고, 눈물을 쏟게 만든다. 그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은혜가 되고, 감동이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다. 교인들은 교회를 벗어나면, 삶을 이끌어 줄 나침반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인터넷으로 대부분 업무가 진행되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교회의 설교는 더 추상적으로 들리고, 형이상학적인 구름이 된다. 그렇다고 심사숙고할 만큼의 철학적 메시지도 없다. 대부분 목회자가 중학교 수준의 성도를 대상으로 설교 준비를 한다고 하니, 박사 학위를 받고도 ‘아멘’하는 성도들의 성경적 수준이 낮은 것일까? 아니면, 겸손한 것일까?
설교 메시지는 스토리를 알고 보는 각기 다른 예전 할리우드 액션 영화와 같다. 최근에 나오는 액션 영화는 정의에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들고, 선악의 경계도 모호하게 만드는데, 교회의 설교는 이분법을 벗어나지 못했다. 차라리 설교를 듣고 회의하고 비판하고, 고뇌하면 좋을 텐데, 늘 결말은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만 천국에 간다는 식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천국과 지옥에 대한 묵시록적인 설교는 쉽게 들을 수 없다는 점이다(물론, 명동과 같은 수많은 인파가 모이는 곳에 가면,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다).
사회 시스템은 복잡해졌고, 공동체 파괴는 이미 오래된 일이다. 사회 갈등이 심해졌음을 염려하지만, 오히려 갈등이 있는 가정이나 단체가 다행일 수도 있다. 영국의 극작가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인간에 대한 가장 나쁜 죄는 미워하는 게 아니라 무관심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제는 각자도생(各自圖生)으로 관심조차 없으니 요즘 세상을 쇼가 본다면 지옥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교회는『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 말하는 긴장감이 늘 존재하는 공동체를 제시하지 못하고 갈등을 부담스러워한다. 그저 순종하고,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교회는 사회와 구별되지 않은 기관이며, 그럴 수도 없다. 조직이 있고, 위계질서가 존재한다.
한국 교회는 애초부터 정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니, 오히려 정치적 자각을 위한 설교를 해도 문제가 없었을 텐데, 몇 명의 대형 교회 목사들을 제외하고는 정치적 메시지는 전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 전달하는 정치적 메시지는 보수를 넘어서 수구 꼰대라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시대착오적이다.
강단에서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첫째, 정치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써 무시한다. 그것이 교회가 계속해서 신성을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착각한다. 현실은 국가 조찬기도회가 존재한다. 전 이명박 대통령 시절 길자연 목사는 국가 최고 통치권자에게 회개를 목적으로 무릎을 꿇게했다. 한동안 많은 비판이 있었고, 종교와 정치에 대한 구분과 관련한 글들과 언급이 매 순간 등장했다.
결론적으로 종교와 정치는 그렇게 먼 관계가 아니며, 무관하지 않다. 기독교 역사가 정치 관계의 역사고, 한국 기독교 역시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정치적인 메시지를 설교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정치에 무지함을 인정하는 꼴 이다.
시비(是非)의 문제를 떠나서 어떤 정치적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목회자들이 알고 성도들이 성경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해줘야 한다. 짐 월리스의 『하나님의 정치』는 이런 상황에서 하나의 길잡이 역할을 해줄 수 있다.
두 번째는 성도들의 눈치를 본다. 목회자는 엄격히 말하면, 고용된 자이다. 물론, 자신의 부임지를 선택해서 옮기기도 하지만 담임 목사 경우 최근에는 초빙으로 대부분 이루어진다. 고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교회 조직을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한 상시 직원이 필요하기에 규모에 따라 적정 수의 인원을 채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들을 채용하는 교회 기관은 어디인가?
장로와 목사로 구성된 당회에서 온 교인들을 대신해서 채용한다. 국가 위정자들을 선출하는 대의 민주주의에 비해 더 비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인력을 채용한다. 그러다 보니, 목회자들은 앞줄에 앉은 성도들의 눈치를 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설립한 교회가 아닌 이상 쫓겨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상황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성경적 적용보다도 본인이 고용된 교회의 분위기를 잘 읽어야 한다.
셋째, 목회자들은 현실에서 철저히 벗어났다. 교회는 현대판 수도원이었던 적도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수도원은 중세 시대의 문화와 지식을 전파했던 곳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재는 최신 지식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오히려 사회에서는 과거의 것으로 간주 되어 폐기 처분된 지식이 보편적으로 전달되고 있는 곳이 현재 교회이다.
유전자 변이를 대표하는 생명공학과 관련한 이야기가 논의되지 못하고, 인류의 기원이 최소 200만 년 전부터라 는 역사적 사실도 교회에서 말하면 신기해하는 경우도 많다. 아담이 약 6000년 전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고(기원전 4001년에 천지가 창조됐다는 것을 영국에서 발표했었다), 그것이 최초의 인류라고 생각하는 성도들이 많다는 것을 고려할 때, 과학과 역사는 역설적으로 허구가 된다.
직접적인 정치적 식견도 없고, 그 외의 부분에서도 무지하기에 교역자는 강단에서 아는 것만 이야기하는 것이 안전한 길임을 스스로 깨닫는다. 혹, 틀린 것이라 하더라도 교인들이 동의할 수 있는 수준이면 된다.
물론, 이러한 현실을 목회자가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왜 목회자들은 기본적인 지식조차도 성도들에게 전달하지 않는 것일까?
《콘택트》, 《인터스텔라》와 같은 과학 영화가 상영됐다. 전작은 『코스모스』를 저술한 칼 세이건이 관여한 영화이며, 후작은 2017년 물리학상을 받은 킵 손이 관여한 영화이다. 영화와 관련해서『인터스텔라의 과학』이 출간됐다. 우주에 대한 신비를 다루고 있으며, 블랙홀, 특이점 등을 다루고, 외계인과 시간을 초월한 우리 우주를 보여주고 있다. 둘 다 과학적으로 허구가 아닌, 실제로 가능한 일을 영화로 제작한 것이어서 놀랍기까지 하다.
물론, 이런 영화에 대한 기독교의 평가는 별로 없다. 왜? 잘 모르기 때문이다. 창조과학이라는 철 지난 미신을 과학이라 생각하는 보수적인 종교인들이 새로운 물리학과 우주의 신비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환원 불가능성의 복잡성’을 가지고 언제까지 과학의 집요한 분석과 증명을 견딜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