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와 공유경제(Sharing economy)
‘공유경제’ 그 자체는 함께 나누는 경제라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어떤 부분을 강조하는가에 따라 각기 다른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필자가 언급하는 공유경제는 ‘Sharing economy이며, 이런 표현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눔이라는 언어가 주는 건 자선의 의미도 있지만, 실제로는 “내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도 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주인임을 선포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눔은 하나님 것을 공평하게 나누겠다는 신앙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공유경제는 초대 교회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혹은 ‘오병이어(五餠二漁)’의 정신이 바로 공유경제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행전을 보면 모든 물품을 나눠 사용하고 필요에 따라 나눴다고 말한다. 필요 이상 사용하려 하고 몰래 축적하려고 했던 사람을 강하게 정죄한 걸 보면, 자원을 철저히 공유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물질적인 나눔은 각 지역으로 퍼져있는 디아스포라 교회와 연관됐다. 예를 들어 재정이 넉넉한 교회가 그렇지 못한 교회를 후원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경제적 트렌드는 공유경제가 될 것이다. 이미, 특정 분야의 공유경제는 활성화됐다. 제러미 리프킨은 『한계비용제로 사회』에서 대부분 물품이 공유되어 비용이 거의 제로로 수렴되는 이상적인 경제민주화 시대를 예측했고, 이보다 앞서서 크리스 앤더슨은 『프리(Free)』에서 사실상 생산하는데 비용이 제로인 사회를 전망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치 않다.
여전히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한 물품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비용이 들고, 가끔 사치라도 할라치면 꽤 오랜 시간 동안 저축 활동을 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다양한 분야에서 공유경제가 활성화됐고, 생각지도 못한 분야에서까지 공유경제가 조성되어 있다. 최근에는 주민자치 센터 등에서 일반 가정에는 없는 공구들을 빌려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공유경제 1.0은 사이비 공유경제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왜냐하면, 수익 대부분이 창업자 등 일부 소수에게 입금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태는 일확천금을 생각하는, 흔히 말해 ‘로또’를 기대하는 창업자들을 무분별하게 양산하고, 정부 예산도 이런 무익한 부분에 투입되는 현상도 적지 않다. 그 결과 창업 3년 이상을 버티는 스타트업의 비율은 30% 이하이며, 5년으로 기준 삼으면 10% 이하이다.
성경의 공유경제 정신은 구약 시대부터 존재하고, 초대 교회에서도 그 정신을 실현했다. 기독교가 억압받던 시절, 그 정신이 계속 유지되었다가 국교가 돼 권력과 부를 독점하자, 공유정신은 소멸한 것으로 보인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성경의 진리가 모든 게 교회 것으로 대체 된 것이다. 요즘말로 '승자독식'인 셈이다.
이후 오히려 기독교 정신이 자본주의의 태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윤리』와 같은 저작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특히, 칼뱅의 교리는 자본주의의 태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칼뱅은 상인들의 이윤 추구에 대한 적절한 교리를 제공했고, 덕분에 ‘부’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정받는다. 물론, 이들이 말한 자본주의 요소는 소비가 아니라 근면, 성실, 검소한 삶이었다. 덕분에 가난은 게으름의 결과였고, 신실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기도 했다. 구약 시대에 분명히 구제가 언급돼 있고, 희년이 존재하며, 신약에도 ‘연보(捐補)’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데도 어느 순간 기독교는 가난을 정죄한다. 신이 주신 소명에 충실하게 반응한 개인은 절대 가난할 수 없다는 환상이 등장한 것이다. 이제 가난은 죄가 됐다.
과거에 가난한 자와 과부와 고아를 돌보라는 말씀은 새롭게 해석된다. 즉, 성공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정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개인의 게으름이 탓이라는 인식의 토대를 제공한 것이다. 성경은 가난한 자를 죄인으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부자 나사로’가 구원받지 못하고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 올라가지 않았는가? 가난이 비록 개인의 게으름으로 인한 것일지라도 구제하지 않는 것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레위기에 등장하는 ‘희년’이 공유와 관련한 대표적 성경적 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
토지 공개념과 관련해서는 헨리 조지를 빼놓을 수 없다. 『진보와 빈곤』이라는 걸작에서 경제 문제와 빈곤층 문제는 지대(地代)와 관련 있다고 하면서, 토지세를 강조했다. 제목에 붙여진 진보는 경제적 진보를 의미하는데, 생산력의 향상으로 실제로 생산물이 늘어나서 부(富)가 증가하는 것을 말하며, 빈곤은 부가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빈곤한 계층이 더 늘어나는 현실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헨리 조지는 노동과 자본은 경제활동과 관련한 긍정적인 요소라고 이해했고, 반면에 지대는 이러한 노동력을 착취하고, 자본의 결과물을 훼손시키는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요소로 여겼다. 그래서 토지세를 주장하게 됐는데 그가 말한 토지세를 걷게 되면, 사회 빈곤과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국가에서 추진하는 모든 사업 비용을 충당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제2의 기계 시대』에서는 현대 국가에서 투여되는 비용이 헨리 조지가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고 비판적으로 해석 한다).
헨리 조지의 사상은 당시에도 파격적이었고, 세상이 바뀌어서 자유와 평등을 더 강조하는 현재의 시각으로도 이상주의로 간주 된다. 행동경제학이 등장하기 전 경제학은 경제의 주체 인간을 대단히 합리적으로 존재로 전제했기에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이 상당히 많았다. 그런데, 헨리 조지는 종교적 이상주의까지 더했으니 그 실현 가능성은 반론자들이 볼 때는 어불성설이었다.
그리고 150년 이 지난 지금, 세상의 복잡성은 헨리 조지가 상상도 못 할 만큼 진행됐으니 그의 핵심적인 사상은 과거 십계명과 같은 교리처럼 해석될 수 있을 뿐 실질적인 적용은 더 어려울 듯하다.
그의 사상은 당시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에게 영향을 줘서 실제로 톨스토이는 토지를 농노들에게 나누어 주는 실천을 했고, 성경적 방법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아울러 그의 대표작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부활』에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헨리 조지의 사상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지금까지 토지세를 걷는 자본주의 국가는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톨스토이와 같이 지주, 즉 위에서부터 시작한 개혁의 한계는 아래에서 받아들일 수준이 되지 않았을 때 큰 효과를 볼 수 없다. 아무리 좋은 이론, 좋은 실천 방법이라도 이론을 이해하지 못하고 실천의 타당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 효과는 무의미 한 수준이 된다. 오히려 낭비인 경우도 있다. 톨스토이의 실천도 농노들이 받아들였을 때는 토지 공개념과 평등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저 선량한 지주의 자선으로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 공유경제와 관련한 사상이 검증되기 시작하는 데 대표적인 경제학자가 엘리너 오스트롬이다. 그녀는 2009년에 여성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으며, 『공유의 비극을 넘어』를 통해 도덕적 해이 등의 문제로 비판받았던 공유경제 개념을 뒤집어엎었다. 그녀는 공유경제 실현 가능성의 타당성을 충분히 검증했고, 이후 스마트 기기들의 개발과 발전으로 - 스마트폰, 빅데이터, 광속인터넷 등 첨단 기술이 등장 - 본격적으로 공유경제를 바탕으로 한 비즈니스가 등장했다.
공유개념의 현실 가능성이 증명됐고 실현 할 수 있는 기술도 있지만, 현재의 모습은 평등보다는 승자독식의 문제를 낳아서 부의 분배에서는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로또와 같은 일확천금을 바라면서 많은 사람이 스타트업에 발을 들여놓고, 간절히 성공을 바란다. ‘에어비앤비(airbnb)’나 ‘우버(uber)’와 같은 영광을 맛보기를 원하면서 가장 똑똑하다는 청년들이 공유경제 비즈니스에 뛰어들고 있다. 물론, 이런 시도들이 많아야 좋은 기업이 나타나고 성장할 가능성아 높아진다. 그러나 '로또'의 가능성은 한 사람이 여러 번 번개에 맞을 확률이라고 하지 않던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스타트업은 대부분 실패한다. ‘대한민국 4차 산업혁명 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던 장병규의 『장병규의 스타트업 한국』에서는 (수학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논리지만) “스타트업의 평균은 실패”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스타트업의 실패와 성공이 국가의 경제나 국민에게 끼치는 영향은 크게 생산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시각에 따라서는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무료로 영화를 감상하고, 음악을 듣고, 학습 도움을 받고 등 모든 것이 다 부정적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현재 GDP 개념으로 측정할 수 없는 생산성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불평등을 보여주는 지니계수는 점점 나빠지고, 부의 독점에 따른 저항도 만만치 않게 벌어진다.
근본적인 원인은 공유경제가 사이비 공유경제이기 때문이다. 공유의 의미는 자원의 공유이면서 그 부에 대한 공유이기도 하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모델로는 협동조합과 같은 개념에 가까울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협동조합 몬드라곤에서는 최고 운영자 월급과 막 시작한 사업자 급여 차이가 3배 이상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유니콘 수준으로 성장한 기업 CEO의 소득은 회사 직원의 급여와 따지기 힘든 수준이다. 즉, 공유경제가 아니기 때문에 보편적 공유경제가 전파되기 힘든 것이다.
사실, 이런 현상은 교회 내에도 존재한다. 교회의 부와 권력은 소수에 집중 돼 있다. 교회 자원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건 담임 목사의 권한이기도 하다. 코로나 시국에 집회를 개최하는 것도 교인의 동의가 아니라 목사 마음이다. 이때 사용하는 비용의 대부분은 교인의 헌금이다.
한국 교회로 돌아가 보자. 한국 교회는 대부분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 일부 교회는 투기에 가까운 수준으로 교회부지를 매입하기도 했다. 교회 재산이 증식되는 것은 객관적으로 나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정상적인 교회라면 증식된 재산으로 사회적 약자를 도울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문제점이 있지만, 개발도상국 선교를 통해서 교육, 복지 등의 혜택도 이전해 주기도 한다. 단, 정상적인 교회 활동을 전제로 할 때 그렇다. 현재 교회의 재산은 긍정적으로 사용하기보다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우선 교회 재산의 대부분은 교회 성도들을 위한 복지로 사용한다. 헌금을 내는 고객들을 위한 서비스라고 생각하면 될까? 그래서 모든 교회 부서는 교회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는다. 특히, 성인 이전의 학생들에게 아낌없는 지원이 이루어진다(교회의 교육 부서는 학생들에게 수련회비 등을 거의 받지 않는다. 과거 30년 전에 교회학교를 경험했던 필자에게 무료는 다소 충격적이다. 필자는 단 한 번도 무료 혜택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장년층이 활동하는 부서는 많지 않지만, 활동의 장려를 위해 지원한다. 그리고 교회 재정 지원의 영역은 교회 외로 확대된다.
종교 영역이 아니라 문화 영역에 포함될만한 교회가 등장하고 있다. ‘노마디즘’이 유행일 때 규모가 크지 않은 교회 중 일부는 교회 건물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매주 철마다 아름다운 물, 산, 들로 찾아다니면서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관리비도 들지 않고, 많지 않은 성도의 교제도 더 친밀감 있게 할 수 있으니, 괜찮은 방법일 수도 있다. 실험적으로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속적인 교류와 신앙 활동을 유지 할 수 있는 시공간이 필요한 경우 문제가 생긴다. 기후 변화에 대한 유동적인 대체 계획이 필요하며, 예배 목적보다는 여행이나 교제 비중이 커질 수 있다. 그리고 인원이 증가할 경우 다양한 버전의 조직이 필요하다. 물론, 성도 수를 100명 이내로 제안한다면 계속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마드 교회는 이색적인 교회라고 할 수 있지 보편적인 교회로 자리 잡기는 힘들다. 이러한 이색적인 교회가 출현한 이유가 교회 운영의 문제 때문이다.
교회는 많은 공간과 자원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자원들은 대부분 1주일 중 오직 하루를 위해 진열돼 있을 뿐이다. 교회는 청년들이 줄고, 고령화되고 있어서 앞으로는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교회 상태를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폭포수와 같은 대형 교회의 자본도 어느 순간 줄어들기 시작할 것이다. 사회에 내놓은 것이 많지 않은 지금, 교회가 몰락한다고 해서 동정할 사회적 여론은 존재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현재 교회의 자원은 사용률이 현저히 떨어진다. 관리자들한테는 편할 수 있지만, 그 활용이 저조하면 시간이 갈수록 낡아지고 사용하기 힘들어지면 버려야 한다. 그러나 이미 저조한 활용을 경험했기에 새로운 기기로 바꾸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공간, 기자재, 자동차 등 교회의 자원은 대체로 거의 방치된 상태이다.
그런데, 방치의 이유가 관리를 위함이다. 물건은 사용해야 하고, 낡으면 교체하고, 새로운 기기가 등장하면 구매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새것을 구매해서 낭비하자는 건 아니다. 있는 물건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서 많은 사람이 사용자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국 교회가 공간, 기자재, 자동차 등을 공유했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평판을 얻을 수 있고 파생하는 많은 이점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현재 공유경제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일까? 대부분 콘텐츠를 우선시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규모와 확장성이라고 한다. 물론,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자본이 많고, 인력이 많다고 해도 사업 아이디어가 없으면 시작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현재는 그런 아이디어는 충분하다.
공유경제가 활성화된 선진국에 비하면 한국 공유경제 현실은 인큐베이터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공유경제 활성화를 위해서는 빅데이터를 중심으로 한 원(原)데이터에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하고 원활하게 활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국내의 개인 정보는 철저히 관공서의 오라에 묶여 새어 나올 틈이 없고, 규제의 방식도 포지티브(positive) 방식이어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실행하는데 큰 장애가 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아이디어가 있다고 해도 쉽게 창업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면 아이디어 창출에도 장애가 될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현실은 다르다. 위에서 말한 가장 중요한 조건인 ‘규모’가 어느 정도 보장돼 있다. 한국 교회 성도 수는 아무리 겸손히 산출한다고 해도 500만 명 이상은 된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선교 수준을 생각하면, 그 수는 훨씬 더 늘어난다. 그러나 아이디어가 없다. 대한민국 규제보다 더 규제가 심한 기관이 교회이다. 한 마리 양을 위해서 99마리 양이 방치되기도 하고, 종종 이득을 위해서 성도들 간 다툼이 생기기도 한다. 자유로운 토론이 힘들고 좋은 의미로는 타인의 실족함을 염려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많다.
특히, 하나의 아이디어가 승인받는 과정은 대기업을 방불하게 한다. 위원회를 거치고, 당회를 거치고, 종종 노회에까지 상정될 수도 있다. 대부분 아이디어는 지원과 관심 부족으로 실행되지도 못하고 사라진다.
공유경제는 사업 아이디어에 따라 시작부터 세계를 대상으로 실행해야 하는 경우가 있고, 지역에서 시작해야 하는 때도 있다. 한국 교회의 실정을 고려하면, 지역적인 접근이 유리하다. 당장 디지털 기술을 바탕으로 세계시장에 진출한다는 건 무리다. 그러나 지역을 중심으로 성도들의 물품을 활용한 공유경제는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한국 교회는 지역마다 연합체 혹은 협의체가 구성돼 있어서 좋은 아이디어라고 판단되고 생산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면, 시너지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물론, 교파마다 이권 다툼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래서 초기에는 명확한 규약을 만들고 합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긍정적인 부분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분명 교회의 상업화, 세속화 등을 들어서 비판하는 교인들이 등장할 것이고, 세속적 기관과 유사하게 부의 독식도 등장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지역 단위 협의체가 있어야 하고, 이를 통해서 초기 사업을 조율해야 한다. 형태는 협동조합 형태가 기준이 될 수 있는데, 사업자가 개인이 아니라 교회라는 차원에서 기관 협동조합 형태가 될 수 있고, 대부분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사회적 이익을 위한 사업으로 진행할 수 있다. 아울러 정부에서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도시재생고 지역재생 사업에도 기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