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공유경제를 실현할 수 있다
초대 교회 시대 디아스포라는 개별적이었지만, 당시로 생각하면 꽤 적극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나머지 지역의 교회가 상황에 맞게 운영됐다.
경제적인 부분이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당시 사도들의 삶과 선교의 과정을 볼 때 경제적인 가치를 넘어선 공유를 바탕으로 네트워크가 형성됐다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같은 복음을 받아들였고,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기 힘든 상황 속에서도 연합하여 어려운 시기를 견뎌냈다.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로만 연결돼 있다고 하기에는 그들의 결속은 너무 비장했다.
다시, 한국 교회로 넘어오자. 대형 교회가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한국 교회의 비율로 볼 때 대형 교회가 차지하는 부분은 크지 않다. 대부분 교회는 100명 이내의 성도로 구성돼 있고, 운영조차도 힘든 교회가 상당히 많다(2016년 기사를 보면, 성도는 줄어드는데 목회자와 장로는 늘어난다고 한다). 초대 교회 같다면, 서로 경제적인 지원을 했겠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다. 각자도생(各自圖生) 수준으로 잘 분산돼 있다.
4차 산업혁명의 분산은 절연된 독립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중앙집중적 조직을 바탕으로 한 피라미드 형태도 아니다. 거미줄처럼 연결된 네트워크 형태의 분산에 가깝다. 적은 수의 교인이 모이는 교회라 할지라도, 주변 교회들과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공유경제를 실현할 수 있다. A 교회에 없는 물품과 기획능력을 B 교회에서 대여하거나 도움받을 수 있다. 그 반대도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기본적으로 열린 공동체를 지향해야 하며, 범(凡) 교회 공동체를 추구해야 한다. 과거 한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2015년 필자는 통일과 관련한 집회를 준비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던 중 함께 다니던 목사님과 함께 기도하기 위해서 가까이에 있는 교회를 찾았다. 한 10분 정도 열심히 통성으로 기도하고 있었는데,
관리 집사님 : (이상하게 쳐다보며) 여기서 이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목사님 : (머뭇거리며) 아이고 죄송합니다. 저희가 기도를 하려고 하다 보니 교회가 보여서요.
관리 집사님 : (단호하게) 그래도 이렇게 들어와서 기도하시면 안 됩니다.
목사님 : (민망해하며) 예, 곧 나가겠습니다.
갑자기 생각나는 말씀이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니라.’였다.
교회에 기도하러 들어갔는데, 교회 교인이 아니어서 쫓겨난 것이다. 배타적이고, 폐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정도 수준의 개방성으로는 공유경제 실현은 불가능하다. 꿈도 꿀 수 없다. 물론,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방문객이 많을수록 귀찮을 수 있다. 그러나 조금의 불편함으로 인해서 교회의 본질을 흐려서는 안 된다.
모든 물건은 사용하려고 구매한 것이고, 많은 사람이 자주 사용해야 가치가 있는 것이다. 1주일에 고작 한 번 사용하기 위해 비치하는 현재 교회 비품은 엄격히 말해서 자원 낭비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교회의 대부분 공간과 물품은 목적에 맞게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값비싼 악기들도 1주일에 한 번을 위해서 평일에는 그냥 방치돼있고(예를 들어 오르간 같은 경우는 전공자가 아니면 연주하기도 힘들다고 한다), 많은 기자재가 1주일 144시간 중 대부분 시간을 사용자가 등장하기를 지루하게 기다리는 실정이다.
교회에서 사용 비중이 가장 큰 대 예배당을 비롯한 많은 공간 역시 그 활용은 10%도 채 되지 않는다. 최근에 많은 교회가 주차장을 개방하고 있지만, 여전히 빈 곳으로 방치되는 것이 현실이다. 큰 교회일수록 방치되는 자원이 더 많다. 그리고 더 굳건한 잠금장치를 채워서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한다.
같은 기독교인이 기도하는 것도 못마땅하게 여기는 상황에서 물품을 나누어 쓰는 공유경제를 실행한다는 것은 파격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공유경제가 보편화되고 현재와 다르게 교회가 그 흐름에 참여한다면 주류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앞서서 분산을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역설적으로 공동체를 논하려고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는 분산된 개인들이 거미줄처럼 얽혀서 가상의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물리적 공동체도 가능하지만, 그 규모가 가상의 공동체만큼은 아닐 것이다(페이스북의 친구 수와 현실 속에서의 친구 수를 비교해보면 바로 답이 나온다).
하지만, 가상의 공동체는 한계가 있다. 페이스북으로 친구 맺기를 통해 만든 친구들은 수천 명에서 수만 명을 넘어도 실제로 지속적인 연락을 취하고 관계를 맺는 사람은 ‘던바의 수’를 고려하면 150명 수준이라고 한다. 즉, 가상의 친구와 실제로 지속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친구 간의 갭은 상당히 크다.
그렇다면, 많은 가상의 친구를 현실 속 친구로 만들지는 못해도 조금 더 늘릴 방법은 없을까? 그 답은 간단하다. 물리적인 연결과 디지털 연결을 동시에 하면 된다. 그 역할을 교회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산업화 시대에는 피라미드 형태의 거대한 조직을 바탕으로 한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가 물리적으로 필요했다. 그 시절에는 공룡과 같은 기업들이 득세할 수 있었고, 교회 또한 당시 분위기에 편승해서 성장할 수 있었다. 성장만이 살길인 것처럼 느껴지던 시대다.
조직의 힘으로 밀어붙이던 시대에서 정보화를 바탕으로 한 3차 산업혁명 시대에 이르면, 거대한 조직은 1억 년 전 지구의 왕자에서 멸종의 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공룡을 떠올리게 만든다. 물론, 아직도 공룡의 발자취는 화석으로 볼 수 있듯이 대기업들은 살아서 꿈틀대고 있지만, 과거와 같은 위용은 보여주지 못한다.
정보화 시대와 더불어 인터넷의 대중화는 거대 조직을 와해하고 과거 버전의 공동체를 파괴했다. 가족 공동체가 송두리째 날아갔고(물론, 이전에 TV와 같은 미디어의 역할도 컸다) 과거 인정(人情)이 가득하다고 여겼던 마을 공동체가 소멸했다.
세대 갈등과 차이가 심해지자, 교회는 대응한다고 한 것이 청년들과 장년층을 완전히 구분해서 예배를 따로 드리게 한 수준이었다. 흔히 말하는 청년부 예배 신설이다. 새로운 시대에 민첩하게 대응한 것도 아니고, 어정쩡한 대응이었다.
세대 간의 갈등은 『나 홀로 볼링』에서도 지적하듯이 사회적 자본을 형성하는 데 장애 요인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코이노니아(Koinonia)’를 지향하면서, 그 내부는 계층 간의 분열과 구분을 통해 코이노니아를 스스로 무너뜨렸다. 이러한 구분과 격리가 1990년대 후반부터 유행처럼 번졌다고 볼 때 벌써 20년이 지났다. 요즘은 한 세대를 20년이라고 한다. 이러한 절연을 다시 봉합하기 위해서 새로운 20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무엇이 조직을 움직이는가』에서는 기업을 운영하는 데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명료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명료성은 리더들만이 알고 있어야 할 사항이 아니라, 말단 직원에까지 전달되고 익숙하게 되는 수준에 이르러야 조직이 원활하게 움직인다고 한다. 과연 한국 교회는 교회의 방향과 목적을 성도들에게 명료하게 전달하고 있는지 되물어 봐야 한다.
현재 한국 교회는 교회가 추구하는 목표를 온 교인들에게 명료하게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예산과 결산 부분도 교인들한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현실이다. 보수적인 견해(?)로 주장하는 사람은 헌금은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이라고 생각하면서 교회의 사용처를 일반 교인들이 굳이 알 필요가 있는가?라는 반문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사용하는 용도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이뤄지고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새롭게 건축하는 교회는 은행 이자로 헌금을 사용하고, 거대한 몸집의 교회 건물을 유지 보수하느라 많은 헌금이 소모된다. 가난한 자를 위한, 선교를 위한, 지역 사회를 위한 등의 예산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이런 상황 속에서 헌금 사용을 알리고 예산을 결정하는 회의에 많은 교인이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대체로 이런 회의는 많은 교인이 참여할 수 없는 시간에 진행된다. 그리고 회의 시간에 다양한 질문과 비판이 원활하게 이뤄지지도 않는다. 이런 중요한 회의 안내와 진행조차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는 경쟁력이 있을까?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공동체 개념은 개인들의 점조직을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모습과 같다. 과거 피라미드식의 조직 공동체를 생각하는 교회는 거미줄처럼 연결된 새로운 시대의 공동체를 이해할 수 없다. 공동체를 위해서 개인의 희생이 당연시됐던 과거의 공동체는 이사야 벌린이 『자유론』에서 말한 ‘적극적 자유’의 문제점을 그대로 노출한 것이다. 아마도 ‘조직의 힘’, ‘조직의 쓴맛’ 등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형성될 공동체를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들은 이미 철저히 개인화돼 있다. 이들을 대상으로 공동체를 구성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새로운 개념의 공동체는 개인적인 라이프(life)를 중요하게 여기는 세대들에게도 어색하지 않게 적용할 수 있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블로그 등 다양한 SNS의 역할은 자신을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쇼윈도 역할을 한다. 가상의 쇼윈도는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열린 공간이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들은 조직의 힘과 그 쓴맛은 몰라도, 무관심은 싫어한다. 그래서 서로 ‘좋아요’를 눌러주고 친구를 서둘러 맺는다. 철저히 개인화된 것 같은 세대들 같지만, 나름대로 방식으로 공동체를 만들어 간다. 온라인 게임만 하더라도 길드가 조직되어있고, 디지털 공간에서 공동체를 형성해서 목표를 달성한다. 하지만 이들은 아바타를 통한 가상의 공동체에서의 적응과 함께 실재 공간에 만들어진 공동체에 참가해야 한다. 그리고 익숙해져야 한다.
이런 부분에서 한국 교회는 다른 조직에 비해서 경쟁력이 있다. 싫든 좋든 다양한 세대가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교제를 나누게 된다. 물리적인 시공간이 확보돼있는 상태다. 여기에 디지털화를 통한 네트워크를 추가로 조성하면 된다. 물론, 코로나 시국의 집회처럼 부정적인 결속으로 연결될 가능성도 있다. 정치적 목적과 이데올로기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이해서 대중을 선동할 수도 있다.
교회는 하나의 ‘매치 메이커스’ 혹은 ‘매치 플랫폼’의 역할을 하면 된다. 물론, 단순히 교류를 위한 플랫폼이 돼서는 안 된다. 공유경제(Sharing Economy)를 활성화할 수 있는 플랫폼 역할을 해야 한다. 경제라는 부분에 민감하게 반응할 기독교인이 있음을 안다. 그러나 이미 교회는 충분히 경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카페를 운영하고, 장터를 운영하고 정기적으로 바자 회를 연다. 선교, 전도, 구제 등의 목적으로 진행한다. 좋은 사업들이고 그 취지 또한 옳다. 이러한 부분을 상설적으로 운영한다면, 그 대상과 지원 범위 또한 넓어지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