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교회에서 4차 산업혁명을 보다
대한민국 전역이 4차 산업혁명으로 떠들썩해도 조용한 곳은 여전히 복지부동(伏地不動)이다. 그중 하나가 교회이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인간이라고 하지만, 실제 주목받고 있는 것은 인공지능 등을 비롯한 과학 기술이다.
특히, 디지털화 시대에 들어서면서 원자(atom)에서 비트(bit)로, 즉 물리적인 사물이 0과 1, 두 숫자로 치환됐다. 디지털화는 복제할 수 있고, 복제한 상품의 가격은 거의 제로(0)에 수렴한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경제적 평등을 가져올 수 있다. 하지만, 이상은 항상 현실과 달랐기에 마냥 긍정적일 수만은 없다.
디지털화를 잘 활용한 스타트업들은 큰 부를 획득했고, 그 부의 규모는 과거와 비교해서 훨씬 큰 승자독식을 낳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많은 사람이 디지털 기기를 활용해서 SNS를 하고, 전자상거래를 하고, 모바일 뱅킹 등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해서 돈은 버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반인들이 그렇게 자주 사용할수록 돈 버는 사람은 따로 있다. 과거 제조업체는 노동자의 근로를 바탕으로 생산량이 정해졌기에 그들에게 적정 임금을 지급해야 했지만, 현재 기업들은 그런 노동자들이 필요하지 않다. 오직, 디지털 기기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많아지면 된다. 결국, 현재 열심히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은 소비자 역할에 충실할 뿐이지 생산자가 아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시대의 사용자로도 편승하지 못한 노령층이 존재한다. ‘디지털 격차’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성장에 있어서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노령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시점에서 디지털 격차가 의미하는 것은 좋은 도구는 있으나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무용지물이 되는 상황이다. 이미 한국은 스마트 실증 단지를 2015년에 부산과 대구에서 시범 운영했으나, 실패했다. 그 이유 중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사용자 능력 부족이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교회는 지금처럼 유지할 수 있을까? 현상적인 부분만 보면 부정적인 답을 할 수밖에 없다. 특히, 디지털 격차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쓰면, 한국 교회와 4차 산업혁명은 어우러질 수 없는 것으로 여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필자의 생각을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이다.
4차 산업혁명에 등장하는 기술은 ‘신’을 대체할 거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현상적으로만 따지면, 교회 비판적이다. ‘신’은 더 주술적인 요소로 전락하고, 리처드 도킨스과 같은 회의론자들이 볼 때 망상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질과 4차 산업혁명이 추구하는 가치는 결코 반(反) 하는 관계가 아니다. 유사한 점이 많고, 분명히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의 공생애 기간 중 가장 먼저 행한 기적은 가나안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사건이다. 물과 포도주는 화학식이 다르다. 즉, 물리적 변화가 아니라 화학적 변화가 있어야 물이 포도주가 될 수 있다. 물이 공통으로 포함되어 있지만, 물만으로 포도주가 되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포도주는 포도와 알코올 성분이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수가 보여준 일은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성경에는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합력은 서로 다른 주체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였기에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한 말씀이다. ‘협력’이라는 언어가 그런 의미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알아서 조화롭고 평화롭게 지낸다면, 협력이라는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지체’라는 표현도 있는데, 공동체 구성원들의 서로 다른 역할이 있음을 의미한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과정과 서로 다른 개인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상통한다.
서로 다른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선을 이룬다는 것은 그만큼 서로에 대한 신뢰를 구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러한 신뢰를 구축하기까지의 과정은 절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힘든 논의, 토론 등의 과정이 바탕이 돼야 가능한 열매라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이 쉽지 않다는 것은 가정에서의 부부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 등을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토론하고 자신의 주장을 말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도 경청하면서 서로 이해할 수 있을 때 가정 안에서의 행복이라는 선(善)을 이룰 수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이야기를 해보자. 기존에는 각기 다른 기술이 서로 다른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었다면, 이제는 그 기술이 지능적으로 융합된다. 물이 포도주처럼 변하는 일이다.
관련한 예를 들어보면, 수많은 데이터, 즉 빅데이터가 있다. 그리고 빅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는 클라우드가 있다. 그리고 빅데이터를 분석해서 원하는 답을 찾을 수 있도록 해주는 알고리즘이 있다. 데이터가 있고, 저장장치가 있고, 프로그램이 있다. 이것들이 융합되면, 바로 인공지능이 되고, 사물인터넷이 된다.
2020년까지 500억 개 정도의 사물이 연결된다고 한다. 그리고 2030년이 넘으면, 수십 조가 넘는 사물과 인간이 연결된다고 하는데, 사실상 모든 것이 연결되는 것이다. 다른 분야의 사물과 인간이 연결돼서 인류의 발전이라는 선을 향해 나아간다고 할 때 성경에서 말하는 ‘협력해서 선을 이루라’는 말씀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 선한 사용은 전적으로 인간의 의지에 달렸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전에 수많은 토론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토론은커녕 작은 포럼조차 꾸준히 열리고 있는 지역도 없다.
초대 교회는 사도행전에 나온다. 그리고 바울 서신서 전체가 초대 교회와 관련한 것이다. 시기적으로 AD 50년에서 AD100년 사이에 작성됐다. 물론, 후에 가감이 있었고 편집됐다고 하지만, 그 본질이 훼손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초대 교회는 모든 성도의 평등을 추구했다. 역할 구분은 있었지만, 생활의 평등(경제적 평등)을 추구했다. 모든 재산을 공유하고 필요한 만큼 나누어 사용했다. 예수의 제자들, 즉 사도들의 권위를 인정했는데, 시각에 따라서는 그들의 권위를 권력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의 모든 제자와 바울의 순교가 사실인데, 그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코로나 시기에 유명세를 탄 한 목사는 현재와 같은 분위기가 한 달 정도 계속 이어지면, "순교"한다고 선언했다.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는 의미였다. 이미 한 달이 지났다. 그는 여전히 살아있다. 권력을 탐한 자들은 절대 스스로 끊지 않는다.
사도들은 복음을 먼저 받아들인 자들이지만,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라는 말씀을 직접 들었다. 결론적으로 그들에게 지위의 고하(高下)는 큰 의미가 없었으며, 오히려 책임을 더 과중하게 느꼈을 것이다.
초대 교회의 특징은 우선 평등이라고 할 수 있다. 평등은 경제적 평등이 기본이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들은 공동 재산을 권위나 지위에 따라 사용하지 않고 필요 수준에 따라 분배했다. 마찬가지로 4차 산업혁명도 평등한 세상으로 수렴하기 위해서 발전된 과학 기술을 사용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을 보면, 이상적인 공유경제를 이루는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다. 사도행전 초반부에는 ‘아나니아’와 그의 부인이 죽는 과정이 있다. 새로운 제도가 정착하기 위한 험난한 여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산업혁명 시대에도 이와 같은 시행착오가 존재할 것이다. 당장, ‘승자독식’ 현상만 보더라도 새로운 시대의 폐해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세계경제포럼과 IMF에서 보고했듯이 신자유주의의 한계에 봉착한 세계는 애초부터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던 ‘낙수효과’에 대한 망상을 버리고 ‘포용 성장’의 길로 전환할 것을 요청했다. 부의 평등한 분배 없이 경제성장은 있을 수 없으며,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는 가운데 경제적 진보는 어려울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분산이다. 현재 정치·경제 시스템은 중앙집중적인 시스템이다. 모든 자원이 중앙에 집중된다는 의미도 있지만, 강력한 힘을 가진 조직이 아니고서는 이끌어 나갈 수 없는 시스템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왜 국가는 실패하는가?』에서는 과거의 역사를 반추하면서 세계를 주름잡을 수 있었던 국가의 특징 중 하나로 ‘중앙집권화’라는 요소를 제시한다(물론, 같은 책에서는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포용’을 강조하고 있고, 약간의 우연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의 역사가 중앙집권적 체제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지방 자치제가 시행되었다고 하지만, 강력한 권력은 여전히 중앙에 존재하고, 서울을 중심으로 ‘소용돌이’ 형태를 보인다. 그런데, 4차 산업혁명은 이러한 중앙집권체제를 거부하고 분산, 그리고 민주화를 강조한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 않고 현재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는 세력이 진정으로 정치적 민주화와 포용 경제를 원하는지는 알 수 없는 부분이다.
한국 교회는 현재 분산되어 있다. 물론, 그 내부 조직은 중앙집권적이고, 당회 혹은 담임 목사에게 많은 권한이 위임돼있는 것이 사실이나, 한국 교회 전체를 볼 때 개(介) 교회는 흩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지역별로 노회도 있고, 교파별로 총회도 있지만, 교회는 개 교회 중심으로 자체적으로 운용된다. 다시 말해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분산이라는 특징을 실행하기 쉬운 단위로 조성돼있는 셈이다(단, 대형 교회는 분산의 개념과 어울리지 않는다).
공유경제의 역사적 기원을 찾아보면, 초대 교회에서 멈추게 될 것이다.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공동 소유를 필요한 만큼 나눠서 사용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바로 그렇다. 필요한 것들은 생산물의 ‘한계비용 제로’로 수렴한 상태에서 공유해서 사용할 수 있다. 아울러 디지털화한 모든 상품은 누구나 나눠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적인 경제가 실제로 현실 속에서 춤추기 위해서는 사용자의 정신이 중요하다.
한국 교회는 초대 교회 정신을 되살려서 그 바탕 위에 기술을 활용하면 된다. 마르크스는 물질에 방점을 뒀지만, 교회는 물질 이상의 것을 추구한다. 마르크스의 세계 공산주의 연대는 무너졌다. 물질을 확보한 순간 연결을 끊었던 것이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정신의 연대로 버틸 수 있었다. 신앙이 곧 죽음이었던 시대에 그들의 연결은 새로운 이상에 대한 바람이었다. 바로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물질을 넘어설 때 그 융합과 연결의 가치가 발휘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