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사회 편(1)
‘웰빙’은 육체적·정신적 건강의 조화를 통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삶의 유형이나 문화를 통틀어 일컫는 개념인데, 앵거스 디턴의 『위대한 탈출』에서는 웰빙의 의미를 확장한다.
“사람에게 이로우면서 만족할 만한 삶을 사는 데 필요한 모든 요소를 지칭하는 데 사용할 것이다. 웰빙은 소득이나 부 같은 물질적인 웰빙, 그리고 행복과 건강 같은 육체적·정신적 웰빙, 또 민주주의와 법치를 통해 시민사회에 참여할 기회, 교육 수준을 포함한다.”
그리고 ‘포용’은 포용 도시의 개념을 생각하면 되는데, 필립 코틀러의 『마켓 4.0』에서는
“거주자의 다양성을 환영하는 도시라는 의미가 있으며, 이를 사회적 포용으로 확장시키면, 공정거래, 채용의 다양성, 여성에게 권한 부여 등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으며, 이는 성, 인종, 경제적 지위 등에서 인간의 차이점을 포용함을 의미한다.”
라고 말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필자가 제시하는 ‘웰빙-포용’은 새로운 평등을 의미한다. 이런 평등은 정치적 평등, 경제적 평등을 포함한 교육, 문화, 인종, 성별, 다양한 구성원 등에 대한 평등까지도 포함한다.
평등과 관련해서는 장 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부터 시작해서 세계화 시대에 이르기까지 평등이라는 나무에서 수없이 많은 가지로 다양한 소재로 다뤄졌다.
그리고 모든 평등과 관련한 내용의 결론은 크게 다르지 않다. 불평등은 ‘악’이고, 잠재된 ‘위험’이다. 과거와 비교할 때 인류의 성장은 괄목상대(刮目相對)할만하다. 이런 성장 속에서 인류는 문명의 이기를 충분히 경험할 수 있었다. 단, 모든 인류는 아니었다. 성장은 불평등을 낳았다.
인류의 가장 큰 재앙이었던 세계대전도 그 원인 중 하나도 산업혁명 이후 불평등이었다. 아울러 사실상 전체주의 체제인 중국도 자체 위기감을 해소하기 위해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애쓰고 있다(2014년에 중국에서 발생한 파업이 50만 건에 이른다고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 그리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불평등은 여전할 것이다. 오히려 두 가지 변화로 생성된 퍼펙트 스톰은 불평등을 가속할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부정적으로 전망하는 사람들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여전히 고급인력들이 더 많은 보수를 챙기면서 부를 축적할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서 빅데이터의 활용이 늘어서 이를 다룰 수 있는 ‘빅데이터 과학자’의 수요가 늘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빅데이터 전문가가 되는 길은 쉽지 않다. 이공계 관련자들도 선뜻 국가시험에 응시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즉, 일부 뛰어난 엘리트만의 전유물임 셈이다.
그리고 부의 분배와 관련한 기준도 명확하지 않은 상황이다. 과거에는 ‘자본가’와 ‘노동자’로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쉽게 말해서 실현된 적은 없지만, 부자들에게 많은 세금을 거둬서 분배하면 됐다. 이 말은 굳이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하더라도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다. 북유럽의 국가는 이와 같은 체제로, 주거, 교육, 의료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생각하는 고소득자는 이미, 축적된 – 상속받은 – 자본으로 시작하는 사람도 있으나, 자수성가한 인물인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스페이스 엑스, 테슬라, 기가팩토리 세 회사를 운영하는 일론 머스크(일론 머스크를 테슬라의 CEO로만 알고 있는 독자도 있을 테고, 혹은 이름 처음 들은 독자도 있을 것이다)를 떠올려 볼 때 그가 노동자들을 착취해서 부를 쌓는 것으로 보기 힘들다. 그는 엘리트를 선발해서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고 원하는 능력을 얻고 있다. 세계적인 기업들이 이와 같다. 이런 고소득 계층을 상대로 세금을 징수할 수 있을까?
과거 마르크스는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라고 했다. 하지만 이 말은 밀라노비치가 말하듯이 ‘자본가에게는 조국은 없다’로 바뀌었다. 왜냐하면, 자본가들은 자신의 부를 지키기 위해서 언제라도 자본을 국외로 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방법은 가진 자들의 자발적인 자선일까? 그러나 이러한 자선 효과도 한계에 직면한 상황이다.
『거대한 침체』에서는 “부자들에게 더 많은 것을 징수해서 나눠주는 것도 한계 효용적으로 볼 때 큰 효과가 없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절대적인 불평등에 해당하기보다는 상대적 불평등에 해당할 것이다. 우리 사회만 해도 분명히 경제적으로 좋아졌지만,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자살률이 높다. 상대적 박탈감, 위화감, 사회적 아노미 등으로 인한 결과이다.
앞으로 다가올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한 우려는 대부분 불평등에서 시작된다. 앵거스 디턴은 미래의 불평등을 우려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의 엄청난 집중은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창조적 파괴의 숨통을 막아 민주주의와 성장의 기반을 약화할 수 있다. 그리고 불평등은 이제 개인의 힘으로 극복하기 힘들다.”
불평등 문제는 이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게 밝혀졌다. 그리고 여러 국가가 정책으로 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우리 사회도 적극적으로 불평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현 정권은 ‘워라밸’을 주창했다. 일과 삶의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대기업 등에서는 야근을 줄이고, 공무원들도 스마트 워크 제도를 활용해서 효율적으로 업무를 추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 아울러 기본적인 소득의 증대로 부의 분배를 실현하겠다는 의지는 사상누각(沙上樓閣)이었다. 왜냐하면, 이미 기득권층이 돼버린 정책 담당자들이 서민의 실정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새로운 혁명 시대와 더불어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동시에 바라보고 있다. 어쩌면 코로나 시대를 겪으면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활개를 칠 기술들이 더 빨리 우리 사회에 적용될지도 모른다. 이 말은 소수 엘리트나 관련자들한테는 더 빨리 찾아오는 기회지만, 대다수 국민은 준비할 시간이 그만큼 없다는 의미다. 아무리 포용을 말하고, 평등을 말해도 시스템으로 정착하지 않은 선언은 상상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이런 시대에 과연 우리는 어떻게 준비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야 할까? 이제부터 그 고민과 작은 방법들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