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돈인가?"
‘믿음’ 즉 믿는 건 기독교인의 숙명이다. 히브리 기자는‘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실제로 보이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믿어야 한다. 성경은 예수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고 나서 제자들에게 나타났고, 비로소 이후에 제자들이 예수가 이전부터 말했던 사건을 믿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제자 중 도마는 혼자 예수를 보지 못했는데, 다른 제자들의 증언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예수는 도마 앞에 다시 나타나서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 큰 믿음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교회는 하나님 믿는 믿음을 강조한다. 세상의 복과 출세와 성공을 추구하지 말고, 오직 하늘의 보물을 쌓으면서 살라고 전한다. 물론, 기복신앙을 강조하는 교회도 여전히 많다.
쉽게 말해 교회에 다니면 복 받는다는 것이다. 성적이 오르고, 좋은 대학에 가고, 취업하고, 결혼도 할 수 있고, 출세도 할 수 있다고 전했다. 여기서 믿음은 부적과 다를 바 없다. 막스 베버가 말한 전 근대 사회의 특징으로 말한 ‘주술’과 차이가 없다. 코로나 시대 예배를 강조하면서 모이라고 말하는 교회도 마찬 가지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 교회에 다닌다고 공부를 잘한다는 말은 예전에도 신뢰하기 힘들었지만, 취업과 결혼은 상대적으로 신뢰가 있었다. 교회 다니는 청춘 남녀가 연애하다가 결혼도 하고, 교회에 기업 대표가 있다면 몇몇 성도 취업시켜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기독교 내에만 존재하는 공적이 아니었다. 다른 종교인들도 유사했으니 말이다. 고도의 성장 가도를 달리던 당시 한국 사회는 가만히 서 있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위층으로 데려다주는 에스컬레이터 같았다.
현시대는 ‘고용 없는 성장’ 시대라고 한다. 기술 발달로 생산력은 향상했지만, 덕분에 많은 인간이 일자리를 기계에 뺏겼다. 이런 세계적인 흐름은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되었고, 교회를 다니는 청년들도 취업과 결혼, 먹고사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만 했다. 과거에 신뢰받던 기복신앙에 기댄 설교로는 청년들을 쉽게 설득하기 힘들다. 현재 아무리 기도해도 코로나를 물리치지 못하는 현실도 유사하다. 오히려 교회가 전염병의 확산 지가 되기도 한다.
이제 교회는 믿음을 설교한다. 즉, 내세에 기댄 설교를 한다. 물론, 설교 내용은 틀리지 않았다. 하늘나라를 빼고 나면, 지극히 윤리 교과서적인 내용이니 말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설교하는 목회자나 교회의 주요 인물들이(장로 등) 내세를 추구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에 전하는 메시지는 현실과 괴리를 느끼게 만든다.
대형 교회 목사들은 교회의 헌금을 사비(私費)처럼 사용하는 경우가 상당수며, 교회 내에서는 수많은 정치적 야합이 이뤄진다. ‘솔라 피데(Sola fide)’는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 당시 내세운 구호이고, 한국 개신교도 ‘오직 믿음’을 강조하지만, 그 믿음을 증명하는 길은 헌금 액수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성경에서도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라고 하지만, 정도가 심하다. 장로가 되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고, 다른 직분도 직분에 해당하는 헌금을 내야만 한다. 혹, 헌금 생활이 잘 이뤄지지 않으면, 강제적으로 직분을 내놓기도 한다.
헌금은 강요가 아니지만, 내지 않으면 민망하게 만드는 곳이 현재 교회 모습이다(물론,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니다). 신약에 등장하는 한 여인의 적은 헌금을 크게 칭찬했던 예수의 말씀은 한국 교회에 적용되지 않는다.
헌금을 많이 내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직업과 삶의 모습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회도 돈을 중심으로 한 물신주의가 팽배한 데, 역사적으로 볼 때 사회와 그 성격을 유사하게 가져가는 교회 안에 물신주의가 만연한 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물론, 교부들은 금전에 대한 부분에 경계했지만, 종교개혁 이후 오히려 돈과 관련한, 특히 지대나 이자에 대한 부분을 인정하는 사상이 등장한다. 상인들의 삶을 독려했던 칼뱅이 목적과 다르게 이해됐을지는 몰라도 자본 인정에 힘을 보탰고, 베버는 비록 기독교에 대한 부족한 이해에 기반했다 하더라도 미국의 자본주의를 개신교와 엮고 있다.
성경은 물질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기 힘들다고 말하고 있지만(성경에는 '두 마음'을 품지 말라고 전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교회만 하더라도 헌금이 충분하지 않으면, 교역자들의 사례비나(월급이 아니라 사례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상하다) 교회 부서 운영 등과 관련한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 특히, 대출해서 교회를 건축한 경우 헌금이 줄어든다는 것은 교회 존폐에 큰 영향을 준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신뢰이다. 개인 정보를 비롯한 수많은 정보가 소통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환경 등 모든 분야의 문제와 그 해결이 투명하게 공개된다. 혹, 공개하기 싫더라고 누군가에 의해 공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당장, 속인다고 해도 그 속임수가 오래가지 못하게 된다. 한 번 신뢰를 잃게 되면, 그 조직이나 개인은 실추한 신뢰를 회복하기 힘들 것이다.
한국 교회는 이미 사회적으로 신뢰를 잃었다. 그리고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방식을 고수하면 교회는 성전이 아니라, 소굴이 될 것이다. 초대 교회의 핵심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사도 바울은 자비량 선교로 유명하다. 천막 제작 기술이 있어서 스스로 선교비를 충당했고, 서신에서도 누구에게도 신세 지지 않았음을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 영국에서 출간한 『바울의 선교와 우리의 선교』는 100년 전에 나온 책인데, 한국 현실에 그대로 적용된다.
바울은 돈으로 선교하지 않았다. 혹 필요한 경우 스스로 마련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그렇지 않다. 이미, 천문학적 수준의 헌금을 거둬들이는 교회는 돈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다. 돈은 어쩔 수 없이 탐욕을 낳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탐욕은 교회의 신뢰가 실추되는 근본이 된다. 상업과 자본에 대해 긍정적인 해설을 해줬던 장 칼뱅이나, 미국의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근원을 프로테스탄티즘에서 발견한 막스 베버의 자본에 대한 긍정적인 지지도 한국 교회의 물질에 대한 집착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이다.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해야 새로운 시대에 한국 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정신적 동력을 만들 수 있다. 물질적으로 성장했고, 규모는 키웠지만, 이제 성장은 정점을 찍고 내리막을 걷고 있다. 현 상태를 유지하고자 해도 새로운 성도가 늘어나지 않는 한 성도도 줄고, 헌금도 줄어들게 될 것이다.
청년들은 외부에서 쉽게 유입되지 않고 오히려 청소년기가 지나서 청년으로 구분될 때쯤에는 교회를 떠난다. 상대적으로 새로운 유사 기독교인 수는 늘어나고 있다(한국 기독교 인구가 늘었다는 통계가 있는데, 여기에는 유사 기독교인 수가 포함된 것이라고 한다). 흔히, 말하는 이단(異端)에 많은 사람이 관여하는 이유 중 가장 큰 원인은 기존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때문이다(흥미로운 사실은 대체로 보수적인 교단이 모인 한기총을 상대로 비판한다).
아울러 구조적으로도 살펴보면, 규모가 큰 종교는 민첩성이 떨어진다. 신속한 변화 시도가 쉽지 않고, 새로운 시대 적응도 쉽지 않다. 그러나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유사 기독교는 민첩하게 반응할 수 있다.
합리적이지 않은 정통을 고수하는 고루한 기독교를 보다가 지역 사회에 밀접하게 관여하고,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는 유사 기독교는 대중에게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아울러 규모도 크지 않으니, 가입자들이 소외당하는 느낌도 훨씬 적을 것이다(교회를 다니면서 외로움을 느낀 교인은 나뿐일까?).
신뢰를 잃은 곳에서 외로움은 당연한 증상이다. 누구도 믿지 못하는 교회에서 부정적인 인식이 생긴다면, 당연히 교회를 벗어나고 싶을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은 투명성을 바탕으로 한 신뢰가 훨씬 더 중요한 시대를 낳을 것이다. 현재 교회가 산통 없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를 원한다면, 성모 마리아의 성령잉태, 출산과 같은 기적을 바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