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내의 다양성, 개방성
다양성과 다원주의에 대한 논의는 필자가 대학 시절에도 있었다. 다양성은 신앙의 공통분모(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등)는 같다고 전제하면서 그 방법이나 인격적 체험이 개인마다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반면에 다원주의는 진리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수 있다는 것인데, 당시 포스트모던의 영향으로 인해 다원주의는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거부해야 할 사조였다. 종종 셀 모임을 하면, “다양성은 지향해야 하지만, 다원주의는 지양해야 합니다.”라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했다. 칸트로 대변되는 보편적 준칙이 니체의 ‘신은 죽었다!’로 대체되고 있는 시기였다.
현시점은 어떨까? 진리에 대한 논쟁은 진보하지 못했고, 오히려 진부하다. 진실을 찾아가는 방법도 여러 갈래 길이어서 특정한 방향이 정도(正道)라고 단정적으로 주장하기도 힘들다. 20년 전에 그렇게 목에 핏대를 세우며 토론했던 다양성과 다원주의에 대한 논의도 무의미해졌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도 과연 그들이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이 제대로 된 하나님인지, 회의(懷疑) 해 봐야 하는 상황이 됐다.
교회가 거침없이 성장하고 있을 때는 교회는 곧 진리처럼 보였다. 성장에 스스로 자화자찬하면서 천만 성도를 운운했다. 그리고 장로 대통령도 탄생했다. 이름하여 ‘문민정권’이었다. 많은 기대를 했지만, 그 말미는 초라했다. 오히려 국가를 위기에 빠뜨렸다. IMF 시대를 보낸 세대는 그 시절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잘 알 것이다.
이후 대학교는 취업 준비기관이 되었고, 학문의 전당으로 진리를 탐구했었던 과거 열학 분위기는 찾을 수 없었다. 도서관의 책상 위에는 토익과 토플책이 자리 잡았고, 도스토옙스키 같은 인간의 우울한 심연을 다루는 책들은 책상 위에서 종적을 감췄다.
다양성과 다원주의 논의는 더 다뤄지지 않고, 오직 취업을 위한 몸부림만 캠퍼스에 가득했다. 진리가 있다면, 오직 ‘안정’이었다. 우울한 시대에는 종교기관이 많은 관심을 받고, 신도가 늘어나는 기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약발도 받지 않는 시대였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취업이 잘되지 않았다. 목사들은 여전히 설교 시간에 기독교 문화를 배경으로 한 국가들은 대부분 선진국이라고 외쳤지만, 세계 선교 대국인 한국이 구제금융 대상국이 됐으니, 전후가 맞지 않는 설교였음을 목회자들도 스스로 알았을 것이다. 종종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한 우리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라고 설교하는 목사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북한이나 중국 등 기독교를 배척하는 국가는 진작에 지도상에서 사라지지 않았을까?
어려운 시절 교회는 더 많은 이벤트 기도회를 만들었다. 수험생을 위한 기도, 부활절을 두고 40일 기도, 봄이면 봄마다, 가을이면 가을마다, 다양한 기도회를 끊임없이 만들었다. ‘오직 예수’만이 진리임을 강조하고, 믿음을 강조했다. 물론, 믿음을 강조한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기독교인들의 상황이 일반인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역설적으로 ‘오직 믿음’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과거에는 ‘기복’적인 부분을 강조했다면, 이제는 ‘믿음’을 앞세워 기복적인 요소를 조금씩 줄였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교회는 다양성도 다원주의도 좋아하지 않았다. 교회는 여전히 하나만을 강조한다. 하나님을 핑계 삼아 ‘기복’이든 ‘믿음’이든 상황에 맞는 논리로 대응한다. 차라리 ‘기복’ 시절에는 교회에 열심히만 다니면 ‘잘 된다!’라고 해서 오히려 신앙생활하기가 편했는데, ‘믿음’ 시절이 도래하니 잘 되면 하나님 탓이요, 안 되면 내 탓이 됐다. 즉, 믿음이 부족해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 한 고시 수험생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늘 떨어지고 나서 목사와 기도를 하면 더 열심히 신앙생활해야 한다고 조언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방법을 가르쳐 주는데, 주일 성수 반드시 하고, 새벽 기도 작정하고 일정 기간 빠지지 말고 다니라는 건 꼭 포함돼 있었다. 이런 모든 주문을 다 지키고 합격하면, 목사는 승전가를 부르면서 자화자찬할 사례를 만들게 되고, 혹 실패하더라도 목사는 고시생을 탓할 수 있다. “네가 진실하지 않아서 그렇다.”라는 말로 상처 주고 만다.
청년 시절 다양성과 다원주의에 대한 논쟁은 오히려 기성세대가 되면서 포기한다. 왜냐하면, 꿈(비전)이 없는 기성세대에게 필요한 건 오직 ‘돈’, ‘집’, ‘큰 차’이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믿음’을 앞세우지만, 육신은 ‘기복’을 바라는 이율배반적인 현실이다. 청년 시절 신앙의 다양성, 다원주의에 대한 토론은 기성세대가 되면서 '돈'으로 귀착된다.
앞에서 현재 교회 내 민주주의는 어렵다고 이야기했다. 초대 교회의 성격은 분명,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고 치열한 토론을 통해서 합력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의 교회 역시 초대 교회의 모습을 발전적으로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양성도 마찬가지다. 교회 내부에서 다양성은 분열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다른 생각이 있어도 표출하기 힘들다. 물론, 일반 교인들은 그들의 성경적 지식과 제안하는 의견에 대한 성경적 레퍼런스가 부족해서 의견 제시를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하는 말은 “순종하겠습니다.”이다.
순종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지, 자기와 다른 생각이 있는 사람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생각이 있는 사람이 목사일 수도 있고, 장로일 수도 있다. 목사와 장로가 다 맞는 것은 아니며, 다 맞을 수도 없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 자체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데서 시작하기 때문에 순종보다는 다양한 의견을 표현하고 토론하는 것이 선을 이루어가는 방법이다. 어리기 때문에 입을 다물어야 한다면, 그 다문 입을 벌릴 수 있을 때까지 교회에 남아 있는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산업화 시기 한국 사회와 교회는 장년층의 경험과 권위가 정답처럼 여겨졌다. 왜냐하면, 후배들이 선배의 자취를 좇아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 시대는 에스컬레이터와 같이 시간이 흐르면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자리에, 혹은 더 나은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3차 산업혁명 시대부터, 특히 IMF 이후 세대들은 그들의 부모 세대처럼 친절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갈 수 없었고, 도전보다는 안정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청년들이 선호하는 직장으로 부동의 1위가 교사가 된 지 10년이 훨씬 넘었다.
『늦어서 고마워』에서는 저자의 세대에는 대학을 졸업하면 직장을 찾는 것이 문제였지만, 자신의 자녀 세대는 졸업과 동시에 직업을 만들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말한다. 위에서 끌어주고, 그런 끌어주는 힘을 받아 올라가던 시대에 다양성은 오히려 방해 요소였을 수도 있다. 시대의 정도(定道)가 있었으니, 다른 길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장년층은 청년층에게 ‘리버스 멘토링(reveres mentoring)’을 받아야 할 정도로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디지털 격차(Digital Divide)’이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이지만, 스마트폰의 활용에 따라 스마트폰이 여전히 2G 폰으로만 사용되기도 한다.
철저히 개인주의화된 시대에 다양성을 거부하는 것은 스스로 문을 닫겠다는 선언과 다를 바 없다. 수많은 사람의 의견을 다 받아주지는 못할망정, 순종을 빙자한 침묵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
초대 교회의 모습을 보자. 초대 교회는 다양한 구성원들이 모였고, 기본적으로 평등을 강조했다(물론, 노예가 있었고 그들을 부리는 주인이 있었다). 물론, 에드먼드 버크와 같은 보수주의자는 다양성을 자연스러운 위계질서, 즉 다양한 계급의 존재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위계질서를 강조하지 않았다. 혹, 구분이 있다면 직분으로 나누어져 있을 뿐이었다.
사도 바울은 각 은사에 대해 말하면서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이 초대 교회의 사상이었다. 평등은 곧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사마리아인이나 모두 하나님 앞에서 같다는 것이 바로 초대 교회의 제안이다. 다양한 구성원이 모이면 다양한 의견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협력해서 선’을 이루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줄타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줄타기를 사도 바울은 염려했고, 부정했다.
누가 더 잘난 것이 아니라면, A나 B의 의견은 둘 다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시기, 질투, 분쟁이 당연히 존재할 수밖에 없다. 긴장감은 다양성을 그림자처럼 쫓아다닌다.
과거 정도처럼 보였던 길이 있었던 시절에 공동체는 획일적이었다. 소수의 의견은 무시해도 괜찮았다. 솔직히 소수가 빠져나가도 금세 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통일을 강조했고, 다양성을 거부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의 공동체는 무지갯빛이어야 한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제시하지 않고서는 다양한 구성원을 흡수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어리다고 무시해도 되는 시대가 아니다. 그들의 의견도 소중히 여기고 발전적으로 전개할 수 있도록 격려해줘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코로나 시대에 수구적인 한국 교회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는 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민주주의 원칙을 고려하면 그들의 생각이나 의견은 존중받아야 한다. 단, 그들의 행동이 타인에게 피해를 줄 경우는 다르다. 타인에게 피해를 줄 정도로 자신의 주장을 실행으로 옮기는 것은 의견이 아니나 독선이며, 오히려 그들이 다양성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점이 연결되어 그물처럼 얽히고설킨 공동체가 만들어지기를 원한다면, 다양한 세대를 존중하고 그들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열린 마음’이라는 표현을 교회에서 자주 들을 수 있다. 모임 시작하기 전에 늘 기도하는 제목 중 하나가 ‘참석자들이 열린 마음을 갖게 해 주십시오.’이다. 이런 기도를 통해서 교인들끼리의 마음은 얼마나 열리는지 모르겠지만(오히려 역설적으로 마음이 닫혀 있기에 항상 여는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실제로 교회 문은 열려 있는 경우가 별로 없다.
최근에는 교회들이 지역 사회에 공간을 개방하기도 하는데, 대표적으로 주차장을 예배 시간 외에 사용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하고(반대로 유료 주차장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무더위 기간에 교회 로비를 쉼터로 활용하기도 한다. 별일 아닌 거 같지만, 이 정도 수준으로 개방하는 교회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관리가 어렵다는 것인데, 그 덕분에 한 주 내내 사용되지 못하고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는 공간이 한국 교회에는 상당히 많다.
4차 산업혁명의 또 다른 특징은 개방성이다. 개방성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투명성이다. 과거와 같은 밀실 협의를 지양해야 한다는 의미다. 현재는 수많은 정보가 지천으로 깔려서 역설적으로 ‘정보 다이어트’를 말하는 책도 있다. 그러나 정보가 범람한다고 해서 투명한 것은 아니다. 국제투명성 기구에서 발표하는 순위를 보면,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수준은 아시아 톱클래스임에도 투명성 지수는 하위권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순위는 국가·사회적으로 불투명한 문화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개방된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투명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반론도 만만치 않다. 주로 개인 정보 누출로 인한 악용을 염려한다. 특히, 몇 년 전 금융권에서의 고객 신상 누출은 우리 사회의 개인 정보보안에 대한 포비아(phobia)를 급증시켰다. 온 국민의 개인 정보가 금융권의 정보보안이 장치의 취약성으로 인해 외부로 유출되었고, 배상과 관련한 소송이 진행돼 해당 금융권은 막대한 배상금을 지급하는 중이다.
그러나 새로운 혁명 시대에 사회는 더 개방될 수밖에 없다. 사물인터넷(IoT)이 활성화되고, 진화해서 만물인터넷(IoE) 시대가 되면, 개인의 정보는 어쩔 수 없이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혹은 상업적으로든 활용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우리의 일상은 노출되고, 정보화될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수많은 메시지가 전달될 것이다. 지금도 모바일로, pc로 수많은 상업 정보가 전달된다. 대부분은 스팸 수준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개인에게 전달되는 메시지는 그 가치를 높일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떨까? 기본적으로 교인은 사회인이다. 그래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수많은 개인 정보가 공개된다. 그리고 공개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교회 보안 시스템을 고려하면, 쉽게 해킹당할 수 있다. 대부분 교회가 해킹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작고 재적인원도 적지만, 개(介) 교회가 아니라 지역 단위로, 혹은 노회 단위로, 혹은 교파별로 분류하게 되면, 수십만 명이 넘는 개인 정보가 유출될 수 있다. 아니면, 이미 유출됐는데도 알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신상정보를 판매했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 교인들의 정보 누출에 따른 배상은 누가 질 것인가? 교회는 책임을 회피할 것이다. 그러면서 과학 기술 발전과 관련해서 부정적인 설교를 매주 할 것이다.
“우리 교회가 해킹돼 많은 성도의 신상정보가 누출됐습니다. 과학 기술 발전이 분명히 인간의 삶에 이로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악용될 경우 그 피해는 인간이 받습니다. 오히려 과거 시대가 더 안전하고 행복했던 시대였습니다. 이번에 정보 누출된 사례를 보면서 교회에서는 더 성경 중심, 인간 중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가상 설교이다. 어떤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려 할 것이다. 교회는 보안 부서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대형 교회도 보안 책임자는 없다. 그러니 마음먹고 해킹한다면 어려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