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갈등을 즐기자"
한국 교회는 구성원이 다양한 세대로 이루어져 있기에 갈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는 이와 같은 다양한 갈등을 긴장 상태로 설명하며, 이러한 긴장 상태를 부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변증법적인 발전으로 이해한다. 즉, 긴장 상태가 계속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서 토론과 대화가 이루어지고, 더 나은 해결책을 찾는 과정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합의된 결정을 바탕으로 더 건강한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토론에 약하다. 토론은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는 것을 토대로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敬聽)’하면서 합의점을 찾는 것인데, 교회는 토론이 끝나고 나면, 한쪽은 이를 갈며 울고, 다른 한쪽은 승전 가를 부른다. 아니면, 실족하는 소수를 건져주기 위해서 다수가 포기하기도 한다.
세대 간의 절연을 회복하고 재연결 과정에는 긴장감이 존재하고, 따라서, 같은 세대만의 토론보다 더 복잡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 진중한 세대별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장년층은 권위 의식을 버려야 한다. 한국 사회는 불리하면, “너 몇 살이야?”라고 윽박지른다. 옳고 그름을 따지거나 발전을 모색하는 데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연령보다는 아이디어와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
반대로 청년층은 자신의 소신을 정직하게 피력하되 장년층의 경험과 신앙의 연륜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소신 있는 주장이 청년층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유는 교회에 관심이 없고, 점점 기독교에 거리를 두려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앙의 연륜을 존중해야 하나, 신앙심 자체가 두텁지 못한 청년들은 오히려 기성세대의 윤리관에 이해하기 힘들 때가 더 많다. 코로나 시대에 많은 사람이 교회를 떠나는 것도 당연하다. 폐쇄적인 교회는 개방성을 중요시하는 청년들에게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사회의 다른 어떤 조직보다 유리한 상황이다. 현재 한국 사회는 가정에서도 부모와 자녀 간의 식사 모임도 이루어지기 힘든 상황인데, 교회는 매주 같은 시공간에 서로 다른 세대가 모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모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장점이고, 새로운 실험의 기회이다.
민주주의가 설레발치는 세상이다. 그런데, 그 설레발도 살짝 비켜 가는 곳이 교회다. 세상은 정치적 민주화는 물론이고, 경제적 민주화도 선포하고 있다. ‘포용적 성장’이 바로 경제적 민주화를 의미한다. 물론, 민주주의가 모든 결과의 평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진보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사실, 사회주의에 가깝다(심한 경우에는 공산주의와 별 차이를 못 느낄 정도다) 방법론은 다르지만, 부의 분배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다(물론, 그 정도의 차이가 빨갱이니, 뉴라이트를 구분하기도 한다).
어쨌든 한국 사회는 여전히 빨갱이가 존재하고(사실 남한에서 빨갱이가 될만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다 억지다). 노동력을 착취하는 자본가가 존재한다. 헨리 조지는 『진보와 빈곤』에서 노동력과 자본을 경제활동에 있어서 긍정적인 요소로 인정하는 한편, 지대를 문제 삼았다. 그래서 지주의 지대를 토대로 세금을 거둘 수 있다면, 부의 분배가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이런 측면에서 헨리 조지는 마르크스와 다른 분석과 방법론을 제시했는데, 어떻게 보면 프롤레타리아 혁명보다 더 힘든 방법, 즉 지주들에게 세금 걷는 방법을 제시했다.
마르크스가 19세기와 20세기를 아우르는 좌파들의 경제 논리였다면, 21세기는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필적할만하다고 한다. 피케티 역시 세계적인 차원에서 자본 세를 징수하자는 이상론을 제시함으로써 이상주의자로 인정받고 있다.
노동자들의 파업이나 혁명은 가능한 이론으로 이해할 수 있고, 그 실현 가능성을 떠나서 여전히 중요한 이론이자 행동지침으로 약동하고 있는데, 지주들이나 자본가들한테 세금을 물리자는 사상이나 이론은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소리로 이해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적 민주화가 가능할까? 정권이 바뀌었지만, 서민을 이해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배신감을 느끼게 하는 형국이다. 기존 정권이 수백억 단위의 부자였다면, 지금 정권은 거기서 ‘0’(야당이 백억 대 자산가 중심이라면, 여당은 수십 억 대 자산가라는 의미다)이 하나 준 것뿐이다. 서민들이 보기에는 그들도 여전히 부자이다.
다음은 정치적 민주주의이다. 정치적 민주주의는 두 가지 방향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 현재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는가?라고 할 때, 형식적인 차원에서 정통성은 갖췄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총선의 경우 4년에 한 번, 대선의 경우 5년에 한 번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사회적 정당성이라는 차원에서 검토한다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투표율이 높은 편이 아니고, 과반수의 지지를 받아서 대표가 되는 경우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투표율이 70%라고 할 때, 40%의 득표율로 당선이 되었다고 하자. 총유권자를 100%로 할 때 득표율 40%는 28%의 지지를 의미하다. 학교에서 28점을 맞았다고 한다면, 당연히 낙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부자들은 왜 민주주의를 사랑하는가?』에서는 대중이 정치에 무관심해질수록 기득권 계급들의 권력 유지가 수월하다고 하는데 정치적 무관심을 통해 파생되는 권력 복지부동 현상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교회와 민주주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사회 전반에 관련한 정치·경제 민주화를 잠시 정리해 봤다. 사회에서는 이렇게 다양하게 논의되는 민주주의가 교회에서는 얼마나 반영되고 있을까?
한국 교회에서 민주주의는 ‘소리 없는 아우성’에 불과하다. 형식적으로 민주주의 제도를 활용하는 부분이 있으나, 보수적인 교회일수록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의결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당회장인 담임 목사의 권위가 클수록 당회는 거수기 역할을 할 뿐이다. 대형 교회의 담임 목사들의 헌금 횡령과 성(性)과 관련한 문제, 권한 남용, 부자세습 등은 모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일개 교회의 목사가 광화문 집회를 이끌었다. 이때, 자원은 개인의 것이었을까? 그리고 그런 집회는 코로나를 확산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민주주의는 혼자 살아가면서 지키는 원칙이 아니다. 나와 다른 사람이 있을 때, 적용하는 원칙이다.
사회에서는 민주주의가 권력 독점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는데(예를 들어 삼권분립이 그러한 역할을 해야 한다. 물론, 우리나라는 행정부가 절대적으로 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교회는 담임 목사의 권력을 제한할 수 있는 견제 장치가 거의 없다. 혹, 장로들이 합심하여 담임 목사와 대립할 때가 있고, 그 결과 목사가 축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라고 하더라도 목사의 독재는 사라졌다 하더라도 장로들의 권한이 크면, 교회는 과두정으로 운영된다고 이해해야 한다.
교인들이 천 명 가까이 되는 교회에 시무 장로는 10명 내외 수준이다. 당회는 담임 목사와 시무 장로로 구성되어 있으니, 천 명을 대표하는 대표단의 구성원은 10명 내외인 셈이다. 물론, 장로를 선출하는 방식은 세례를 받은 성도들이 모두 참여하고, 3분의 2 찬성을 받아야 장로로 선출될 수 있다. 이해하는 시각에 따라 꽤 엄정한 절차를 통해 선출하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3분의 2라는 수치가 그렇게 느끼도록 해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많은 성도가 교회의 선출직에 관심을 두지 않아서 장로 후보자들의 면면을 제대로 알고 투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종종 낙선되는 후보자도 있지만, 그 다음번에 다시 후보로 추대되기에 언젠가는 장로로 선출된다. 과거 양반 작위를 돈으로 살 수 있었던 조선 말기와 비슷한 광경이 교회에서 벌어짐에 씁쓸함을 느낀다.
교회 운영방식은 민주적일까? 과거로부터 교회는 스스로 거룩한 곳으로 자화자찬해왔다.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교회의 방식이 있는 것처럼 주장해왔다. 그러나 교회 내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결국, 법정 다툼으로 이어졌다. 교회의 상위 기관은 사회 기관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지역의 교회들을 보면서 한탄했던 모습이 현재 한국 교회의 모습이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다툼도 세속 권력의 중재로 조정된 경우가 많다.
산업화로 국가가 성장하는 동안 교회도 열심히 성장의 가도(假道)를 달렸다. 조직은 비대해졌고, 그 비대함이 곧 성공과 동치(同値)됐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한국 사회는 독재와 군부정권이 지배했고, 교회도 비슷하게 카르스 마적인 목회자 중심으로 성장했다. 이윽고 20세기 말 무렵 군부정권이 물러가고, 적어도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지도자를 선출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했으며, 이제는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넘어서 성숙한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할 상황이다.
그러나 3차 산업혁명 시대에 우리나라 국민은 정치적 무관심으로 일관했고, 그래서 정치권은 발전 없이 원론적인 비방만을 일삼으면서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어떤 경우가 있어도 선거는 정기적으로 치러지고 후보 중 한 명은 당선이 되니 유권자들의 관심과 참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후보로 추대해 줄 정치 세력이 중요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 교회는 3차 산업혁명 시대에 외면당하는 수준을 넘어 ‘개독교’라는 비방받고 있으며, 도덕적 신뢰를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면서 공(公) 교회로서의 위상을 잃어갔다.
4차 산업혁명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작은 점들이 선으로 연결돼 거미줄처럼 복잡하고 입체적인 네트워크로 형성될 것이다. 점들이 연결된다는 것은 시점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서 중심이 달라짐을 의미한다.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장 꼭대기에 두고 움직이는 기관이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실제로 보이지 않아서, 보이는 목사 혹은 당회를 중심으로 운영된다. 그 모습은 피라미드 형태다. 마치, 움베르트 에코의 『푸코의 진자』같은 비밀 집단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나 원래 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도 나온 것처럼 직분의 나눔이 그 역할에 따른 것이지, 위계질서를 말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민주적인 운영이 가능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권위는 책임과 의무를 무겁게 져야 하는 자리였지,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예수의 모든 제자가 순교한 것이 그 증거이다.
아울러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를 위해서 사도들이 토론했던 기록이 『사도행전』에 등장한다. 일방적인 명령이 아니라, 서로의 입장을 최대한 존중하기 위한 회의가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초대 교회의 전통은 권력을 차지하면서부터 무너지게 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이러한 초대 교회의 전통을 민주주의 방식으로 업그레이드시켜야 한다. 편린(片鱗) 된 개인들을 엮어서 새로운 공동체로 구성해야 함은 새로운 민주주의 패러다임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최고 방법이 아닐 수 있지만, 현재 민주주의를 대신할 수 있는 시스템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민주주의 시스템 자체가 자가발전할 수 있는 러닝(learning)을 하고 있기에 새로운 대안을 스스로 파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치학에서는 네트워크 정치이론도 등장해서 복잡한 세계 정치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곧 더 복잡한 이론들이 등장해서 정치적인 현상을 해석하려 할 것이다.
지금까지 교회와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교회 내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음을 주장했다. 그리고 초대 교회의 전통을 고려할 때 민주주의 시스템으로 운영된 것은 아니지만, 그와 유사한 전통이 있었다는 것을 성경 속에서 찾았다. 교회의 전통을 고려해 볼 때 초대 교회는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의 네트워크였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빗대어 볼 때 한국 교회의 현실은 분산이 아닌 분열이라는 의미에서 초대 교회와 다르다.
긴장과 갈등을 견디기 힘들어하고, 갈등을 잘못으로 치부한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늘 갈등과 긴장이 있기 마련인데, 왜 그러한 당연함을 잘못으로 여기는가?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라는 말씀이 바로 긴장과 갈등의 발전적 해결 아닌가?
세상과 구별되려는 노력은 도덕과 윤리적 가치관과 그 실천을 통해서 보여주면 된다. 새로운 시대에 민주주의적인 시스템을 거부한다면, 근대화 시기 프란츠 카프카의 『성(城)』처럼 외부인이 감히 넘볼 수 없는 비밀스러운 위세에 대한 자부심은 존속하기 힘들 것이다. 오히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고독한 섬이 되고, 그러다가 무인도가 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