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그대로 읽기" 27편

“세상은 전체적으로 악(惡)하다!”

by 조작가Join

“그대로 읽기” 27편 『붉은 수수밭』상(上) 편 모옌(Guan Moye)(201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언어의 품격


“한 작가의 언어 품격은 그의 문학 품격을 나타내 주는 뚜렷한 표지이다. 언어는 소설의 매체일 뿐만 아니라 소설의 내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 중

작가가 말한 ‘언어의 품격’은 도대체 뭘까? 소설은 극사실주의를 표방한다. 소설의 장면 장면마다 실감 난다. 특히, 혈흔이 낭자한 장면 묘사가 일품이다. 그런 장면에서는 어쩔 수 없이 눈을 질끈 감는다. 가장 무서운 공포 영화는 인간이 괴물일 때라는 말이 있듯이, 소설은 인간의 잔인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바로 이런 정직한 표현이 ‘언어 품격’이라고 할 수 있다. 꾸미지 않고 그대로 드러냄.


이런 묘사뿐만 아니라 사상적 중립도 유지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공산주의에 대한 미사여구가 별로 없다. 물론, 소설 말미는 문명사회에 대한 비판 - 마치 서구를 겨냥한 듯한 느낌- 이 있지만, 전쟁이란 시공간 속에서 작가는 어느 편도 들지 않는다. 아울러 등장인물도 선악으로 나누지 않는다. 등장인물 모두 선악을 고루 갖추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작가의 ‘언어 품격’은 ‘공평’이라고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읽기에도 벅찬


중편 다섯 편을 묶어 하나의 장편으로 출간했다. 정독하지 않으면, 시간과 배경이 오버랩하고 등장인물들의 회상 장면이 많아서 독자들이 헤맬 수도 있다. 대체로 완성도 있는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읽는 동안 박경리 작가의 『토지』를 새롭게 읽는 기분이었다. 현재 『토지』는 양장본 21권짜리로 편집돼 출간됐다. 작가 인생에 걸쳐 쓴 책이니 가볍기가 어려운 책이다. 양으로 따지면, 『붉은 수수밭』의 몇 곱절은 된다.


그러나 둘 다 유사한 시공간을 배경으로 백성들의 애환을 담았다는 부분에서 결은 다르지만, 유사한 작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한, 두 작품 모두 5부에서 종결되는데, 이상하게도 둘 다 어색한 여운을 남긴다.

개인적으로 『토지』의 ‘5부가 없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종종 하는데, 본 소설도 독자에게 뭔가를 남겨주고 싶은 작가의 의도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차라리 그대로 뒀다면 두 작품 모두 미완의 여운을 주면서 더 많은 생각거리를 남겼을 것이다.


마지막은 항상 어렵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와 평생 소설을 업으로 한 작가도 마침표 찍기도 이렇게 어렵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두 작품을 폄하(貶下)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저 앞부분과 비교했을 때 아쉽다는 말이니.

피니시라인에 도착하기까지 작품은 쉼 없이 달린다. 그래서 독자가 읽다가 지쳐 쉬는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

『붉은 수수밭』을 읽는 데 걸린 시간은 나흘이었다. 600쪽이 넘는 장편이지만, 한 시간에 100쪽 이상을 읽을 수 있는 독력이 있어서 이틀이면 다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작가의 표현이 워낙 세밀해서 장면을 상상하다가 지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보편적인 사고로 책을 읽으면,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소설은 인간의 잔인함, 그리고 사드(M.de. Sade) 적인 가학을 보여준다.


아버지는 쑨 씨네 다섯째의 칼이 뤄한 큰할아버지의 귀를 톱으로 나무토막을 켜듯이 싹둑 잘라내는 것을 보았다. 뤄한 큰할아버지는 미친 듯이 고함을 질러댔고 샛노란 오줌 줄기가 두 다리 사이에서 쭉쭉 뿜어져 나왔다. 『본문』 중

작가가 사드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충분히 공포물 이상의 효과를 내고 있다. 그리고 어떤 인물도 평범하지 않다. 모두 선악을 동시에 갖춘 인물들만 등장한다. 주인공조차도 정의와는 관계없는 인물이다. 그래서 할리우드식 권선징악은 없다. 독자는 작가가 만들어 놓은 붉은 수수밭의 바닷속에서 어쩔 수 없이 허우적댈 수밖에 없다.


‘정의(正義)’는 개나 줘 버려!


배경은 중국의 국공합작 시대이다. 일본의 침략에 국민당과 공산당이 연합하여 대항했던 시대다. 그러나 실제로 연합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게 작가의 시선이다. 그는 국민당 군대, 공산당 군대 팔로군 모두 비난한다. 정작 무찌르라는 일본군과의 전투는 피하고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해 볼 만한 상대만 툭툭 쳐본다. 그게 비적 떼일 수도 있고, 일반인일 수도 있다.


“바로 그겁니다. 그래요. 국민당은 교활하고 공산당은 간사하니. 중국은 아무래도 황제가 있어야 합니다!” 『본문』 중


전쟁 속에서 ‘정의’가 존재할 수 있을까? 작가의 시선은 변화무쌍한 ‘붉은 수수밭’의 시공간을 다룬다. 자연은 그대로인데, 인간은 그 속에서 다양한 일들을 만들어 낸다.

어떨 때는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는 데(소설 중 화자가 잉태된 공간이다) 필요한 침실이 되고, 전투 중에는 적의 위협을 피해 몸을 숨길 수 있는 방호 처가 되기도 한다. 반대로 한 치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시체는 썩어서 수수밭의 거름이 되기도 한다.


짓밟힌 붉은 수수를 비스듬히 바라보고 있었다. 온갖 생각이 다 떠오르면서 점점 낙심에 빠졌다. 그

의 마음속에서 지난날의 고마웠던 일들과 원망스러웠던 일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부귀영화. 아리따운 아내와 예쁜 첩. 아끼던 명마와 황금 총. 먹고 마시고 즐기며 주색(通色)에 빠져 보냈던 방탕

한 시간들이 모두 다 흘러가는 구름처럼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본문』 중


주인공은 자신의 시공간이었던 붉은 수수밭을 바라보며, 회상한다. 후회일까? 아니면, 인간의 체념일까?

붉은 수수밭은 인간의 역사와 관계없이 묵묵히 자리를 지킨다. ‘정의’는 인간이 만든 언어이지 자연이 만든 언어가 아니다.

작가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 주인공들이 있으나, 정의가 아니다. 주인공조차 강간 자이며, 살인자이며, 사기꾼이며, 방화 자이다. 아울러 권력을 쥐고 있을 때는 백성을 괴롭힌 자이다. 그들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 기르던 개들과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기도 하고, 강한 일본군한테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다.


‘홀로코스트’를 떠올려 보자.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죽어야 했던 사람들이 있다. 그 가운데서도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좀 더 오래 견딜 수 있었다. 하루에 주어진 물 한 컵을 한 번에 마시지 않고, 조금씩 나눠서 세수하고 양치하면서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이들은 제아무리 잔혹한 ‘나치’라고 하더라도 쉽게 죽일 수 없었다.


인간은 강한 자에 약하고, 약한 자에 강한 법이다. 그리고 약자가 강한 자를 이겨야 할 때는 항상 편법을 쓸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당한 자는 다시 복수를 계획한다. 모두 중국인들이고 공동의 적 일본이 있지만, 보이는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그들은 대의명분을 뒷간의 밑 닦는 휴짓조각으로 처분한다.


총칼에 의지한 크고 작은 무장 세력들이 강압적으로 화폐를 발행하는 일은 일반 백성들에 대해서는 가혹한 착취였다.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호화로운 장례를 위해 의존한 수단도 바로 이렇게 힘으로 강탈하는 변칙적인 것이었다. 『본문』 중


작가의 세상은 추(醜)하다. 그런데, 이런 작가의 주장을 반박하기도 힘들다. 그래도 ‘선’은 있고, ‘선한 사람’은 있다고 반격할 수도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세상은 전체적으로는 선하다고 말했듯이. 그러나 작가는 이런 종교적 시각에 반론을 펼친다.


만일 그날 작은 할머니의 찬란한 몸을 마주 대한 게 단 한 사람의 일본 병사였다면 작은할머니가 그런 유린을 모면할 수 있었을까? 아니. 아니다. 수컷 짐승이 혼자 있었다면. 원숭이가 굳이 모자를 쓰고 사람인 척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더더욱 미친 듯이 굴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무늬로 수놓아진 단정한 의관을 벗어버리고 짐승처럼 달려들었을 것이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라면 강력한 도덕의 힘이,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들짐승에게 그들의 몸에 난 거친 털을 아름다운 옷으로 가리도록 협박하기 때문에, 안정되고 평화로운 사회는, 마치 호랑이와 늑대를 우리 안에 오래도록 가두어 길들이면 어느 정도는 사람 물이 드는 것처럼 그렇게 인간을 훈련해내는 장소가 된다. 『본문』 중


작가는 짐승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홀로 존재한 인간은 문명이 만들어 놓은 가치관에 따르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작가는 일본군을 짐승으로, 작은 할머니를 ‘찬란한 몸’으로 대비시킨다. 그러나 그 할머니조차도 생존을 위해서 유부남을 유혹한 여자였다. 작가의 대비는 실패했다. 하지만, 인간의 자연 상태를 성악(性惡)으로 본 부분은 쉽게 동의할 수 있는 부분 아닐까?


현재를 보자. '코로나 19'시대에 인간들은 전체적으로 '선'할까? 솔직히 '악'에 가깝지 않을까? 기다림에 지쳐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시민들. 이제 전염병보다는 답답한 현실이 더 싫은 듯하다. 물론, 여전히 많은 사람은 타인을 생각해서 수칙을 지킨다. 그런데, 본인을 위해서일까? 타인을 위해서 일까? 우리 가족을 위해서 일까? 공동체를 위한 것일까? 긍정적인 판단을 하기 힘들다. 초기에 대구에서 서울에 가면 "대구에서 오셨으면 출입을 자제해 주세요."라는 말을 들었다. 요즘에는 "서울(수도권)에서 오셨으면 출입을 자제해 주세요."라는 말을 듣는다. 웃으면서 농담하듯이 복수를 한다. 신이 인간을 좋게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유토피아에서 추방당한 인간은 본성이 바뀐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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