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위한 제언(5)

국가 사회 편

by 조작가Join

제언 5.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 답은 정치에 있다!


4차 산업혁명과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많은 정치적 관심이 필요하다. 2017년 촛불 항쟁은 정권을 변화시켰고, 유명무실하긴 하지만 시급이 올랐고, 여전히 취업난으로 힘든 세상이지만,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정부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도덕과 윤리에 대한 부분이다. 도덕과 윤리는 인간을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원칙과 생각을 다룬다. 그러한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렬하고 구체화하는 것이 정치라고 생각한다. 각 부처의 장관들 임명과 관련한 청문회가 살벌하게 진행되고 고성이 오가는 현장이 되는 이유도 후보자들의 실제 도덕성과는 무관하더라도 겉으로나마 챙겨야 하는 기본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의 주인공은 ‘사람’이다. 따라서 인간의 복지와 행복을 위한 방향으로 세상이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바탕이다. 혹은 “4차 산업혁명은 사람을 지원해야 한다. 이것이 절대적인 가치이다.”라고 할 수도 있다.

당장은 새로운 과학 기술이 주인공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누구를 위한 것인가? 라는 질문의 답은 ‘사람’이다.

그리고 조금 더 확장해서 생각하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복리만을 생각했던 인류의 역사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또 한 번의 거대한 과학 기술의 혁신을 예측하게 했지만, 기후 문제 등과 같은 어두운 미래도 함께 가져왔다.『제6의 물결』에서는 ‘디지털 네이티브’이후에 ‘에코 네이티브’가 나올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4차 산업혁명은 사람을 위한 것이다.”


기본은 사람을 위함이다. 생산력 향상, 부의 창출 등 나열할 수 있겠지만, 이 모든 것 사람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개인이 아니라‘대부분 사람’을 의미한다. 항상 정치인들은 모든 사람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공표한다. 물론, 그 본심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입맛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다. 적어도 선거기간에는.

현실은 부익부 빈익빈이 더 심해졌다. 그리고 소외 계층은 줄어들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기계와의 전쟁』에서는“아무리 민주적이며 다원주의적인 사회라 할지라도 정치적 권력은 경제적 힘에 만들어지곤 한다.”라고 말한다. 즉, 가진 자의 편에서 정치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정치에 무관심할수록 이런 횡포는 계속 자행될 것이다.


4차 산업혁명과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초고령화 사회로 인한 생산 활동 인구의 감소가 더 심해질 것이다. 그래서 과학 기술에 기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4차 산업혁명의 목적 중 하나가 결국은 생산력 증대에 있으니 말이다. 인구가 늘어나지 않는 상황에서 생산력을 유지, 증대시킬 방법은 과학 기술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기술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를 돌봐주는 로봇이 생긴다고 생각해 보자. 즐겁고, 신기하다. 그렇다면 누가 로봇을 공급해 줄 것인가? 국가에서?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런 복지 혜택을 제공할 수 있는 국가는 많지 않다. 아예 없을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가진 자들만의 것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많은 저항이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발생했던 2017 촛불집회는 혁명과도 같았다. 헌법사상 초유의 사건을 만들었다. 대통령 탄핵을 통해 현직 대통령을 물러나게 했다. 그러나 혁명은 체제를 완전히 바꾸는 것인데, 체제는 변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이 살만해지고, 중간계층이 상위계층으로 올라가는 게 아니었다. 기득권층의 특혜는 여전했고, 그런 잘못에 사과조차 하지 않는 파렴치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2017년 2월 닐슨코리아가 한국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한국 사회 공정성에 대한 인식 조사’에 따르면, 19 – 29세 청년층의 ‘계층 역전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19.3%로 전 연령층에서 가장 낮았다고 한다. 그들은 공정한 미래를 기대하지 않는다.


대부분 사람의 범주에는 경제적 약자, 정치적 약자를 포함한다. 롤스는 그의 대표 저서 『정의론』에서 무지의 베일(the veil of ignorance)을 설정한다. 그러면서 약자에 대한 배려를 강조했다. 기회의 평등만으로는 실질적인 평등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롤스의 철학에 동의한다. 물론, 그의 실험적 요소의 한계는 인정한다. 그러나 약자에 대한 배려가 ‘정의(正義)’라고 한 그의 철학은 옳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사람은 4차 산업혁명 시대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기술에 의한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벌써 기업들은 코로나 기간의 손해를 회복하기 위해서 구조조정의 칼을 만지기 시작했다.

불평등은 경제와 정치적 결정의 산물이다. 그래서 중요한 게 정치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국내 1, 2위 항공사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합병한다. 이때, 중복되는 인력은 800 – 1,000명 정도 된다고 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당연히 불필요한 인원을 줄여야 한다. 그러나 코로나라는 어려운 상황 속 기업의 횡포라는 비판을 잠재우기 위해서 기업의 총수가 나서서 일자리를 보장하겠다고 선언했다. 아울러 국가도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중복된 인력의 일자리를 보장하고 있다. 좋지 않은 여론의 형성과 국가의 개입으로 과거 같으면 파리 목숨처럼 잘릴 근로자들의 일자리가 보장된 것이다.


밀라노비치는 “불평등은 저절로 감소하지는 않을 것이며, 절대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세계화에 의한 혜택이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을 것”이라면서 “그 대가는 금권정치와 포퓰리즘일 것”이라고 경고한다. 부자들의 경제력에 대립한 나머지 계층을 선동하는 포퓰리즘이 맞불을 놓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존 주디스는 『포퓰리즘의 세계화』에서 2011년 ‘Occupy wall street’을 계기로 정치·경제적 불평등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포퓰리즘의 논리는 필요한 개혁을 거부하는 엘리트에게 맞서는 집합체로서의 집단‘국민’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포퓰리즘의 등장은 세계적 표준 – 민주주의, 자유, 평등 – 이 잘 작동하지 않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쉽게 말해서 수리가 필요한 세상이다.

로버트 라이시는 『자본주의를 구하라』에서 큰 정부와 작은 정부를 구분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정부의 규모와 관계없이 어떤 정부든 부자 편을 들기 때문이다. 수많은 돈 보따리를 들고 로비하는 기업들 앞에서 정부는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밖에 없다. 즉, 금권정치가 표준을 망가트린 것이다.

어떤 정부가 들어서도 부의 편중은 줄어들지 않는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재벌은 어쨌든 살아남는다. 그리고 정부는 대기업의 생존을 위해서 혈세를 퍼붓는다.

국내의 한 조사기관에 따르면, “국민의 의사와 상관없이 소수의 사람이 정부와 정치를 좌우한다.”라는 질문에 85.1%가 ‘그렇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래서 국가가 누구를 위해, 어떤 계층을 위해 정치 하는냐가 중요하다. 부자들의 편에 선다면, 지금과 달라질 게 없다. 가난하고 약자의 편에 서는 정부가 수립돼야 많은 사람이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코로나 시대 기본소득 논의가 잠시 세간에 떠돌았다. 그러나 이뤄지지 못했다. 재원 마련이 어렵다는 의미고, 똑같이 나눠주는 것에 대한 형평성 문제가 불거졌다. 결론은 더 어려운 국민 먼저라는 타당성 있는 논리로 2차 지원금을 집행했다. 완벽한 정책을 실현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사각지대가 많이 발생했다. 특히, 가구별 생계지원은 지원 자체가 복잡해서 노인들은 지원조차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오죽하면 신청자가 너무 적어서 기간을 연장했을 정도다.

기본소득을 실현해도 상관없다. 똑같은 금액을 나줘 주자. 그리고 수입에 따라 과세하면 되지 않을까? 결론은 부자들의 눈치를 보는 정책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금융 위기가 발발한 2008년 다음 해인 2009년에 시카고 대학교의 매튜 보스너가 ‘마가 효과’를 언급한다. 마가 효과는 취약한 경쟁자들을 도와주기 위해 자원을 재분배할 때 생긴다. 마가 효과를 만들기 위해서 개입할 수 있는 주체는 정부밖에 없다.


그래서 정치가 중요하고, 국민이 정치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울러 심도있는 정치적 토론이 가능한 수준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필요에 따라서는 심의(審議) 민주주의 수준으로 다뤄야 한다. 구성원들이 논의할 수 있는 장(場)은 꼭 필요하다. 대화하지 않으면, 서로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발생하는 오해와 갈등은 사회적 자본을 취약하게 만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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