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가난'이라고?
4차 산업혁명은 이해되지 못하고, 오히려 오해만 양산하고 있다. 오해는 잘 못 된 정보로 만들어진다. 오해는 근본적으로 무지에서 생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산속에서 수련하는 고승이라면, 세상 변화의 흐름에 별 영향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혹은, 『자발적 가난』이나 『월든』에서 말하는 것처럼 현대의 발전 속도나 삶의 방식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자발적 가난』에 나오는 몇 가지 문장을 소개해 보겠다.
“탐욕스러운 이기주의를 소멸시키기 위한 첫걸음이 바로 ‘자발적 가난’이다.”
“세상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다른 사람이 열어 주는 차 문으로 타고 내리는 사람과 그 차를 운전하는 사람 이렇게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가지지 못한 자는 비참해하며 부자들은 더 갖지 못해 안달이다.”
알렉산더가 디오게네스에게 요청하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빛을 가리지 않도록 좀 물러서 주시겠소?”
“부를 신이 맡긴 것으로 생각하고, 이를 숙고하고 실현하려고 산다면, 신탁 관리는 달성하기 힘든 것이라고 하더라도 계속 추구한다면, 그것은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이 지구 상에 평등한 세상을 이루는 데 큰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자발적 가난』 중
참 좋은 격언이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한 개인은 가장일 수도 있고, 엄마일 수도 있고, 직장의 구성원일 수도 있다. 혹은 누군가의 부모이면서 연로한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는 자녀일 수도 있다.
대안적인 삶은 극히 소수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리고 그런 삶을 주장한 사람(혜민 스님 등)들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한다. 그러니 대다수 인류가 살아갈 수 있는 보편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소로의 ‘월든’은 숲 속의 호수였고 잠시 머물 수 있었던 도피처였는지는 모르지만, 현대인의 ‘월든’은 고층 빌딩 숲 속의 사무실이거나 수천 세대가 몰려 사는 아파트 단지의 한 공간이다.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이 ‘자발적 가난’을 추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어서 “자발적 가난”을 대안으로 삼기는 어렵다.
제1차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하던 중 인간은 기계와 전쟁을 선포한다. 러다이트 운동이 발생했다. 결론은 주동자들의 처형으로 막을 내렸다.
산업혁명을 통해 과거와 비교할 때, 생각할 수 없을 만큼의 생산이 가능해졌고 엄청난 부가 축적되었다. 그러나 혁신이 주는 선물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 노동자는 착취당하며 일했고, 이들의 비참한 삶을 대변하면서 공산주의가 태동했다. 이제 인류는 자본가와 노동자로 구분돼 지속적인 갈등을 이어갔다.
2차 산업혁명 기간에는 과도한 잉여 생산물을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 다른 국가를 식민지화하다가 결국 강대국끼리 전쟁을 벌였다. 두 차례의 전쟁으로 사상자만 1억 명이 넘는다.
3차 산업혁명은 정보화 혁명이고, 인터넷 혁명이다. 이 기간에 한국은 IMF를 겪었고, 미국을 비롯한 세계는 금융 위기를 겪었다. ‘대마불사’라는 말이 다시 들려오고 정작 위기를 만든 사람들은 멀쩡히 살아가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죽을 만큼 고생한 이들은 조금 모아둔 재산마저도 날려 버려야 했다. 부를 누려볼 기회에서 제외됐다.
이런 현실에 대한 대안이 “자발적 가난”과 “월든”일까? 혼자 사는 독신주의라면 모를까?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부모를 모셔야 하는 사람이라면 꿈같은 이야기다.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다가온다. 동시에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부류가 유리할까? 새로 만들어지는 부의 대부분은 극히 소수가 독점한다. 에어비앤비로 저렴하게 숙박업소를 이용하고, 우버 등으로 저렴하게 택시를 이용한다고 해서 내 삶이 크게 달라지는 게 아니다. 사이비 공유 경제는 과거보다 더 격한 ‘승자독식’ 문제를 낳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파이가 커졌다고 해서 내 몫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충분히 경험했다. 신자유주의 시대가 말했던 ‘낙수 효과’의 결과가 현재이다.
“운 좋게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콩고에서 출생한 이들이 얻는 소득의 93배에 이른다. 지구촌에서 가장 잘 사는 1%는 전체 소득의 29%를 가져가며, 총자산의 46%를 차지한다. 그리고 0.0001%의 부호들이 한국의 4년 치 GDP와 맞먹는 5조 4천억 달러의 자산을 소유한다.” 『왜 우리는 불평등해졌는가?』 중
“실제로 일반 근로자와 CEO의 월급을 비교하면, 1990년에는 70배였는데, 2005년에는 300배까지 늘었다.” 『기계와의 경쟁』 중에서
“연봉 3만 파운드 미만의 사람은 연봉 10만 파운드 이상의 사람과 비교해서 기계에게 일자리를 빼앗길 확률이 5배 이상 높다고 한다.” 『인공지능과 딥러닝』 중
필자가 대학을 다닐 때 『세계화의 덫』이 꽤 많이 읽혔다. 필자는 20:80 파레토 법칙을 이 책을 통해 접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필자가 군대에 있는 동안 『90%가 하류로 전락한다』라는 책이 등장했다. 이제 10:90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1:99라는 숫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급기야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에서는 0.1:99.9가 등장한다.
숫자가 말해주듯이 대부분은 상위층에 속하지 않는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서 상위 1%에 속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대부분은 1%를 위해 살아가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현실을 직시할 수 있고,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변화의 시작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와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웰빙-포용의 시대를 추구해야 한다. 공평한 사회가 바탕이 돼야만 그 이상의 것을 만들 수 있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GDP 2만 5천 달러 이상이 되면 행복은 부와 상관관계가 크게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이미 2만 5천 달러를 넘었으니, 행복과 부의 상관관계가 크지 않을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급격한 성장으로 인한 사회적 아노미 현상 등으로 성장과 비례한 행복조차 누려보지 못했다. 세계적인 자살률이 그 증거다. 그리고 상대적 박탈감이 너무 큰 사회다. 그러다가 현재는 무덤덤하게 이런 사회를 그대로 방관하는 데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