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위한 제언(12)

by 조작가Join

지역 사회 편


플라뇌르에서 앙가주망으로


플라뇌르는 산책자, 산보자라는 의미이다. 미술사에서는 주로 인상파에서 방관자로 표현돼 있다. 방관자가 적극적이면, 관찰자라고 할 수 있다. 어떤 현상을 보되 당사자가 아니라 제3자의 입장에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관찰자이다.

지역 사회에는 많은 외지인이 원치 않는 플라뇌르로 살아가고 있다. 이들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을 때 지역 사회에 시너지 효과가 나올 수 있다.


‘플롸뇌르’에서 ‘앙가주망(engagement)’으로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는 실존주의가 자칫 개인에 함몰될 수 있다는 오해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앙가주망’을 제안한다. 즉, 개인의 소우주에서 사회라는 대우주로의 참여를 선언한 것이다. 실존적 개인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문제에 참여함으로써 적극적인 개인의 실존을 깨달을 수 있다는 의미다.


현대의 문제점을 다룬 많은 자료는 개인주의를 공통적인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는 “개인주의의 성향이 강해질수록 공동체 구조물은 허약해지고, 독재 권력에 취약해진다”라고 말한다.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불평등의 대가』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두 개의 계층이 하나의 경제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서로 알지 못하고, 다른 집단이 어떻게 사는지 상상하지 못하는 이중경제(dual economy)”로 표현했다. 흔히 말하는 ‘금수저’, ‘흙수저’로 나누어진 사회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런 양분화를 해결할 대안으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의 격차를 줄이고, 운명 공동체라는 인식을 함유하며, 기회와 공평성에 대한 사회적 약속이 유지되는 사회” 즉, 공동체를 제시한다. 앞서 말한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도 굳건한 공동체만이 민주주의가 훼손되는 현실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거대한 불평등』에서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불평등을 다시 언급하면서 “불평등은 20세기 자본주의가 낳은 것이 아니라 20세기 민주주의가 낳은 문제라고 하면서, 공정성을 보장하는 경쟁과 평등한 기회의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라고 지적한다. 역시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경제든, 정치든 새로운 공동체 의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대다.


이제 나 혼자 잘 살던 시대는 지나갔다. 거미줄처럼 연결된 현대는 어느 한 곳의 문제가 곧 여러 문제가 되며, 반대로 한 곳의 해결이 나머지 해결책으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사회 참여와 공동체에 관한 관심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2010년 영국의 내각 기구로 설립된 ‘행동 통찰 팀’의 결과를 바탕으로 출간된 『싱크 스몰』에서는 “타인을 위해 사회적 지출을 한 사람이 자신에게 지출한 사람보다 훨씬 행복감을 느꼈다”라고 한다. 그리고 “사회적 관계를 강화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도 행복과 관련 있다”라고 한다. 반면에 “사회적 고립은 매일 15갑의 담배를 피우는 것과 같다”라고 말해서 더불어 사는 세상에 대한 소중함을 강조한다.

사회 참여는 개인에서 공동체 구성원이 된다는 의미다. 그 전환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지역 사회가 새로운 시대 – 4차 산업혁명, 포스트 코로나 시대 - 의 주역이 될 것이다.


지금처럼 외지인이 산책자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들을 지역 사회를 끌어들여서 열린 마음으로 다름을 받아들이고, 다양한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 아울러 새로운 공유경제 시스템을 구축해서 많은 사람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경쟁력 있는 도시로 발전해야 한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 정치가 중요하다


『거대한 불평등』에서는 ‘정치적 권리의 불평등’이 모든 불평등의 원인이라고 보고 있으며, 『전문가의 독재』에서도 “국가권력이 제대로 행사되지 못한 경우에 빈곤이 계속된다”라고 말한다. 즉, 빈곤은 정치적, 경제적 권리의 부재에서 파생하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도 모든 문제의 근원은 정치에 있다고 하면서 정치를 강조한다. 『위대한 퇴보』와 『인플레이션』에서는 인플레이션조차도 분석하면 정치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위의 저작들이 말하는 정치는 무엇인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서 나오는 말이다. 정치에 관련한 명제로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근원적인 정치를 설명한다. 일상적인 생활에서부터 정책을 논의하고 토론하고, 정기적으로 돌아오는 선거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끊임없이 정치 활동을 한다. 그리고 현대 정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와는 달리 모든 사람에게 정치적 권리가 평등하게 주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평등과 거리가 멀다. 『부자들은 왜 민주주의를 사랑하는가』와 『포퓰리즘의 세계화』, 『왜 우리는 불평등해졌는가』에서는 금권정치와 포퓰리즘의 부상을 말하면서, 더는 현대 대의민주주의 제도가 평등을 보장하지 않음을 정치·경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문제점의 핵심은 무엇인가?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과 『전문가의 독재』에서는 정치와 경제, 혹은 국가와 시장은 상보적인 관계인데, 이를 구분해서 별도로 운영했다는 게 큰 실수였다고 주장한다.

이 말은 현재의 경제적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또 한 번 질문해보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치적 방법은 무엇일까?

다시 아리스토텔레스로 돌아가 보자. 그 시절 정치는 폴리스에서 이루어졌다. 많은 저자의 말로 바꿔 보자면, 바로 공동체이다.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이나 『늦어서 고마워』 등에서 언급한 정치적 해결 방법은 바로 공동체였다. 『위대한 퇴보』에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시민단체의 역할을 언급하기도 한다. 왜 공동체가 해법인가? 공동체는 소통과 합의, 협력과 공존이 가능하다. 따라서 소통, 토론, 합의 등을 통해서 상황을 조정할 수 있다.


선형 인간, 지수 과학 기술


현대인의 인지능력으로는 사회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는 인지 부조화 시대를 살고 있다. 『유리 감옥』에서는 “컴퓨터는 무어의 법칙대로 빨리 발전하는 데 비해, 인간은 거북이처럼 느리게 기어가고 있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선형의 세계를 사는데, 기술은 ‘지수 곡선’을 그린다. 그러니 당연히 인간의 머리가 과학 기술의 발전을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급속도로 빨리 발전하는 시대에는 빠른 도덕적, 사회적 혁신도 필요한데, 그렇지 못하다.

기술은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기술은 이제 인간을 통제하고 지배한다. 조지 오웰은 『1984』에서 ‘빅브라더’의 출현을 예견했다. 그리고 빅브라더의 빈틈없는 감시와 통제가 인간의 자유를 통제할 것이라고 했다. 그의 예지능력은 탁월했다. 『늦어서 고마워』에서는 “현재 관리 책임의 주체는 사람도, 윤리도, 신도 아닌 알고리즘”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로봇의 부상』에서도 “빅데이터, 스마트 알고리즘의 활용은 대기업이 사회적 관계에 관한 정보와 통계를 대량으로 추적할 수 있게 하면서 각 영역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라고 말한다. 『Life 3.0』에서는 “사회가 지혜를 얻는 것보다 과학이 지식을 모으는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 가장 슬픈 것”이라고 말한다.

즉, 인간을 위해서 만든 기술이 오히려 인간을 통제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좀 더 깊이 현 상황을 살펴보면 ‘빅브라더’도 존재하지만, ‘리틀 피플’이 존재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1Q84』에서 인간의 내부에 침투해서 인간을 조종하는 ‘리틀 피플’을 가공해 낸다.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은 오히려 인간을 첨예하게 분석해서 인간을 분석한 대로 움직이게 한다. 정확한 예측으로 예언자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기업들은 사람들의 두뇌를 스캔하고, 무의식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두려움과 희망, 취약점과 욕망을 발견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남기는 디지털 발자국을 면밀히 추적한다. 그래서 브랜드워시(brandwash)(브랜드나 기업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식을 완전히 새롭게 창조하려는 시도) 해 버린다.


심리학과 경제학을 적절하게 융합해서 수립한 행동경제학도 인간의 심리를 이용해서 『넛지』를 창안했다. ‘자유주의적 개입주의’라는 모순적인 표현을 옹호하면서 인간이 시스템 속에서 조종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종합해 볼 때 새로운 시대는 기술로 인간의 내외부를 통제하고 조종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사회에서 과연 인간은 주체적으로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에서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대개 현시점의 이데올로기와 사회 시스템에 얽매여 있다”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빠르게 발전한 과학 기술에 적응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 힘들다고 주장한다. 그런데도 그의 전작『사피엔스』에서는 인류 발전에 기여한 3대 혁명 중 하나로 과학혁명을 꼽고 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양면적인 성격이 있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기술이 베풀어주는 이기(利器)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 레이 커즈와일 처럼 기술을 무한히 신뢰하면서 특이점이 도래하기를 고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특이점 시대의 인간은 포스트 휴먼(posthuman 유전공학의 발달로 변화한 인간형), 트랜스 휴먼(transhuman 기술을 통해서 지적, 육체적 능력이 진화한 인 간으로 포스트 휴먼으로 가는 중간 단계)이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우리는 부정적 시각화(negative visualization 부정적 시각화는 스토아 철학에서 유래한 것인데, 중대 한 결정 앞에서 앞으로 벌어지게 될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 보는 것을 말한다)를 떠올리고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거대한 혁명과 혁신 시대의 파고가 언제 몰아칠지 모르는 폭풍전야에 파편화 된 개인은 폭풍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니얼 퍼거슨은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인터넷 네트워크가 전통적인 사회생활을 대체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지적한다.

조각들을 모아서 하나로 연결해 큰 뗏목을 만들어야 거대한 풍랑을 극복할 수 있다. 뗏목을 위해서는 각자가 주체로서 살 수 있는 기본적인 토대가 필요하다.


과학 기술은 구정치를 무너뜨렸다. 그래서 새로운 정치가 필요하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했던 시대에는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이 개인의 자유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개인은 주체성을 상실했다. 조종되는 개인이다.

이런 개인은 공동체 속에서만 보호받을 수 있고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유리 감옥』에서는 현대 자동화를 인간의 존재 문제와 연결했다. 노동자들이 기계를 섬기고, 기계적 움직임에 맞춰 몸의 리듬을 맞추기를 요구받는 상황을 보면서 저자는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아렌트는 노동, 작업, 행위를 철학적으로 해석하면서, 위 세 가지가 인간다움을 규정짓는 조건이라고 말한다)에서 말하는 노동을 떠올린다.

현재는 인간이 인간임을 포기하고 기계를 위한 로봇이 됐다(1920년도에 SF 소설 작가가 처음으로 만들어낸 단어인 ‘로봇’은 ‘노예 상태’를 뜻하는 체코어 로보타(robota)에서 기원됐다). 주객전도 현상이 현재 계속 진행 중이다.


기술은 완벽하지 않다. 대다수 알고리즘 학자들은 알고리즘의 한계를 인정한다. 그래서 알고리즘은 결정을 내리는 데 사용하지 말고, 좋은 방법을 찾는 데 활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클라우드와 빅데이터의 정치경제학』에서도 정치학적 논의 과정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빅데이터의 한계를 지적한다.

새로운 시대의 핵심 기술은 장·단점이 존재한다. 그 사용을 결정할 주체는 인간이다. 결정의 유효성은 소통, 토론, 그리고 각기 다른 의견 사이의 긴장을 현명하게 풀어가는 지혜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금융거래 속도를 1,000분의 52초만큼 단축하기 위해 수억 달러의 돈을 사용할 것인지, 아니면 빈곤계층의 기본소득으로 제공할 것인지에 관한 결정은 인간만이 할 수 있다. 그리고 결정의 명분과 타당성은 잘 조성한 공동체에 달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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