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4차 산업혁명과 자치분권 시대』를 출간하기 전에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한 인지 수준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경험을 위의 책에 여과 없이 반영했다. 수많은 보도, 그리고 하루에도 한 권 이상씩 출간되는 책, 공공기관에서의 홍보 등 온 천지가 4차 산업혁명을 선전하고 있었지만, 4차 산업혁명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현재 진행이다(종종 지방 방송국 뉴스를 시청할 때가 있는 데 종종 “4차 산업혁명” 대신 “4차 산업”이라 표현하고, 거리 홍보물 등에도 여전히 틀린 용어가 버젓이 적혀있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가정에서는 어떨까?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준비가 돼 있을까? 대부분은 그저 시간이 흘러가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듯하다. 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해서 특별하게 준비하고 있는 개인은 별로 없다. 학부모도 여전히 수능시험에 맞춰서 자녀들을 열심히 학원에 보내고, 새로운 과목이 생기고 교육제도가 변화하면 역시 진화한 사교육에 자녀들을 맡긴다.
가정과 비교할 때, 교회는 더 취약하다. 근본적으로 종교와 4차 산업혁명은 대립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와 같은 생각은 편견이라고 말했고, 오히려 3차 산업혁명 시대에 뒤처진 교회 상황을 발전적으로 반등할 기회라고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대와 관련한 학습을 진행해야 한다. 그래야만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교회가 정치, 경제, 문화, 사회(지역사회 등) 등에서 긍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디지털 학습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즉 디지털화다. 아날로그가 중심이었던 시대에서 이제 디지털이 중심인 사회로 바뀌었다. 물론, 디지털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는 없다. 그래서 ‘디지로그’라는 표현이 있고, 아날로그를 추종하는 부류도 여전히 존재한다. ‘리트로’라는 말이 그 예이다. 그러나 디지털화는 대세이며, 거스를 수 있는 개인이나 공동체는 있을 수 없다. 적어도 인터넷을 사용한다면, 디지털은 현대인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간혹, 급격한 변화가 아니면 변화가 아니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다들 혁신적인 기기라고 여기는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도 “스마트폰이 내 삶을 변화시킨 게 별로 없는데?”라고 반문하기도 한다. 물론, 삶의 변화를 크게 느끼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도 그럴까? 스마트폰이 기존의 핸드폰을 대체하면서 현대인은 스마트폰을 가장 소중한 분신 물처럼 지니고 다닌다. 일상 속에서 스마트폰은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놓여있고, 잠을 잘 때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가족들마저도 스마트폰과 비교한다면, 더 멀리 있는 존재가 된다.
간단한 e-mail을 확인하고, SNS로 다양한 사람과 의사소통한다. 국내를 기준으로 2009년부터 시작된 일이다(2007년에 아이폰이 출시됐는데, 당시 국내 시장을 보호하기 위해서 아이폰을 수입하지 않았다). 그리고 채 10년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스마트폰은 가장 중요한 필수품이 됐다. 삶에 영향을 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영향을 인식할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럽게 우리 삶에 침투한 것이다. 스마트폰은 디지털 시대의 적합한 기기다.
그래서 디지털 학습이 중요하다. 노령층은 디지털 세대가 아니기에 무관심할 수도 있고, “이제 무슨, 디지털 학습이야?”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현재, 70세라고 할지라도 30년을 더 살아야 한다. 런던 경영대학원(런던 비즈니스 스쿨) 교수이자 인재론, 조직론의 세계적 권위자인 린다 그래튼 Lynda Gratton의 『100세 인생』에서는 교육, 일, 퇴직으로 구분된 3단계 시대가 저물고 4단계, 5단계에 이르는 다단계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런 상황에서 노후가 잘 준비돼 있다면, 다행이지만(그렇다 하더라도 더 윤택한 노후를 위해서 필수적인 디지털 기기 사용은 필수다)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디지털 네이티브라고 할지라도 학습이 필요하다. 앞에서 계속 지적했듯이 다양한 디지털 기기를 사용한다고 해서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수준에 맞는 디지털령을 적용해서 학습할 수 있는 공동체를 조성해야 한다.
디지털령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대부분 국가가 연령을 중심으로 사회가 조직돼 있다. 교육제도만 하더라도 유급제도가 있는 국가도 있지만, 대부분 진급은 연령에 따라 이뤄진다. 공무원 조직도 근무 기간에 따라 진급한다. 기업은 성과를 중요시한다고 하지만, 일정 직급까지는 근무 기간이 승진에 영향을 미친다.
교육과 관련한 대안적인 표현으로 최근에 ‘학령’이 제시됐다. 학령은 피교육자의 학습 수준에 따라 상급 학년으로 진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나이가 기준이 아니라 학습 성취가 기준이어서 대안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물론, 빠른 진급을 위해 사교육이 더 활성화될 수도 있다).
학령과 마찬가지로 디지털 학습도 연령으로 구분하는 게 아니라, 디지털 기기를 다룰 수 있는 수준으로 학습 반을 조성해야 한다. 기초적인 스마트폰 기능조차도 활용할 수 없는 구성원들에게 창의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하라는 요구는 걷지도 못하는 아이한테 뛰기를 원하는 꼴이다. 반대로 디지털 기기를 원활하게 활용하는 구성원들에게 기본적인 수준만을 학습하게 하는 것도 시간과 재능 낭비이다. 이들은 생산적인 디지털 문화를 조성할 수 있는 자원으로 활용해야 한다.
교회는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예배 후에 매주 1시간 정도 혹은, 특별활동반을 편성해서 디지털 학습을 권장할 수 있다. 처음에는 서로 다른 디지털령이 섞여서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다. 그러나 일정 기간 지나면 수준별로 정리될 것이다. 디지털 문외한들은 디지털 격차를 줄일 기회가 되고, 수준이 있는 구성원들은 디지털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전환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학부모 모임
학교에서는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는데(학부모들은 대부분 수동적인 참여자로 참석한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다. 매년 진급되는 교회학교 학생들이 있고, 커리큘럼을 공개한다. 대부분 교역자가 계획하는 것이어서 부모들은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부모들의 역할이 별로 필요 없었다. 왜냐하면, 사회 변화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는 그렇지 않다. 변화의 정도도 크지만, 아이들이 모니터 앞에서 검색할 수 있는 수준이 되면, 과거에 실시했던 공과 공부 수준은 유치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학부모와 교역자들이 함께 모여서 변화하는 시대에 맞는 커리큘럼을 공동으로 제작해야 한다. 초대형 교회 경우 대표단을 구성해야겠지만, 대부분 교회는 부서별로 커리큘럼을 작성하면 된다. 그리고 커리큘럼은 매년 갱신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만큼 시대 변화가 크기 때문이다. 교역자의 역할은 성경의 보편적인 해석 문제에 대해서 조언해 주고, 대부분의 계획은 학부모들이 짜야한다. 그래야만 능동적인 커리큘럼이 될 수 있으며, 교회 공동체를 조성할 수 있다(교역자들의 이동이 일반 성도와 비교할 때 빈번하다는 걸 고려할 때, 학부모들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역(逆) 간증
교회는 세상을 잘 안다고 착각한다. 교회가 얼마나 세상을 알고 있을까? 초대형 교회 문제가 전체 개신교 이미지를 좋지 않게 하고 유사 기독교가 선전하는 비합리적인 신앙적 메시지와 행위는 기독교를 오해하게 만든다. 교회는 현대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코로나 시대의 환자 중 많은 부분은 개신교에서 나왔다는 게 하나의 예이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돼라!”는 말씀은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미개척지에 도달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새롭게 형성된 다양한 세대에는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오해는 풀어서 이해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불신자들과 대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예전 방식대로 노방 전도하고, 초청 주일을 정해서 믿지 않는 사람을 잠시 교회에 불러올 뿐이다.
과거 한국에 기독교가 도입됐을 때 선교사들은 한국의 현실을 알았다. 식민지 백성의 고통을 비롯한 당시 민중이 필요한 것을 알았다. 현세의 억압에서 잠시나마 자유롭게 해 주었고, 탄식에 대해서는 위로해주었다. 가끔은 떡으로 주린 배를 채우게도 해줬다. 평양 부흥 이전에 전쟁으로 생사기로에 놓인 민중이 찾은 곳이 교회였다는 사실은 당시 교회가 보호처가 돼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방 후, 그리고 산업화 시기를 거치면서 교회는 부흥했고, 수많은 간증이 난무했다. 대부분은 하나님의 은혜로 성공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교회에 가면 구직할 수도 있었고, 좋은 인맥을 쌓을 수도 있었다(이 부분은 여전히 유효하다). 세상이 필요한 것을 교회는 알았고, 제공할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교회는 세상과 동떨어지기 시작했고, 고루해 보였다. 그 결과 오해와 편견, 비판 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그 대응마저 변변치 못했다. 그 결과 종교기관으로서 마땅히 견지해야 할 도덕성마저도 잃어버린 듯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는 어찌해야 할까? 답은 간단하다. 다시 세상으로 들어가야 한다. 모든 교회에서는 여전히 간증 시간이 있다. 간증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경험한 교인이 다른 교인들에게 경험을 나누는 것이다. 간증은 성장 시대에 좋은 촉매제로 작용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즉, 역(逆) 간증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특별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도 좋지만, 이제는 왜 그 은혜를 거부하는지에 대한 세상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교회는 말하기는 좋아하지만, 듣지는 못한다. 예수의 복음도 듣지 못하는 당시 종교인에게는 저주일 뿐이었다. 전도, 포교, 설교, 교육, 가르침 등 대부분이 화자의 입장이다.
그러나 성경은 화자와 수신자의 입장을 균형 있게 견지하고 있다. 구약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 아브라함, 모세, 다윗의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부분 수신자로서 듣고, 전달하고 있으며, 주변 인물들과의 갈등 구조 속에서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는 모습을 보여준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가르치고, 선교하고, 고치는 역할을 주로 했지만, 가르치기 위해서 사람들과 대화했고, 선교를 위해서도 지역 수준을 잘 파악했다. 치유하는 데도 단순히 병을 고치는 수준이 아니라, 환자의 과거 등을 철저히 분석하고 이야기함으로써 영혼과 육신을 치료하셨다.
교회는 세상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따라서 역간증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세상에서 겪은 힘들었던 경험, 왜 세상이 기독교를 불신하는지에 대한 경험을 충분히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새로운 시대에 교회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건 환상에 불과하다. 특히, 지금과 같이 어리석은 방법으로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서는 안 된다. 세상의 이야기를 듣고, 교회의 기준을 바꿔야 한다.
우리만 아는 이야기를 하고 구별된 자라는 착각으로 행복해하지 말고, 현실을 제대로 파악해서 시대에 맞는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