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위한 제언(25)

노령층을 활용하자

by 조작가Join


한국 교회 편(최종회)


노령층을 활용하자


2018년 지방선거가 치러지기 전, 거리에는 어르신들에게 최대 25만 원까지 노령연금 지원과 관련한 현수막이 설치돼 있었다. 최근 뉴스를 보면, 노령층 고용이 여느 때보다 활발하다. 노령층을 대우하는 건 기본적으로 옳다. 그러나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미래 공무원이나 교사를 꿈꾸는 상황에서 생색내기 노령층 고용 확대라는 선심성 정책이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


노인 인구가 증가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청년층과 장년층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유권자 연령층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은 당선을 위해서 노인 유권자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 미래 주인공은 청소년들이라는 물린 구호는 선거 기간에는 무용지물이다. 왜냐하면, 청소년들에게는 투표권이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도시 중에서 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곳이 두 군데 있다. 65세 기준으로 전체 인구의 16%를 넘는 부산과 14%를 넘는 대구다. 도시에는 주로 청년들이 모일 거로 생각한다면, 대한민국 제2의 도시와 제3의 도시가 고령화 사회가 됐음은 한국 고령화가 심각하다는 증거다.


『인구 100억』에서는 경제성장을 이룬 국가들 대부분이 출산율이 낮다는 것을 지적한다. 미국과 같이 이민에 개방적이지 않다면 노인 인구가 증가할 수밖에 없다(동시에 사회가 평등할수록 출산율이 낮고, 인구 증가가 더디다고 한다. 한국 사회에는 크게 적용되지 않는 분석일 수도 있다). 한국 사회는 ‘한민족’이라는 피의 사슬에 꽁꽁 묶여있다. 실제로 단군의 핏줄을 제대로 계승한 사람은 거의 없는데, 혈연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정식으로 한국 국적을 취득한 피부색 다른 한국인보다도 70년 넘게 만나지 못한 북한 동포들을 더 가깝게 여긴다(통일에 대한 염원과 바람에 대해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필자는 통일 시민운동을 했고, 통일에 관심이 많은 국민이다). 최근에 나온 언론 보도를 봐도 외국인 근로자나 난민들에 대한 시각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늘어나는 노령층과 줄어드는 청년층의 비율은 쉽게 역전되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노령층을 활용하는 방법뿐이다. 국가에서는 25만 원 지원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노후(老後) 준비가 안 된 국민을 위한 대책 마련에 힘쓰고 있다. 하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봐도 노후를 원만하게 책임지는 국가는 북유럽의 몇 국가를 제외하면 없다.


GDP 수준을 고려할 때 북유럽 국가는 최소 우리나라의 2배가 넘는다. 성장의 정체기에서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국가가 국민의 노후를 걱정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고 당연한 일이지만, 현실을 고려했을 때 국가의 실행을 바라는 건 망상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선전하는 정부는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 선동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노령층 인구를 생산 노동자층에서 제외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들이 계속 일할 수 있도록 제도적 개선과 현실적 논의가 필요하다.

새로운 시대에는(현재도 마찬가지다) 노인의 정의도 새로워야 한다. 과거 예순이라는 나이는 이순(耳順)이라 했고, 오래 살았음을 축하하기 위해서 환갑잔치를 성대하게 열었다. 그러나 요즘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면, 육십이라는 나이는 노인 축에 들지 못한다. 노약자를 배려해서 마련된 좌석에 앉아있는 노인들의 연세는 대충 추측해 봐도 일흔을 훨씬 넘어 보인다.

강변을 따라 자전거 타는 라이더를 봐도 육십은 훨씬 넘긴 어르신들이다. 나이를 무색하게 가볍게 ‘라이딩’을 즐기신다. 나이로 따지면, 노령층이지만 신체적 나이는 노인이 아니다. 젊은 시절, 자산관리를 잘해서 은퇴 이후 노후 대책이 잘 마련된 노령층이라면 문제없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노인들은 생활고가 심각한 수준이다(서울 종로 일대를 가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들은 허드렛일조차 구하기 힘들다. 일용직 노동자도 만 65세가 넘으면 고용될 수 없고, 편의점 등 간단한 아르바이트들도 청년들을 우대하기 마련이다. 심신이 모두 건강해도 일정 연령에 도달하면, 생산 근로로 참여하기 어렵다.


과거에는 노인의 지혜와 가르침을 귀하게 여겼었지만, 현대는 새로운 기술 발달을 따라가지 못하는 노인은 대우 받기 힘들다. 오히려 후세대들과 세대 차이만 벌어지고 있다.

새로운 기기를 잘 다루지만,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는 청년들과 새로운 기기의 기본적인 프로그램도 다루지 못하는 세대 차이는 디지털 격차뿐만 아니라, 사고방식도 더 다르게 만들었다. 사회는 세대를 구분하고 그 차이를 인정한다. 단순히 세대 간 갈등을 막고자 한 미봉책이었기에 현재는 새로운 차별로 전개되는 상황이다.

이제 노인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젊은 시절 성실히 일한 결과물을 무덤에 안치될 때까지 여유 있게 사용하면서, 생을 마감할 수 있는 노인은 많지 않다. 그렇다면 노인들도 꾸준히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최근에 노인들을 위한 일자리가 많이 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수준에서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한계가 있다. 민간 부분에서 일자리 창출이 없으면 실질적인 해결방법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교회가 나서야 한다.


교회의 연령분포는 앞에서 지적했다. 사회의 고령화와 비교했을 때 더 심각한 상황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연령층 역시 고령층이다. 교회 출석률도 높고, 은퇴한 성도들이라 하더라도 헌금 생활을 꾸준히 한다. 하지만,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는 성도는 제한적일 것이다.

역설적으로 교회는 가난한 자들을 도와야 하는 사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자들에게도 헌금을 받는다. 강제적인 것도 아니고 헌금액이 크지 않더라도 불신자들이 볼 때 쉽게 납득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생활고에 허덕이는 노인들이 늘어나는 현실을 고려할 때 현재 교회의 모습은 구태의연(舊態依然) 하다.


위에서 공유경제로 발생한 수익을 기본소득으로 돌려주자는 주장을 했다. 노인들이 1순위 대상이어야 한다. 국가에서 지급하는 수준 이상으로 교회에서 지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 경제활동에 노인 성도를 적극적으로 참여시켜야 한다. 기본적인 디지털 교육으로 디지털 격차도 줄이고, 활동이 어렵지 않은 성도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공동체가 중요하다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는 다양한 의미로 번역된다. 협동, 교회, 교제, 교회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공동체’는 새로운 시대의 대안이다. 사회와 관련한 대부분 저서는 현재 문제 해결 방안으로 공동체를 제시한다. 교육, 문화, 정치, 사회 등 모두 공동체를 강조한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다. 공동체는 ‘집단’이 아니다. 다수의 횡포로 인해 소수가 불이익을 당해서도 안 되며, 공동체 이익을 강요해서 역시 소수의 의견을 무시해도 안 된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공동체가 아니다. “한 몸”, “지체”라는 성경적 표현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는 공동체 내의 갈등을 인정한다. 다시 말해서 서로 다른 의견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동체는 존중에서 더 나아간다. 단순한 의견 존중은 서로에 대한 전투 의지는 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 됨’으로 발전하지는 못한다. ‘똘레랑스’가 종교전쟁을 막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을 하나로 화합하게 한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코이노니아’는 바로 다른 사람들과 협력해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현실 교회의 모습은 교회 건물은 하나일지라도 계층이 다르다. 조직은 피라미드형이며, 회의는 반 폐쇄적이다. 사실, 공개를 요구하는 성도도 별로 없다. ‘좋은 게 좋은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무관심하게 ‘한 시간’ 크리스천으로 살아간다. 이런 상태로 공동체를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며, 수주대토(守株待兎)와 같은 어리석은 바람이라고 할 수 있다.

공유경제 활동은 교회 청년들과 노령층들을 어우러지게 함으로써 세대 간의 갈등과 차이도 어느 정도 해소할 방법이 될 수 있다. 물론, 처음부터 잘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모든 연령층이 연합하여 참여할 수 있도록 권유해야 한다. 인간의 인지능력을 넘어선 과학 기술 발달의 충격으로 인한 ‘아노미’를 해결할 방법은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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