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으로 보는 세상"(4)

보물을 찾을 때이다

by 조작가Join

『숨그네』 하(下) 편 헤르타 뮐러(Herta Muller) (200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너는 돌아올 거야!”


주인공이 수용소로 떠날 때 할머니가 해준 말이다. 이 말은 주인공에게는 부적같이 되새겼던 말이다.


너는 돌아올 거야는 심장삽의 공범이 되었고. 배고픈 천사의 적수가 되었다. 돌아왔으므로 나는 말할 수 있다. 어떤 말은 사람은 살리기도 한다. 『본문』 중


수용소로 떠난 주인공은 당연히 5년 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집, 가족, 그리고 익숙하고 안락한 환경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5년 후 그는 할머니의 예언처럼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온 집은 5년 전이 아니었고 5년 전 환경이 아니었다. 돌아온 그는 이제 다시 수용소로 돌아가고 싶었다. “너는 돌아올 거야!”는 이제 수용소가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된다. 그는 “배고픔의 천사”를 떠올리고, “숨그네”를 잊을 수가 없다. 성 정체성마저도 누르고 결혼했지만, 결국 그는 아내를 떠나야만 했다.

이제 평범한 생활이 그에게 수용소가 된다. 육체적 수용소를 벗어나니 정신적 수용소가 있다. 그는 이런 수용소에서 빠져나가고 싶다. 그러나 그가 원래 존재했던 곳은 어디였을까? 근원지를 알아야 돌아갈 곳이 있는 것 아닐까?


나는 육십 년 동안 밤마다 수용소 물건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보려 한다. 물건들은 나의 밤 트렁크에 들어 있다. 수용소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로 잠 못 드는 밤은 검은 가죽 트렁크다. 트렁크는 내 이마 안쪽에 들어 있다. 육십 년 동안, 그 물건들을 기억하느라 잠들지 못하는 것인지 그 반대인지 나는 모르겠다. 어차피 잠이 오지 않으니 물건들과 옥신각신하는 것인지. 어찌 됐든 밤은 내 의지와 관계없이 검은 드렁크를 꾸린다. 『본문』 중


돌아왔지만, 그가 돌아올 곳이 아니었던가? 단순히 전후의 아노미 현상으로 이해하면 될까? 그렇다면 시간을 현재로 옮겨보자.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개인의 삶은 개인이 책임질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개인은 태어난 곳에서 살기 시작한다. 선진국에서 태어날 수도 있고, 야만 부족의 한 아이로 태어날 수도 있다. 그리고 부자로 태어날 수도 있고,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날 수도 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태어날 수 없다. 그리고 타인보다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행복하다고 할 수도 없다. 그리고 세상에 나오는 일에는 누구의 책임도 없다. 그래서 책임질 수도 없다. 부모가 자녀의 삶을 책임 질까? 그렇지 않다. 보호자 역할은 한정돼 있다. 오히려 말년에는 자녀가 부모의 보호자가 된다. 인간의 삶은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국가조차도 국민에 대해서 책임지지 못한다. 위기 상황에서 조국을 지킨 것은 국가가 아니었다.


누구도 책임이 없었기에 아무도 책임을 질 수 없었다. 『본문』 중


결국, 숨을 헐떡이면서 살아야 하는 건 모든 인간이 똑같다. 세계 최고의 권력자 트럼프도 4년이 지난 지금 황금색 머리를 백발로 바꿔야 할 만큼 답답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세계 최고의 권력자인 그조차도 원하는 대로 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전 세계가 ‘코로나 19’로 하루에도 수천 명 이상 원치 않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원치 않게 감염된다. 빨리 종식시키고 싶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수용소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 사방이 막혀있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잘 모른다.

여전히 세상은 수초마다 “배고픈 천사”가 이끄는 죽음을 맞이하는 세상이며, 육체의 만족을 위해서 성폭력을 행사하고 마약을 몸에 침투시키는 세상이다. 그리고 죽으면 모두 내려놓아야 하는 부와 권력을 추구하느라 끊임없이 경쟁한다. 이런 세상이 자유롭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또다시 강제추방을 당한다면. 나는 알아야 했다. 어떤 처음들은 내가 원치 않아도 다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그 이어짐 속으로 나를 밀어 넣는 것은 무엇일까. 왜 나는 밤이면 다시 처참해질 권리를 가지려는 것일까. 왜 나는 자유로워질 수 없을까. 어째서 나는 수용소가 내 것이기를 강요할까. 『본문』 중


그런데, 더 답답한 것은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을 모른다는 점이다.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유토피아’를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이다.

이상적으로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지만, 그 평등과 자유로움에 대한 원칙도 정해지지 않았다. 개인이 존재하지만, 이미 개인을 통제하는 ‘우리’가 존재하고 공동체를 강조하지만, 편린(片鱗)화 된 ‘개인’이 공동체를 반대한다. 성경의 아담과 이브가 살았던 ‘에덴’이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에덴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도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레오 톨스토이가 말하는 『바보 이반』에 나오는 세상도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은 아니다.

수용소는 마음속의 소망을 박탈했다. 누구든 결정할 필요도, 결정한 의지도 없었다.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기억이 그 바람을 뒤로 미루어두었다. 감히 그리움을 앞세울 수 없었다. 『본문』 중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이라는 수용소는 그런 상상을 막는다. 아무리 소망해도 이뤄지지 않으니 수용소에서는 소망을 스스로 박탈할 수밖에 없다.

‘레트로’ 열풍이 한창이었다. 그러나 문화적인 유행이지, 인간은 과거로 회귀하길 원하지 않는다. 오직 앞으로 나아가려고만 한다. 그래서 '뉴트로'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그렇게 해서 돌아갈 길을 스스로 막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는 게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걷다가 잠시 멈추는 것조차도 어려워하는 현대인들이 지나온 길을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무엇도 나와는 상관이 없었다. 나는 내 안에 갇혀 있었고 나에게서 내동댕이쳐졌다. 나는 그것들에 속하지 않았고, 그것들은 내게서 멀어져 갔다. 『본문』 중


그렇다고 해서 돌아갈 곳을 생각해 보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앞으로 살아야 할 길을 잠시 가만히 서서 생각해 보자는 의미다.


작은 보물은 나 여기 있다고 적힌 것들이야. 그것보다 조금 큰 보물은 아직 기억나니라고 적힌 것들이고. 그러나 무엇보다 큰 보물은 나 거기 있었다고 적힌 것들이지 『본문』 중


이제 보물을 찾으러 떠나야 할 때이다. 단, 찾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좋은 아빠! 그냥 아빠?(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