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군대(2)
그렇게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국가 부도라는 초유의 사태는 그럭저럭 극복했다는 평가는 있었다. 개인의 지갑은 다양한 신용카드로 가득 찼고, 그것도 모자라서 거리마다 카드 회원을 모집하기 위한 경쟁이 대단했다.
“가입하시면 바로 현금으로 4만 원 드립니다.”
그리고 며칠 지나면 5만 원 준다는 호객행위도 있었다. 가입 대상의 조건이 성인이면 됐기 때문에 대학교 앞에는 항상 각 은행과 연결된 아주머니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그들의 상술에 넘어가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뛰는 아주머니 위에 나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들은 현금을 챙기고 카드가 발급돼 도착하면 바로 잘라 버렸다.
카드는 현명하게 사용하면 여러 가지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갓 스물을 넘긴 학생들이 현명한 소비를 한다는 게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아르바이트 열심히 해서 한 달에 30만 원 버는 게 고작인데, 카드값이 그 이상 나오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여러 카드로 돌려막기 하다 보면 빚은 감당할 수 없게 불어나서 결국 부모님께 손을 내밀기 마련이었다. 국가 부도 사태는 막았을지 몰라도 개인파산은 여전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당시 여당에서는 대통령의 카리스마를 넘어설 인물이 등장하지 않았다. 5년 전부터 대통령은 야당 후보가 될 것이라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여당에서 강력한 후보가 등장하지 못한다면 여당의 프리미엄은 사용하지 못할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모종의 합의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과거 여당에서 독립해 현 정권 수립에 본의 아니게 1등 공신이 된 후보가 여당에 입당해서 대통령 후보 1순위가 돼 있었다. 사실, 지난 대선에 3위를 했으니 야당 후보와 경합할만한 후보로는 제격이었다. 어차피 정치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의리 따위는 아무 소용없는 것이니 그가 탈당했다고 해서 욕할 사람도 없으며, 기회를 노려서 여당에 입당했다고 해서 탓할 사람도 없었다.
떠도는 소문에는 지난 대통령과 현 대통령의 합의가 있었고, 그래서 전 대통령이 탈당을 권유하고 대선에 나가도록 부추겼다는 소문도 떠돌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당시 야당의 후보였던 현 대통령은 본인의 숙원이었던 대통령에 당선됐고, 전 대통령의 허물을 최대한 덮어 줬던 것이다. 물론, 탈당한 후보에게도 대가를 줘야 했으니 그게 바로 다음 대권 후보였다.
‘나도 한 번 대통령 해보자. 지난 선거에는 충분히 가능성을 보여줬으니, 이번에는 대권을 잡을 때가 됐다.’
그러나 세상일은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닌 듯하다. 최초로 국민 참여 경선으로 후보를 추대하려 했기 때문에 여당은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경선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2002년은 대한민국 월드컵 4강만큼이나 놀라운 일이 정치권에서 이뤄졌다. 여당에서도 비주류에 속했던 한 후보의 돌풍이 연이어 일어났다. 모두 잠시 이는 돌풍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바람은 멈추지 않았고, 줄어들지도 않았다. 바람을 소멸시키기 위해서 온갖 인신공격을 동원했지만 바람은 장애물을 정직하게 극복하고 이제 태풍급으로 커 버렸다. 그리고 경선이 끝났을 무렵에는 그렇게 외롭고 서민 냄새가 지독한 후보가 초기의 부침을 뚫고 당당히 선두에 설 수 있었다.
그리고 5년 전의 패배를 경험했지만 이후 압도적인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지를 받았던 야당 후보가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건 개나 소나 대통령 한다고 나서고 있으니 뭐야? 저기 축구 좀 하게 해 줬다고 대통령 한다고 나오는 건 뭐냐고?”
월드컵 유치에 성공한 재벌 2세도 대선에 뛰어든다고 선언했다. 한일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의 성적이 저조했다면, 몰랐을까? 4강 기적을 이루다 보니, 정 총재의 지지율이 느닷없이 수직상승한 게 원인이었다. 그리고 여론은 신나게 3파 전을 조사했다. 3파 전일 경우 무조건 야당 후보의 당선이 확실시됐다.
“우리 쪽에 유리할 일이 아닙니다. 정 총재 성향이 명확하지 않지만, 야당에 유리한 상황으로 흘러가는 듯합니다.”
“음. 그러게요. 재벌인데도 이상하게 야당 표를 잠식하지 않으니….”
이미 여유롭게 선두에서 달리는 야당 후보였지만, 5년 전 악몽은 트라우마가 돼 만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 총재의 출신을 생각하면, 본인에게 유리할 거 같지 않았다.
“이거 이러다가 지난 선거 꼴 되는 거 아닌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론 조사 격차가 크고, 저 둘이 단합하지 않는 한 후보님을 추월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여당 후보도 돛을 달고 순풍을 받아 목적지로 향하고 있었지만, 야당 후보의 관록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지는 좋았지만, 정치적 권력의 비주류에 머물렀던 인물에 대한 평가는 당내에서도 좋지 않았고, 선거 승리에 대한 의구심을 쉽게 지울 수 없었다.
“정 총재와 단합을 생각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쪽에서 우리와 단합을 원할까?”
“사업가 아닙니까? 정 총재도 지금 상황에서는 당선되기 힘들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가 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렇긴 하지만, 여론 조사로 결정한다면 우리에게 승산이 있습니다. 아무리 인기가 높아졌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정치적 동원력이 있습니다.”
“하기야 그렇겠군.”
“하지만, 야당 쪽 반발이 만만치 않을 텐데.”
“후보님 아직은 우리가 여당입니다. 그리고 대통령께서도 우리를 위해서 한 번 정도는 힘써 주실 것입니다.”
“알겠네.”
지난 선거에서도 어울리지 않는 정치 세력의 결탁이 있었다. 그런 어색한 결탁은 처음이 힘든 법이지 이후부터는 당연시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여당의 생각대로 정 총재도 통합 제안을 받아들였다.
“우리에게 통합 제안을?”
“네. 그렇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차피 현재 지지율을 고려했을 때 이 상태로 나가면 야당 후보가 당선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 단합을 도모해서 시너지를 기대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내가 후보가 된다는 보장도 없잖아?”
“그렇습니다. 하지만 일단, 후보가 되지 못하더라도 여당이 다시 정권을 재창출한다면 지분 행사를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후보가 되신다면 여당이 조직적으로 후보님을 도울 것입니다.”
“음. 나쁘지 않구먼.”
단합 후보 결정은 한 판 승부로 결정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야당의 반발이 이어졌지만, 선거관리위원회는 토론회 1회와 여론 조사 결과를 반영해서 단합 후보를 결정하는 것까지 인정해 줬다. 아무리 대통령의 레임덕이라고 하더라도 여당의 압력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야당 측도 더 거세게 반대하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저들이 단합한다고 해도 후보님의 지지율을 넘기기 힘들 거로 예상합니다.”
“그래도 신중히 봐야 해.”
“맞습니다. 하지만, 혹 단일 후보를 결정한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유지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왜?”
“정 총재는 사업가입니다. 혹 본인이 후보가 되지 않으면 어려운 요구를 제시해서 여당 후보를 난처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지지를 철회하면 오히려 역풍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당 후보가 단일 후보가 되지 못한다면 여당의 대표가 일개 무당파에게 진 꼴이니 맥 빠져서 선거 운동을 제대로 도와줄 리가 없습니다.”
“음. 말을 듣고 보니 그렇구먼.”
야당 후보는 적절한 분석이라 생각하면서 5년 전에 못 한 대관식을 상상하고 있었다.
‘지난번은 뜻밖의 변수가 있어서 졌다고 하지만, 이번에는 또 당하지 않는다.’
단 한 번의 토론회 결과 여당 후보가 정 총재를 이겨 단합 후보가 됐다. 정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었다면,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토론회를 지켜본 사람이라면, 정 총재는 대통령감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축구 대통령이 국가 대통령이 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결과는 국가를 위해서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선거 유세 며칠 동안 두 후보는 승부에 승복하며 동행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이 둘의 시너지는 예상보다 컸다. 그리고 지지율이 오를수록 여당 후보의 지분보다 정 총재의 지분이 커지는 느낌이었다.
“총재님 이제 우리의 요구 사항을 정리해서 보내야 할 거 같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
“적어도 내각의 절반 정도는 우리 사람으로 세울 수 있도록 하고, 차기 후보로 총재님을 내정할 수 있도록 하는 제안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좀 거하지 않나?”
“아닙니다. 현재 수준이면, 분명히 받아 줄 거라 확신합니다. 혹, 절충하더라도 이 정도는 제안해 놓아야 우리 몫이 많아집니다.”
“음. 그렇게 하도록 하게.”
그러나 정 총재는 모르는 게 있었다. 사업과 정치는 같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여당 후보는 비주류였을 망정, 정치의 길을 쭉 걸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