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미래 지방분권 시대의 주민은 청소년(9)
셋째, 적극적인 시민이 돼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중앙집권주의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지역 방송국이 생기고, 지방자치제가 실행된 지 30년이 지나고 있지만 여전히 중앙방송을 선호하고 대통령 선거가 지방선거를 크게 압도합니다. 20대 대선 기간에 국회의원 보궐 선거가 있었지만, 관심 밖이었습니다. 대통령이 바뀐다고 해서 실제로 우리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솔직히 국회의원 선출도 우리 삶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니 국회 해체라는 표현도 종종 등장하는 것이죠. 이전 정부가 실패한 정책 중 하나로 부동산 정책을 꼽을 수 있습니다. 목적이야 집 없는 국민에게 자기 집 마련의 기회를 주고, 투기하는 사람들에게는 경종을 울리겠다는 것이었죠. 그러나 각 지역은 상황이 모두 다릅니다. 서울과 수도권에 어울리는 요소가 있다고 하더라도 부산과 대구에는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도시가 다르고 촌락이 다릅니다. 인구 분포가 다르고 주거 환경이 다르고, 산업 현장이 다릅니다. 이 모든 걸 고민해서 중앙정부에서 다양한 정책을 마련할 수 있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지방 자체에서 부동산 정책을 검토하고 이를 바탕으로 아래에서부터 정책을 제안하고 실행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적극적인 시민(주민)이 돼야 합니다. 내 재산을 지키고, 혹은 앞으로 좀 더 경제적 여유를 위해서 살기를 바란다면, 중앙정부에 모든 걸 위임해서는 안 됩니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의구심을 가질 정도로 지역 상황에 관심이 있는 시민이 많았다면, 분명 많은 비판과 새로운 의견들이 나왔겠죠?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정부 정책에 대한 비난 – 집값이 떨어지거나 천정부지로 오르는 현상을 보고 힐난 – 은 했을망정 우리 지역에 필요한 정책에 대해서 고심하고 의견을 모아서 정부에 제안한 시민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슈가 되는 정책이나 상황에 따른 정보는 언제나 얻을 수 있습니다. 국가적 차원을 넘어서 국제적 수준에 이르는 정보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고요. 현 시점에서 정보를 습득하는 방법은 과거와 비교하면 차원이 다릅니다. 21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인터넷으로 정보를 찾기 위해서는 컴퓨터 앞에 앉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어떤가요?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진정한 ‘유비쿼터스’의 실현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검색의 편리만을 얻게 된 수준이 아닙니다. 현재 소유하고 있는 스마트폰의 능력은 70억 이 넘는 인류의 지능을 모두 합한 것보다 좋다고 합니다. 활용 수준에 따라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들을 스마트폰으로 할 수 있다는 의미죠. 이때 중요한 점은 수많은 정보를 확인하고 습득하되,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적용할 수 있는 수준의 정보로 재생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중앙에서 떨어지는 빵부스러기에만 만족해야만 합니다. 부스러기에 만족하지 않고 빵을 만들 수 있는 적극적인 시민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넷째, ‘좋은 디지털네이티브’가 되기 위해서는 오프라인 커뮤니티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다소 모순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겠습니다. 디지털화 시대의 문화를 잘 이해하고 기기들을 잘 활용하는 게 ‘좋은 디지털네이티브’라고 할 수 있는데, 갑자기 오프라인 커뮤니티의 참여를 권하니까요. 급속도로 인터넷이 확산한 시기에 사람들은 다양한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들었습니다. 하다못해 매일 새롭게 생성되는 채팅방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니까요. 오죽하면 당시(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 인터넷 채팅 문화를 토대로 해서 등장한 영화 “접속”은 당대 최고의 스타가 캐스팅됐고 성공했습니다. 온라인 커뮤니티가 확산되고 발달하면서 기존 오프라인 커뮤니티의 소멸과 개인주의, 그리고 소외현상 등을 SNS로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낙관적인 의견이 주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SNS의 효과로 기대한 인간 소외현상 극복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좋아요’, ‘싫어요’에 민감해지고 혹은 익명의 댓글에 사회적 혼란만 가중됐을 뿐이었죠. 아울러 엄청난 회원 수를 자랑하는 SNS는 그 영향력도 대단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고(특히, 페이스북의 정치적 영향력 등) 경제적 이득 – 대체로 광고 수익 – 이 이런 플랫폼의 주 수입원이 되다 보니, 순수한 정보 전달조차 어려운 실정이었고요. 결국, 돈 벌이를 위해 정보 자정작용을 포기한 것이죠. 비용이 거의 발생하지 않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어서 새로운 민주주의의 발전까지 기대했으나, 결론은 자본의 힘에 눌려 역시 돈으로 정보를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2016년 미국 대선에 러시아가 간섭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결국, 현재 나온 대부분의 SNS와 관련한 연구 결과물은 초기 기대를 입증하지 못하고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만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런 온라인의 한계를 극복할 방법은 오프라인에서 가능합니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모임하면서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고, 발전적으로 토론하면서 결과도 도출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 문명 속에서 과거보다 더 빠르고 더 많은 정보를 습득하면서 타인과 공유하고 활발하게 토론한다면 개인 수준에 머물던 정보가 공동체 수준으로 확대되고 그 영향력도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메타버스가 이런 오프라인의 시공간의 한계를 극복해줄 거로 기대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현재 수준보다 유의미한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디지털휴먼(Digital Human)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연예인이라고 생각했던 인물이 실제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런 실재 같은 가상인간이 실재 연예인보다 더 많은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아마 기술이 더 발전하면 단순히 마케팅 수준을 넘어서 다양한 콘텐츠 – 영화, 드라마 등 – 의 주인공이 될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단, 메타버스가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가상이라고 하더라도 실재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니 그 부작용에 대해서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벌써부터 일부 메타버스 플랫폼에서는 성추행 등과 같은 범죄가 등장하고 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좋은 디지털네이티브’는 다양성을 추구해야 합니다. 자칫 잘 못 생각하면 “과거보다 더 많은 채널이 생겼으니, 당연히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정보를 얻을 수 있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객관적인 수치만 본다면 분명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수많은 채널 중 내가 시청하는 채널은 얼마나 되나요? 현재는 타블로이드 신문을 거의 읽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종 출근길 지하철 입구에서 신문을 무료로 나눠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수많은 언론의 기사를 모두 접할 수 있으니, 돈을 주고 신문을 구매해서 읽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 대중교통 내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연세가 60대 이상일 확률이 높습니다. 과거에도 자신의 성향에 따라서 신문을 선택해서 읽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조중동(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은 주로 보수적인 사람들이 읽었고, ‘한겨레’신문은 진보적인 사람들이 읽었습니다. 적어도 이렇게 구분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필자의 청소년 시절 한 선생님께서는 논술을 대비하기 위해서 서로 다른 견해를 참고하는 게 좋다고 하시면서 두 부류의 신문 읽기를 권하셨습니다. 이후 대학에 입학하니, 적어도 정치학과 교수님들은 여러 신문을 구독해서 읽으셨습니다. 연구를 위한 자료로 활용도 하셨지만, 자신의 견해를 최대한 중립에 위치하고 싶으셨던 것이죠(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현재로 돌아오겠습니다.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채널이 있습니다. 청소년들은 케이블 채널을 거의 보지 않습니다. 주로 스마트폰으로 유튜브 등에서 보고 싶은 콘텐츠를 시청하겠죠. 이때, 유튜브 인공지능이 알고리즘을 활용해 시청자의 성향을 파악해서(현재까지는 왠지 어색한 권유지만) 계속 유사한 콘텐츠를 소비하기를 제안합니다. 즉, 내가 보수적인 성향의 채널을 주로 시청했다면, 점점 더 보수적인 성향의 콘텐츠를 제안하는 식이죠. 심리학에는 ‘문간에 발 들여놓기(foot in the door)’라는 개념이 있는데, 처음에는 쉽게 시작했더라도 나중에는 점점 깊이 빠져든 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수많은 채널이 있어도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채널은 다양하지 않다는 의미죠. 그래서 다양성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새로운 채널, 특히 내가 현재 즐겨보지 않는 채널을 찾아서 봐야 합니다. 인간은 확증 편향이 있어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에 집중하고 그렇지 않은 콘텐츠는 기피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니 의도적으로 다양한 콘텐츠를 접하지 않으면, 쉽게 한 쪽 사고에 매몰될 수 있습니다. 이미, 인생의 방향이 결정된 성인들은 이런 시도조차 거부하겠지만, 계속 발전해야 하는 청소년들에게는 다양한 견해를 찾아서 보고, 듣는 게 개인의 삶을 위해서도, 미래 지역 사회를 위해서도 도움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디지털화가 더 확산되고 발전될 것입니다. ‘좋은 디지털네이티브’가 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현재를 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합니다. 코로나19 펜데믹 시기를 거치면서 ‘메타버스’가 급부상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본인이 생각하는 4차 산업혁명과 ‘메타버스’시대의 체험과 관련한 생각을 나눠봅시다.
‘디지털네이티브’가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한 조건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