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에션셜 한강》 : 한강의 작가론
한강의 작품을 5편 읽었다. 이번 작품이 6번째다. 권력, 폭력, 저항, 죽음, 슬픔, 애통함, 비통함 등이 안개처럼 깔린 작품들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상대적으로 잔잔한 호수와 같은 작품 모음집이다. 이미 다룬 《희랍어 시간》이 삼분의 이를 차지하고, 두 편의 단편과 시, 산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편은 이전 장편과 같이 쉽게 읽히고 해석되는 작품은 아니다. 그렇다고, 죽음을 상수로 놓고 전개하는 다른 작품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잔잔하다. 휘몰아치는 죽음과 삶의 경계 속에서 저항, 혹은 무기력하게 쓰러져가는 인간의 모습을 다룬 게 지난 작품들이었다면, 이번 작품 모음은 저항도, 무기력함도 없다. 그저 인간의 이야기다.
“인생은 아름다운 거야”
한강은 작품 끝에 최인호 작가와의 에피소드를 소중하게 실어 놓았다. 최인호 작가가 한강을 얼마나 아꼈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선배가 후배에게 전하는 조언은 실제적이고 애정 어리다.
“인생은 아름다운 거야, 강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네가 그걸 알았으면 좋겠어. 인생은 아름다운 거다. 난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그걸 영영 알지 못할까봐, 그게 가장 큰 걱정인 것처럼 그렇게 반복하셨다.”
한강에게 인생은 무엇일까? 소설가에게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한강은 작가는 작품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이상한 일은 소설을 써갈수록 점점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잠드는 시간이 조금씩 늘었고, 차츰 악몽을 덜 꾸게 되었다.” 천직이라는 말이 있다. 하늘이 내린 직업이라는 의미다. 한강은 글 쓸 때, 편안해진다. 그런데, 한강은 인생의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사는 것일까? 작가로서 얻을 명예는 다 얻었다. 아시아 최초 맨부커 상을 받았고, 역시 아시아 최초 여성 노벨문학상 작가가 되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수상자가 됐지만, 그래서 비판도 있지만, 수상자가 됐다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 노벨문학상의 힘이었을까? 자가의 책 판매가 100만 부를 돌파했다. 상금과 통장에 찍히는 인세 수준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커졌을 것이다. 이런 부와 명예로 인생의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한강은 작가가 아닐 것이다. 아마, 작가 한강은 이런 명예를 얻었기에 작품을 더 어렵게 쓸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한강이 5-10년 정도 후에 노벨문학상을 받기를 바랐다. 더 원숙한 작품, 좀 더 중립적인 입장에서 글을 써 주길 바랐다. 아마도 아름다운 인생을 경험하기에는 노벨문학상이라는 짐이 장애물이되지 않을까?
작가란의 루틴
“어쨌든 루틴이 돌아온다.
매일 시집과 소설을 한 권씩 읽는다, 문장들의 밀도로 다시 충전되려고.”
소설을 쓰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렇지 않을 때 작가의 루틴은 시집과 소설 속으로 들어간다. ‘문장의 밀도’. 방송 작가 김수현은 한 드라마 대본을 작성할 때, 방바닦에서 시작한 책이 천장에 닿을 정도로 올라간다고 한다. 한 작품을 쓰면서, 다른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계속 문장을 꾸려나가기 위해서다. 글 쓰기 부분에서 일천한 나조차도 글을 쓰다가 막히면 다른 사람의 글을 읽어야, 실마리가 풀린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다른 작가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모든 소설들을 쓴 수천의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등신대의 회색 종이 앞에 서서 한 줄씩 점을 뚫었을 것이다. 생존한 사람들은 지금도 그 앞에 서 있을 것이다.” 작가의 숙명은 꾸준히 쓰는 일이다. 쓰지 않으면, 작가가 아니니까. 독일의 소설가 토마스 만은 매일 한 장씩, 꾸준히 작품을 썼다고 한다. 그 시간만큼은 세상과 단절되어 글 쓰기에 열중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면, 1년에 한 작품은 나온다. 작가는 루틴이 있다. 제2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라 불리는 《연금술사》로 잘 알려진 파울로 코엘료도 한 줄을 쓰기 전에 몇 시간씩 인터넷을 뒤적인다고 한다. 그 시간에 몇 줄을 더 쓰는 게 낫다는 사실을 작가도 알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
작가의 죽음
“작가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때 무섭게 깨달았다. 새 소설의 자료 준비를 끝냈지만, 이제 쓸 일만 남았지만 쓸 수 없다. 머릿속에선 이미 시작되었을 그 책이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다.”
작가는 글 쓰는 사람이다. 작품을 꾸준히 생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작가가 아니다. 종종 책 한 권을 내고 개정판을 내면서 작가 생색을 내는 사람들이 있다. 혹은 커리어란에 한 줄 더 쓰기 위해서 억지로 책을 출간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작가라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글 쓰기위한 목적으로 책을 출간한 게 아니니까. 작가는 계속 써야 한다. 한강은 작가의 죽음을 깨달았다. 머릿속에 담긴 이야기를 쓰지 못하면 작가로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라고. 간혹, 드라마나 영화 속 작가가 노트북 앞에서 한 문장도 못 쓴 채, 머뭇거리다가마는 장면을 볼 때가 있다. 그는 작가로서 생명을 잃은 것이다. 한 줄도 못 쓰는 이유는 글 쓰는 습관을 잃었기 때문이다. 글 쓰는 걸 잊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사실, 쉬지 않고 생각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종종 원고를 정리하다 보면, 뇌가 녹아 버릴 것 같은 번아웃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글 쓰기가 버거울 때도 있다. 마감의 압박, 만족할 수 없는 문장에 대한 미련 등이 작가의 생각을 멈추게 하고, 랩탑 앞에 앉기를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작가는 다시 앞에 앉지 않으면 안 된다. 혹여, 그 시간이 길면 길수록 다른 고통이 따른다. 출판업이 호황을 이뤘을 때가 있었다. 출간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재판 찍는 일은 어렵지 않았던 시절. 그러나 지금은 수많은 사람이 책을 쓰고, 잘 팔리지 않는다. 누가 읽어주길 바라는 글이 아닌, 자기 경력을 위한 책들이 너무 많다. 물론, 그들도 고뇌에 찬 글을 쓰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작가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은 글을 쓰지 않아도 고통스럽지 않으니깐. 작가 한강은 이런 고통을 작가의 숙명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이런 고통이 없다면, 그 작가는 죽었다고 말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