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 패일(fast fail)
근대거리를 걸어야 할까?
지역 사회는 서울과 비교했을 때 기획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새로운 문화 콘텐츠를 개발하기보다는 다른 지역의 것을 조금 바꿔서 가져오기가 일쑤다. 그중 하나가 ‘근대화’와 관련한 콘셉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역사적으로 볼 때 긍정적인 시기가 아니다. 외국의 문물을 수용할 때도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게 아니다. 그 시점이 1876년의 ‘강화도 조약’으로 잘못 알려진 ‘조일수호조규’이다.
19세기 말부터 외세 열강의 침입이 잦아서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 같았고, 20세기 초에는 일본의 강압적인 힘에 국가 주권을 빼앗겨 35년간(1910 – 1945년) 고통스러운 식민통치를 받았다.
근대화 거리를 표방하고 홍보하는 지역에 가보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지어진 건물 중심으로 이뤄져 있다. 한국 근대화는 외세의 힘으로 억지로 만들어진 시공간이었다. 물론, 외국 문물이 다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근대 교육기관, 현대식 의료기관 등과 같은 부분은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게 한 토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근대화 거리 등과 같은 콘셉은 과거사를 잘 모르는 시민들에게 역사를 제대로 가르쳐 주기보다는 여가를 즐길 때 흥밋거리로 활용되는 수준이다. 일본 가옥이 즐비한 거리를 걸으면서 먹거리를 먹고, 과거에 지어진 이색적인 건물을 보면서 어떤 점을 느낄 수 있을까?
왜 다르지 못할까?
그렇다면, 왜 근대화를 주제로 한 공간이 유행처럼 번지게 됐을까? 근본적인 원인은 문화 관계자들과 지방자치단체 담당자들의 문화 콘텐츠 개발 의지 부족이다. 정저지와(井底之蛙) 처지에 놓인 담당자들이 새로운 기획이나, 콘텐츠를 개발하는 것은 애초에 어려운 일이다.
대학 시절부터 구청과 시청 등에 찾아다니면서 다양한 문화 담당자를 만나서 회의하고 토론해봤는데, 지역 문화를 개발하려는 의지를 가진 담당자는 거의 없었다. 그저 맡겨진 행사가 사고 없이 끝나기만을 오매불망(寤寐不忘) 바라는 마음이었다. 종종 공무원답지 않은 열정이 있는 담당자들은 행사 이후에 한직으로 발령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새로운 시도를 하면, 시행착오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첫 실험에 대한 열정과 노력은 인정받지 못하고 실패에 대한 책임만 담당자가 껴안아야 했다. 이런 현실 속에 대부분 담당자는 새로운 시도 없는 안정적인 행사 진행에 연연할 수밖에 없다.
발전을 위한 모험이 아니라 현실 안주를 위해서 모든 정력을 쏟아내는 형국이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기획은 자승자박(自繩自縛)하는 꼴이니 당연히 다른 지역에서 조금 인지도가 있는 테마를 조금 바꿔서 지역에 안치시키는 게 가장 무난한 일이다.
현재 근대화와 연관된 거리 중 가장 유명한 지역은 ‘군산 근대화 거리’이다. 군산은 근대화 거리를 홍보하고 브랜드화하기 위해서 ‘군산 시간 여행 축제’를 매년 개최한다. 그런데, 근대화와 관련한 거리를 조성하고 홍보하는 곳은 군산만이 아니다. ‘인천개항 누리길’, ‘광주 양림동 역사 문화마을’, ‘대구 근대문화골목’ 등이 비슷한 수준으로 근대화를 활용한다.
필자는 군산과 대구 근대화 거리를 투어했는데, 아래는 대구에 있는 ‘근대문화골목’을 투어한 내용이다.
대구는 ‘골목길 투어’ 한 코스로 ‘근대문화골목’투어를 조성했고, 한 번 투어에 약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골목길은 개신교 교회, 가톨릭 성당, 일본식 건물, 독립운동 현장 등으로 구성돼 있다.
필자는 자세히 그려진 위의 지도를 따라 ‘홀로 투어’(요즘 말로 한다면,‘혼투’(혼자 투어) 해봤다. 종종 시내에 나가면 지나치는 길목이어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곳도 있었지만, ‘진 골목’(안내 게시판에 긴 골목이라는 뜻이라고 적혀 있었다) 구역에서는 헤매기도 했다.
투어를 다하고 투어 코스가 ‘근대문화골목’으로 불리기에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대문화를 상징하는 요소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그 시절에(시공간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만들어지고 지어졌으면 다 근대화로 포장했다.
다음은 홈페이지에 있는 ‘근대문화골목’에 대한 설명 글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이 길은 근대문화의 발자취를 주제로 한 길이다. 1.64㎞의 비교적 짧은 코스이지만 볼거리가 많아 다 돌아보려면 2시간 정도 걸리며, 골목투어를 전국 유명 관광지로 만든 가장 인기 있는 핵심 코스이다.
동산 청라언덕, 선교사 주택, 만세운동길, 계산성당, 제일 교회, 민족 시인 이상화와 국채보상운동을 주창한 서상돈의 고택, 근대문화체험관인 계산 예가, 조선에 귀화한 중국인 두사충의 뽕나무 골목, 4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약령시, 한의약 박물관, 조선의 과거길 영남 대로, 에코 한방웰빙체험관, 옛 대구의 번화가 종로, 화교소학교, 사투리로 길다를 질다로 표현된 진 골목이 이어진다.
근대문화 발자취를 주제로 하고 있다고 서두에 밝히고 있다. 그런데, 중국인 두사충은 조선 시대에 귀화한 사람으로 근대와 관련이 없는 사람으로 임진왜란과 관련 있는 사람이다. 이상화 시인과 서상돈 선생은 시기적으로 포함된다고 하더라도 고택이 근대화와 관련 있을까? 이후 ‘400년 역사를 자랑하는’으로 시작하는 투어 코스는 근대문화라기보다는 전통문화와 연관성이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근대문화 + 전통문화 + 독립운동’ 거리라고 해야 한다.
검색한 자료에 따르면, 근대화 관련 지역 중 가장 먼저, 조성된 곳은 ‘인천 개항 누리 길’로 2006년, 대구 2008년, 군산 2009년, 광주 2010년 순이다. 즉, 비슷한 시기에 각 지역에서 근대화와 관련한 자원을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모방하더라도 콘텐츠가 명확하고, 독자적인 스토리텔링이 있었다면 풍성한 문화거리로 정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각 근대화 거리는 이야깃거리와 문화유산 자원 모두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억지로 이것저것 섞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차라리 다른 지역을 따라 하지 말고, 특색 있는 콘텐츠를 개발해서 거리를 조성하고 홍보했다면 더 특색 있는 문화 관광 자원이 되지 않았을까?
한국은 지방자치제를 재개(再開)한 이후 다른 지역에서 하는 것은 우리 지역에서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지역마다 특징이 있을 텐데도 특색을 개발하고 발전시키기보다, 다른 지역에서 실행하고 있는 것을 손쉽게 모방한다.
새로운 시대에는 모험이 필요하다
실리콘 밸리에서는‘패스트 패일(fast fail)’을 중요시한다. 얼마나 빨리 실패했는지에 가치를 둔다. 이해가 어려울 수도 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새로운 스타트업은 ‘십중팔구’ 실패한다. 아무리 예지능력이 탁월한 투자자가 엄격히 심사해서 투자한다고 해도 성공보다는 실패가 많다. 그러다 보니, 실패가 없다는 것은 경험이 없다는 뜻이고, 그런 초짜한테 투자하는 것처럼 무모한 일은 없다는 말이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수익을 위한 사업을 진행하는 게 아니라, 현재의 만족과 미래의 복리를 제공하기 위해서 사업을 펼친다. 현재 국민이나 시민들에게 만족을 주는 사업은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게 당연하나 미래를 위한 준비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과 모험, 실패의 과정이 중요하다.
아울러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적극적인 시민의 참여와 관심을 상시로 유도할 수 있다. ‘집단 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의 파워를 활용할 수 있다. 공공 광장 축제나 스포츠 행사, 여타 사회 활동에 많은 시민이 참여할 수 있다.
따라서 시민들이 아이디어 공모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담당 부서는 다양한 의견을 열린 자세로 수용해서 반영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은 새로운 실험은 실패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둬서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