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작가Join Aug 31. 2020

『노인과 바다』 상(上)편

“그대로 읽기”


그대로 읽기는 작가의 관점이 아니라 독자의 관점이다     


2019년부터 역순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을 읽고 몇 편씩 소개하고 있는데(물론, 카뮈와 사라마구는 역순과 상관없이 이슈에 따라 정리했다), 헤밍웨이는 역순과도 거리가 있고 특별한 이슈와도 상관없다. 단, 필자의 개인적인 상황과 관련 있다(최근에 아버지께서 심근경색으로 쓰러지셨고, 동시에 암 진단도 받으셨다. 회복 불가능한 상태여서 임종을 기다리고 있다).     


문학은 독자가 해석한다. 독자의 상황에 따라 해석하면 된다. 작가의 감정과 그 시대의 분위기 등을 살펴서 해석하는 건 전문가들의 몫이다. 책은 쉽게 읽으면 된다. 물론, 그렇게 읽으려 해도 쉽게 읽히지 않는 책도 많다. 칸트, 헤겔, 하이데거 등의 책은 해설서를 읽어도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두툼한 책을 일독하고 난 후 느낀 점이 비록 티끌만큼만 남았더라도 독자는 성공한 것이다. 전공자들만큼 이해하기는 어차피 쉽지 않다. 그러나 그 티끌이 태산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안고 꾸준히 읽으면 된다.   

  

왜 노인과 바다인가?     


작품을 읽다 보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노인과 고기다. 작가가 워낙 낚시를 좋아했기에 소설은 낚시꾼들만이 알 수 있을 정도의 세밀한 부분들이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다.     

기력도 쇠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무시당하기가 일쑤인 노인이 먼 바다로 나가 고기와 사투를 펼친다.      


이놈, 네가 나를 죽일 속셈이로구나, 하고 노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너에게도 그럴 권리는 있겠지. 그런데 이 친구야. 나는 지금까지 너처럼 거대하고. 너처럼 아름답고. 또 너처럼 침착하고 고결한 놈은 처음 봤구나. , 그럼 이리 와서 나를 죽이려무나. 어느 편이 상대방을 죽이건 그건 내가 알 바 아니다.” 본문 중     


사투라는 표현이 적당한데, 동시에 경외감과 동지애를 보여준다. 죽거나 죽임을 당해야 하는 상황에서 노인은 고기를 단순한 어획 대상으로만 보는 게 아니다. 마치 허먼 멜빌의 『모비딕』헤밍웨이 편을 보는 듯하다. 물론, 배의 규모도 다르고 대상을 쫓는 기본적인 입장도 다르지만 거대한 대양 가운데서 사투를 펼치는 커다란 물고기와 인간이라는 점에서 두 작품은 유사하다. 어쩌면 멜빌의 ‘모비딕’이 헤밍웨이의 ‘큰 고기’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작품은 ‘바다’를 쉽게 잃어버리게 만든다. 모든 배경이 되는 바다보다는 ‘노인과 고기’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어쩌면 이게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거대함은 보지 못하면서 근시안적인 상황에 눈을 맞추는 인간의 본능이자, 무지함.     


바다는 고요함 속에서 등장한다     


노인은 항상 바다를 여성으로 생각했다. 바다는 큰 은혜를 주기도 하며, 모든 걸 간직하고 있기도 한 그 무엇이었다. 비록 바다가 사나워지고 재앙 이 닥쳐오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바다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본문 중     


고기와 마주치기 전 노인이 생각한 부분이다. “큰 은혜”와 동시에 “사나운 재앙”을 주는 바다다. 그리고 이런 양면성을 가진 바다를 노인은 여성이라고 생각했다. 여성의 변덕을 의미하는 것일까(작가의 여성 편력을 보면,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아니면, 자연을 이해하는 인간의 한계일까? 당연히 후자다.

 다시 『모비딕』을 가져와 보자. 거대한 바다에서 사투를 벌이는 포경선과 흰고래의 싸움, 인간은 단 한 마리의 고래와의 사투에서도 쉽게 승리하지 못했다. 하물며 거대한 바다에서 태풍을 마주한 범선은 대자연의 가공할만한 위력 앞에 오직 목숨만 간절히 애원할 뿐이다.      


바다를 볼 수 있는 눈은 목전에 고기가 없을 때만 비로소 가능하다. 오직 고요함 가운데 바다를 느낄 수 있다.     


태풍이 오면 며칠 전부터 하늘에 그 징조가 나타난다. 바다에 나가 있노라면 그것을 금방 알게 된다. 육지에서는 좀처럼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아무 데서도 태풍의 단서를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본문 중     


하지만, 눈앞에 고기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태풍이 올 징조는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오직 고기에만 몰입하기 때문이다. 거의 20년 전에 《퍼펙트 스톰》이라는 영화가 상영됐다. 내용은 고기를 많이 잡기 위해서 먼 바다로 나가서 목표치를 달성했으나, 큰 태풍을 맞아 배가 침몰하고 모든 어부도 사망한다는 내용이다.      

태풍을 예측해도 목전에 큰 고기가 보이면 그 확실에 가까운 경험을 포기하고 당장의 이익에 운명을 건다. 바다가 위험을 예고해도 인간은 위험을 운으로 돌린다.      


결국, 패배     


노인은 고기를 잡았다. 사투 끝에 잡았기에 그의 만족감은 커야만 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고기를 죽였다는 것은 정말 안된 일이었어.” 본문 중     


사투를 벌였던 고기에 대한 연민일까? 그는 잠시 승리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연민의 정을 느낀다. 그리고 승리를 정당화한다.      


네가 고기를 죽인 것은 다만 먹고 살기 위해서, 또는 식량으로 팔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너는 자존심 때문에 그 고기 놈을 죽였으며, 네가 어부이기 때문에 죽 인 것이 아닌가 말이다. 너는 고기가 아직 살아 있을 때도 그놈을 사랑했고, 또 한 그놈이 죽은 후에도 사랑했다. 만약 네가 고기를 사랑한다면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니다. 아니 더욱 무거운 죄가 될까, 그것은?” 본문 중     


그러나 소설은 ‘노인과 고기’가 아니다. 어떤 일에 죽을 만큼 몰입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교훈 따위를 주려고 쓴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당장의 몰입으로 얻은 가벼운 승리는 결론적으로 패배로 가는 순간임을 보여준다.


소설은 이제 시작한다. (다음 편에 계속)

작가의 이전글 좋은 아빠! 그냥 아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