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6)
“내가 그를 지키는 자이니까?”
성경 창세기에는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하나님이 아벨의 자취를 묻자, 가인은 오히려 항변한다. 그는 이미 동생을 죽인 자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질투와 자존심이 그 원인이다. 아니면, 신에 대한 항거였을 수도 있다.
일반적인 교회에서는 신이 아벨의 제사를 받아 주었기에 가인의 부족함을 질책하고, 하나님이 아낀 아벨을 죽인 가인이 악인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 가인이 악인이었을까? 주제 사라마구는 『가인』에서 악인의 상징이 된 가인을 주인공으로 선택해 신에게 도전하고 반항하며 모험하는 인물로 그리고 있다. 절대적인 신의 위세에 쫄지않고, 고개를 들고 저항하는 인간의 근성, 강풍에 대나무는 부러진다지만 가인은 그 뻣뻣함에도 부서지지 않고, 오히려 갈대처럼 생명력을 이어갔다.
가인은 악인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인류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가 죄인 취급받은 이유는 선과 악이 필요한 상황 가운데, ‘악(惡)’의 역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미 죽은 자가 악인 역할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아벨이 살았다면? 그가 ‘선(善)’이었을까? 그 역시 아담의 정자에 포함된 원죄의 유전자를 지니고 태어난 인간 아니던가? 신은 두 명 모두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하나는 ‘선’으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악’으로. 좀도둑과 살인강도가 같이 있다면, 당연히 강도가 더 나쁜 인간으로 보게 되는 인간의 착시현상을 이용한 것이다. 인간의 눈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생각도 오류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마치, 아무리 능숙한 운전자라도 차선을 이탈할 때마다 ‘삑삑’ 경고음을 듣고 다시 제 자리로 찾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가인은 장자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축복을 받지 못하고 떠돌이로 살아야 했다. 그러면서, 항상 죽음의 공포, 누군가가 자신을 살해할지도 모른다는 죽음의 그림자와 같은 응달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아울러 항상 친족 살해에 대한 트라우마가 그림자처럼 떠나지 않았다.
"차라리 내가 아벨 대신 죽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는 자신의 삶을 저주하며 살았다. 그는 철저히 그다음 동생 ‘셋’을 위한 희생양이었다. 물론, 이미 죽은 아벨도 마찬가지다. 단, '가인과 아벨'에서 아벨은 조연을 맡았을 뿐이다.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만 집중하면, 당연히 가인이 악당이고 그가 죽인 아벨은 신이 인정한 선한 자로 느껴진다. 그러나 이들은 조연일 뿐이다. 아벨조차 희생양이었다. 창세기 전체를 볼 때, 주인공은 이들이 아니라 ‘셋’이다. 셋은 아주 잠깐 등장하지만, 성경은 셋의 후손 이야기로만 채워진다.
가인이 진정 죄를 지은 악인이었다면, 정의로운 신이 그를 살려줬을까? 죽음으로 엄벌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더 큰 고통과 두려움에 떨며, 살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은 자비한 척 “그 누구도 너를 죽이지 못할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신이 낯설다. 완벽한 신이 아니다. 신은 우유부단 하며, 자의적이다. 그 마음대로 죽이고, 악인으로 만들고, 죽음에서부터 구원한다.
오히려 인간이 변하지 않았다. 가인은 그 욕망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부러워서, 원망스러워서 죽였다. 그리고 두려워했다. 어린아이의 손에서 장난감이 된 개구리 한 마리가 있다. 한참 가지고 놀던 아이는 이내 싫증을 낸다. 그러더니, 손안에 있는 개구리를 바닥에 힘껏 던져 버린다. 개구리는 잠시 비행하다가 바닥에 떨어져 사지를 쫙 뻗고 죽는다. 천진난만한 아이는 그 모습을 보고 즐거워한다.
“신천지 개새끼들 그놈들 때문에 이 상황이 뭐야!”
“그러게, 말이에요. 떳떳하게 드러내 놓고 신천지 신도라고 말도 못 하는 놈들 때문에.”
“이번 기회에 싹 없애 버려야 해요.”
“맞아요. 그 사이비 교주부터 해서 완전히 뿌리를 뽑아야 해요.”
처음 ‘코로나 19’에 대한 비판의 화살은 조기 종료를 선언하고 방역을 소홀히 한 행정당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온 국민이 정부를 향해 활시위를 당겨 새까만 화살 비가 청와대로 떨어질 거 같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긴요. 이겨내야지요. 늘 그랬듯이 준비된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좀 큰 걸 던져야 할 텐데요.”
“없으면, 만들어야죠. 어차피 대중은 자극적인 걸 찾게 돼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쉽게 당하지 않는다. 온 천지가 변해도 정치는 살아남았다. 특히 모든 게 정치 논쟁으로 바꿀 수 있는 대한민국에서 공공의 적(敵)을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보수나 진보나 할 거 없이 그들이 살길은 대중 선동이었다. 이 전략의 성패에 따라서 권력을 유지하거나 넘겨줘야만 했다.
역사가 있어서 대중은 권력자들의 선동에서 벗어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할 거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다. 세 살 버릇을 여든까지 가지고 가는 대중들은 ‘이번만’,‘한 번만 더’라는 권력자들의 간절한 구걸에 ‘미워도 다시 한번’이라고 생각하며 '속는 셈 치고'라고 하면서 또 표를 던져주기 마련이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도 그런 선동이었다. 분명히 다른 민족을 멸하려는 짓이었는데도 독일인들은 그 선동을 옳은 것이라고 믿었다. 사실, 그렇게 믿는 게 마음 편했을 것이다. 독일인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약탈하고 폭력을 행사해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세상에는 임계점이라는 게 있는데, 폭력과 쾌락에는 그런 임계점이 없어서 더 잔인하고 더 큰 쾌락을 갈구하게 된다. 오늘은 불륜을 내일은 불법적인 원조교제를 바랐던 세기말 노인처럼.
당시 독일 국민은 나치를 최고 당으로 만들어줬다. 그래서 히틀러의 유대인 박멸 공작을 지지해야만 했다. 위대한 국민은 실수해서는 안 된다.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다면, 현실에 충실한 게 낫다고 포기하는 게 인간이다. 처음부터 친일파였던 사람은 많지 않다. 아무리 일본이 싫었어도 해방에 대한 기대가 아침 이슬처럼 증발해 버리면, 뜨거운 태양 아래 몸을 맡길 수밖에 없다.
권력자들은 대중을 개, 돼지와 같은 짐승으로 취급하지만, 그런 그들도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겉으로는 ‘존경하는 국민’이라고 치켜세운다. 위대한 국민, 그들의 선택은 틀릴 수 없다. 그 자부심과 오만이 바로 역사를 잊게 한다.
장미꽃의 가시가 약점일까? 아니다. 오히려 그 가시 때문에 장미의 가치가 높아진다. 함부로 잡을 수 없어서, 사람들은 장미를 더 좋아한다. 장미를 받고 좋아하지 않는 여자가 얼마나 있을까? 60대 여성이 7송이 장미꽃에 30대같이 웃고, 17세 소녀가 17송이 장미를 받고 27살이 된 것처럼 느끼는 게 장미 현상이자, 마력이다.
역사가 아무리 실수를 반복하는 대중을 기록했어도 지금 국민은 역사 진보의 법칙에 따라서 ‘가장 완벽한 우리’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정부에서 공공의 적으로 ‘신천지’를 선택하고 언급하자마자, 정부나 지방 행정당국을 향했던 활시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금세 신천지로 향했다. 게다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신천지가
“우리가 최대 피해자입니다.”
라는 망언을 쏟아내니, 활을 들지 않고 있던 국민도 거실 서랍장에 귀하게 모셔둔 활을 꺼내 들었다. 여기서 그쳤으면 그나마 다행이었을 텐데, 총회장이라는 사람은 자기 세력을 추슬러보겠다고 “마귀의 계교”라고 선언해서 불같은 여론에 기름을 부어 더 활활 타오르게 했다.
역사가 오래되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종교는 정치와 보폭을 비슷하게 유지하면서 나아간다. 앞서 나가려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뒤로 빼지도 않는다. 앞으로 나가면 권력으로부터 저지당하고 뒤로 처지면 미신으로 전락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천지같이 연원이 짧은 종교들은 위기 상황 한 번에 회생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
“참 이상한 집단이에요.”
“오죽하면, 신도라는 것도 속이고 가족들한테까지 신천지라는 걸 속일까?”
“그러게요. 이상한 사이비가 확실해요.”
“도대체 그런 종교를 믿는 사람의 뇌는 어떤 구조일까요?”
“말세가 되니, 별 이상한 종교가 다 생기네요.”
비난의 화살 전부는 아니지만, 대다수 화살이 신천지로 향했다. 신천지의 반응은 패착(敗着)이었다. 올가미에 걸린 사냥감처럼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숨통이 조여올 뿐이다. ‘희생양’으로 던져진 양의 목적은 잘 죽어주는 것이다. 희생양은 아무리 저항해도 살아날 수 없다. 혹, 기적적으로라도 살아나고 싶다면 최대한 숨을 죽이고 있다가 도살자가 방심한 틈에 사력을 다해 도망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신천지는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발버둥 치다가 도살자의 얼굴을 발로 찬 격이었다. 그러다 보니, 화가 난 도살자의 몽둥이에 두들겨 맞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