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정부와 온라인 거버넌스의 한계
전자정부의 개념적 시발점은 1993년에 미국 빌 클린턴 정부 때 최초로 제기됐다고 한다. 당시 ‘정부가 발간한 행정보고서’에서 온라인을 매개로 한 정부 역할 변화를 제시하고 있는데(『온라인 거버넌스로의 전자정부의 성과와 정책과제』 참고),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해서 편의성, 투명성, 소통성, 개방성 등이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자정부는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장치라는 점이다. 전자정부라는 말 자체가 ‘거버먼트’를 주체로 하고 있다. 아래는 전자정부의 개념이다.
정보기술을 활용하여 행정기관 및 공공기관(이하 "행정기관 등"이라 한다)의 업무를 전자화하여 행정기관 등의 상호 간의 행정업무 및 국민에 대한 행정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정부 [전자정부법 제2조]
기존 행정체제를 발전적으로 보완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거버먼트 체제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정보 기술을 수단으로 활용해서 ‘거버먼트’의 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게 핵심이다.
우리나라의 전자정부는 김대중 정부 때 정보사회 구현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사이버 코리아 21”을 추진했다. 전자정부라는 말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라기도 하듯이 국가 기관을 초고속망으로 연결했고, 인터넷 보급률도 높고 속도도 빨라서 정보통신 지수는 전 영역에 걸쳐서 세계 최상위를 차지했다. 민간영역에서도 디지털 기회 지수에서 2005년부터 1위, 그리고 2010년 조사를 보면, 전자정부를 평가하는 여러 기준이 있는데, 우리나라가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인터넷 보급과 속도와 관련한 하드웨어 영역에서 앞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최근 5G도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다고 선전하는 수준이니, 하드웨어 수준에서 대한민국은 ‘大國’이다.
그러나 소프트웨어는 어떤가? 특히, 온라인 거버넌스를 고려한다면 그 수준은 민원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청와대부터 시작해서 모든 행정기관에서 공개 방을 만들어 민원을 접수하고 부지런히 답변도 하지만, 쌍방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고령층은 사소한 민원이나 행정적인 정보를 제대로 확인할 수도 없다.
국민청원도 가능하고, 토론 등도 가능하지만, 뉴스로 보도하지 않으면, 관심받기도 힘들다. 물론, 관심사에 따라 이용하는 것이라는 변명도 가능하지만, 실질적으로 전자정부가 대한민국 정치체제를 업그레이드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여전히 대한민국은 거버먼트 중심으로 테크노크라트(technocrat) 중심으로 움직일 뿐이다.
첫째, 온라인 오픈 회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온라인 거버넌스는 물리적인 시·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채팅만 할 수 있으면 회의도 하고 토론할 수도 있다. 또한, 특성상 일반 회의공간 더 많은 사람을 참여시킬 수도 있다. 흔히 말하는 ‘눈팅족’이다. 토론 이후에 질문도 받을 수 있고, 답변도 할 수 있다. 용량이 큰 파일이 아닌 이상 자료 공유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회의체가 이뤄진 적은 거의 없다. 여전히 회의는 오프라인이 대세다. 실제로도 눈을 마주치는 회의 방식이 자판을 두드리면 나오는 문자를 읽으면서 하는 것보다 낫다. ‘코로나 19’ 이후 화상 회의를 종종 이용하고 있지만, 오픈된 환경에서 이뤄지는 회의는 아니다.
둘째, 전자정부 자체가 거버먼트를 보조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어서 거버넌스로 발전하기 힘든 구조이다.
행정 시스템의 효율적 운영이 주목표여서 처음부터 거버넌스를 위한 시스템으로 구축하지 않았다. 사실, 오프라인에서도 거버넌스가 정착하지 못한 상황에서, 온라인에서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게 그동안 쉽지 않았다. 그러나 세대가 바뀌고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이 편하고 능숙한 세대가 등장했기 때문에 오히려 온라인 거버넌스 실현 가능성이 클 수도 있다.
셋째, 전자정부 역시 운영 주체가 거버먼트라는 점이다.
거버먼트에 의해 운영되는 시스템이어서 혹, 온라인 회의체를 조성한다고 하더라도 대표성은 거버먼트에 있다. 당연히 안건 자체도 거버먼트에서 제시하는 게 가장 많을 것이다. 민간 기관이나 개인과 비교할 때 더 큰 조직이고 공적인 부분을 담당해야 하는 거버먼트가 더 많은 안건을 제시하는 건 맞다. 하지만 민간영역이나 개인이 제시하는 안건을 승인을 거버먼트가 하는 것이라면, 사실상 100% 거버먼트가 관장한다고 봐야 한다.
넷째, 대표성 문제다.
오프라인에서도 대표성은 항상 정당성 문제를 초래한다. 그런데, 온라인에서는 어떻게 대표성을 인정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온라인에서 토론하는 주체나 안건 제시는 현실 속 대표보다는 연령이 낮을 가능성이 크다. 이들의 대표성을 어떻게 인정하고 얼마나 존중해 줄 수 있을까?
다섯째, 전자정부 혹은 온라인 거버넌스의 문제는 SNS의 등장에 있었다.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이 2007년에 등장했다. 주머니 속의 라디오가 아니라, 주머니 속의 컴퓨터가 등장한 것이다. 이전에도 느리긴 하지만, 휴대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용자가 드물었고,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아이폰’의 등장으로 어디서나 인터넷을 연결할 수 있게 됐다.
과거에는 2G 폰이 지하철에서 잘 터지는지를 따졌는데, 이제는 인터넷 연결의 여부가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국내는 스마트폰 출시 여건이 좋지 않아서 2009년에 삼성에서 스마트폰을 출시할 때까지 보호 장벽으로 보호해줬다. 그 덕분에 삼성은 스마트폰의 세계 강자가 될 수 있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연결의 동물이다. 태아 시절에는 엄마와 탯줄로 연결돼있고, 태어나서는 가족(부모)과 바로 연결된다. 성장하면서는 친척, 친구, 이웃 등 끊임없이 연결고리가 많아진다. 물론, 던바의 수 즉, 150명 이상을 넘어가면, 연결의 한계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150명만 하더라도 적은 수가 아니다.
이동통신은 말 그대로 움직이면서 소통하는 것이다. 굳이 움직이면서까지 소통하고 싶을까? 그런데, ‘호모 커뮤니쿠스’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DNA인 듯하다.
핸드폰은 통화료가 비쌌고, 문자도 한 건에 20원을 넘었기 때문에 무분별하게 사용하기 힘들었다. 그 시절에는 인터넷도 정액을 내고 사용했던 시절이어서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이동통신이 더 발전하면, ‘데이터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염려를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등장한 스마트폰은 처음에는 눈치 보면서 서서히 가입하더니 어느 순간 대다수 국민이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항상 인사하는 자세로 다니게 됐다.
스마트폰은 개인 시간 활용과 인간관계 방법을 동시에 변화시켰다. 굳이 만나지 않아도 안부를 전할 수 있었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친구 맺음이 가능했다. 이 모든 것이 ‘호모 커뮤니쿠스’ 유전자 덕분이다.
대한민국은 ‘카톡’열풍에 빠져서 지금까지도 카톡을 주요한 메신저로 사용한다. 인간의 연결에 대한 갈망과 유전자는 스마트폰도 연결 도구로 삼았고, 이후 이동통신의 발전 속도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을 연결하는 다리를 놓았다.
이제 다시 전자정부 이야기로 돌아오자. 전자정부의 방향성은 앞서서 말한 것처럼 한 방향이다. 소통은 쌍방향일 때 가능하다. 한 방향은 명령, 혹은 알림일 뿐이다. 연결과 소통의 동물인 인간이 일방적인 명령을 들을 때를 생각해 보면, 남성 경우 군대에서 잠시 경험한다. 아무리 존칭어로 표현하고 질문에 친절하게 답을 달아 준다 해도 전자정부 체계에서는 민원처리 이상을 경험하기 힘들다.
그러나 SNS는 달랐다. 내가 ‘좋아요’를 누르면, 상대도 ‘좋아요’를 눌러주고, 친구로 받아들이면, 상대도 나를 친구도 받아들일 확률이 높았다. 어떤 누구도 교조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정부 기관에서 만든 홈페이지나 각종 게시판 등이 제한적으로 활용됐다면, SNS를 활용한 ‘방’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이 모여서 그들만의 목표를 추진하는 좋은 소통 도구로 작동했다. 자신의 의견을 내놓을 수 있고 이에 대한 반응을 볼 수 있는 쌍방 구조였기 때문에 국민은 전자정부의 제한적인 틀을 별로 사용하지 않게 됐다.
국민을 위한 온라인 신문고가 설치되고 적극적으로 사용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더 경직될 수밖에 없었다. 적극적인 활성화 방안을 모색하라는 명령을 받은 공무원들이 지침을 바탕으로 기획하고 외부 용역을 준다. 그러고 나서, 결과 보고서를 작성한다. 결과는 사실과 관계없이 대체로 긍정적이다.
위에서 전달한 명령은 아래에서 실행되지만, 결과는 폐쇄적이다. 정답이 정해졌기 때문이다. 활성화 방안, 그리고 활성화 계획, 실행 모두 좋은 단어지만 과정이 정직하게 실행될 수 있는 일들은 상당히 제한 때문이다.
MIT 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대런 애쓰모글루(Daron Acemoglu)의『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를 살펴보면, 국가는 민간차원에서 예산, 행정지원, 기간 등으로 제한받는 사업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다. 그래서 인공위성, 인터넷, 혁신적인 의학 분야 등은 국가가 나서서 지원하고 프로젝트를 이끈다. 그러나 이런 사업들은 성공보다 실패가 더 많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런 사업은 국가가 담당해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국가가 나서지 않으면, 시도조차 하지 못할 사업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정서는 다르다. 실패에는 책임이 있다. 위에서 내린 명령을 수행하지 못했을 경우 아랫사람이 책임져야 한다. 적어도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 공무원의 무능함은 곧 승진 누락이다. 이런 상황에서 담당 공무원은 어떻게 해서라도 긍정적인 결과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그림은 항상 바뀌지만, 관람객은 크게 늘지 않는 관존 갤러리가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