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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작가Join Sep 15. 2020

특집 : 거버넌스 블록체인(9)

소주제 : '피'가 있어야 혁명이다

SNS 혁명인가?     


혁명의 기준은 모호하다. 성패로 따진다고 하더라도 평가 시점을 명확하게 정하기도 쉽지 않다. 예를 들어 프랑스 대혁명을 보자.      


프랑스 대혁명(1978년)의 성과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적어도 우리나라에서) 교과서에 실어서 역사적 의미를 교육한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혁명론』에서 프랑스혁명은 실패했다고 단언한다. 쉽게 말하면, 혁명이 밥을 위해서 새로운 변혁을 포기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미국 독립혁명(1776년)이야말로 진정한 혁명으로 인정한다. 두 혁명의 성패는 시스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결국 혁명의 공을 나폴레옹에게 그대로 올려줬고, 이후에는‘앙시앙 레짐’으로 퇴보했다. 그러나 후자는 민주공화국이라는 새로운 체제의 국가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이런 잣대로 SNS 혁명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흔히 말해서 “아랍의 봄”이라고 불리는 중동의 혁명은 알다시피 ‘무함마드 부아지지’라는 청년의 분신자살이 제1차 세계대전의 사라예보 총성과 같은 역할을 했다. 분신자살과 사회 불만을 가진 많은 시민이 SNS로 정보를 얻고 집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으나 도화선에 불을 붙인 사건이다. 독재, 빈곤, 기대할 수 없는 미래 등에 대한 불안감과 좌절감은 궁지에 몰린 쥐와 같았다. 더 물러설 수 없는 쥐는 강력한 고양이에게 덤빌 수 있는 절박함만 남은 것이다.

 이후 혁명은 튀니지, 바레인, 알제리, 예멘, 모로코 등 여러 국가에서 발생했다. 아랍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건 당연하리라 예상됐다.      


그러나 10년이 채 못 돼서 아랍의 봄은 “아랍의 겨울”이 됐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서민의 삶이 나아지는 게 아니었다. 과거 우리나라 대선에 민주노동당 대표로 출마한 권영길 후보가 했던 말이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이다. 유사한 부류 간의 정권교체는 일반인들 삶의 변화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SNS의 한계 시작은 있으나 결과가 없다     


이후로도 SNS를 활용한 시위는 있었다. 시민이 모이고 소리를 내는 데 시발점이 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시스템 변화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대표적으로 2011년에 발생한 “Occupy wall street” 역시 SNS를 활용한 시위였다. 

 많은 시민이 모여서 상징적인 1%에 저항하는 대규모 시위를 진행했다. 미국에서 발생한 시위여서 기대감이 “쭉~” 상승했던 시위였다. 그러나 알다시피, 결과는 트럼프의 당선이었다.      


우리나라로 넘어오자. 우리나라는 촛불시위로 광장에 모인다. 미선이 효선이 때부터 시작했는데, 시작은 2002년 11월 27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앙마’라는 아이디를 쓰는 평범한 학원 강사, 김기보 씨(당시 30세)가 한 언론사 게시판에 광화문에서 미선이 효순이와 함께 수천수만의 반딧불이 됩시다라고 하면서 촛불을 들고 광화문을 걸읍시다. 6월의 그 기쁨 속에서 잊혔던 미선이 효순이를 추모합시다라고 올린 것이 도화선이 됐다.


 2002년은 SNS가 있기 전이었다. 그러나 당시 응집력의 전초가 된 건 2002년 월드컵이었다. 뭉쳐 본 기억이 있었기에 다시 뭉칠 수 있었다.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반대, 수입 소고기 반대를 거쳐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시위까지 촛불은 꺼지지 않고 어두운 광화문 거리를 밝혔다. 


특히, 2017년 촛불시위는 SNS가 적극적으로 활용된 시위이다. 그리고 그 성과로 대통령은 탄핵을 당했고(촛불의 힘이 적지 않았다), ‘장미 선거’를 통해 정권이 교체됐다. 그런데, 결과는? 성패를 속단하기는 이르나, 서민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최근 보도를 보면, 부익부 빈익빈이 더 심해졌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혁명은 정권교체가 아니다. 새로운 시스템을 의미한다. 새로운 시스템 구축에 실패했다면, 혹은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면, 혁명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촛불은 혁명이 아니다. 


성공한 혁명은 유혈이 낭자했다. 아렌트가 실패했다고 하는 프랑스 대혁명도 황제가(루이 16세) 단두대에서 피를 흘렸고, 미국 독립혁명도 미국과 영국의 전쟁으로 많은 시민이 목숨을 잃고 나서 얻은 결과였다.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면, 영국의 명예혁명 정도가 역사책에 “명예”롭게(피 흘리 않은 혁명) 기록돼 있다. 

 우리나라도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4·19 혁명”, “6·29 민주화 혁명” 등은 독재자가 하야하거나 헌법이 개정됐다. 군부의 물리력으로도 개헌에 대한 시민의 바람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SNS는 시위를 축제로 만들고 ‘좋아요!’를 누르게 한다. 그래서 많은 시민이 큰 어려움 없이 단순 참여가 가능하다. 그러나 이후 대안을 마련하고 실행하는 데는 큰 역할을 할 수 없다.

 그저 유튜브와 같은 채널에서 지지하는 후보자와 정당 지지 운동을 하면서 조회 수를 높일 뿐이다. SNS를 활용한 집회 등의 의미를 평가 절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혁명이라고 할 정도의 파급력 없는 행위를 혁명으로 평가절상할 이유도 없다.      


지금까지 거버넌스의 등장부터 인터넷, 전자정부, SNS에 이르는 과정까지 거버넌스와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거버넌스는 실현되지 않았고, 혹 조성돼 있다고 하더라도 거버넌스보다는 거버먼트의 하위조직에 불과하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이런 상황에서 ‘거버넌스 블록체인’은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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