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어스름을 밀어내는 햇살이 보인다. 깊은 잠으로 배터리가 충전된아이들은 생기가 넘친다. 아랫집에 폐를 끼칠까 봐, 살금살금 화장실에 다녀오라고 속삭였다. 따끈하고 꾀죄죄한 아이들을 한 명씩 안아 든다. 밤사이에 약간 부은 눈, 말라붙은 코딱지, 까치집이 된 머리카락과 입에서 나는 단내마저 사랑스럽다. 장난감이 쌓여있는 베란다로 나간 아이들이 놀잇감을 들고 와서 역할극을 시작한다. '길어야 15분 정도 얌전하겠네.' 생각하며 프렌치토스트를 만드느라 마음이 분주한데, 갑자기 작은 발 여섯 개가 콩콩대는 소리가 들린다. 놀라서 쳐다보니 아이들이 한 번의 도약마다 반바퀴씩 몸을 돌리면서 '엄마 이것 좀 봐요!'하고 외친다. 세 아이가 저마다의 박자대로 도는 모습은 막 태어난 별들의 춤 같았다.
결혼 전에는 자유로웠다. 가끔은 친구와 야구경기를 직관하려고 연차를 썼다. 낯선 곳에서 하루를 자고, 느릿느릿 해장을 마쳤다. 그리고 근처 문학관을 거닐고, 지역 특산물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포장해 온 음식을 먹으며 책 두세 권을 읽고는 충분히 쉬었다. 내 마음대로 흐르며 살아도 제때 출근해서 일 인분의 밥벌이만 하면 되니 거릴 것이 없었다. 결혼하고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남편과는 농담에 웃는 지점이 같았고, 취미에 대한 존중이 합의되어 있어서 자전주기가 달라도 얼핏 보이는 모습으로 서로의 행복도를 판별할 수 있었다. 그래서 편했다.
아이들은 예측할 수 없었다. 세 시간마다 배고프다며 울지만, 먹이면 토하기 일쑤였던 달송이. 잘 먹이고 씻겨서 재웠는데 새벽 두 시마다 깨서 분유를 먹고 꼭 큰일을 보던 알송이. 바다는 낮에는 참 순한데, 재우기가 힘들고 다섯 시만 되면 종달새처럼 일어났다. 하루를 살아내는 아이들의 흐름은 제각각이었다. 세 아이는 아플 때만 마치 하나의 궤도를 공유하듯 동시에 반응했다. 열 때문에 저마다 꽃을 피운 아이들은 옹기종기 앉아서 블록놀이하기를 좋아했다. '약 먹을 시간이네.'라고 말하면 똑같은 내복을 입은 아기새들이 달려와서 입을 벌리고 약을 받아먹었는데, 마치 소행성들의 우주쇼 같았다.
작은 별들 덕분에 나의 흐름은 변주를 거듭한다. 아이들이 건강할 때는 어린이집에 보내고 글도 쓰고, 책도 읽는다. 아프거나 방학이라 집에 있으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삼 남매를 돌본다.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엄마인 나'를 장착하고 나머지는 내 행성 뒤편에 쌓아둔다. 그래도 지금은 버겁지 않다. 십 년 후의 사춘기가 걱정이다. 마음의 질량과 몸의 부피가 늘어나면 저마다 자전하는 속도가 달라질 테고, 아이들은 마음 가는 대로 모습을 드러내겠지. 쏜살같은 저마다의 하루에서 그늘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 뜨거운 지지를 보내야 하는 지점을 파악해서 기운을 북돋워야 한다.
어긋난 마음의 경로를 재설정하는 것은 긴 시간이 필요했다. 엄마의 우울증과 나의 사춘기는 가족만 알 수 있는 서로의 약점을 집요하게 할퀴었다. 엄마와 나는 이 시간을 깊이 후회한다. 그러니 내가 더 크게 눈을 떠야겠지. 그런 모습도 너라고, 그럴 수도 있다고, 그걸로 됐다고. 말해줘야 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른 아침을 걷어내며 방에 들어가서 한 명씩 데리고 나오면, 지금은 고 작은 손으로 내 손가락 두 개를 맞잡고 '헤헤'하고 웃어주지만, 머지않아 나보다 친구가 우선인 날이 올 것이다. 혼자 있고 싶다며 문을 걸어 잠그기도 하겠지. 태어나서 처음 먹는 초콜릿우유에 기뻐하던 표정도 아직은 내 것이지만, 언제쯤 들어올지 궁금해서 망설이다가 건 내 전화는 모른척하고 술자리에 몰두하는 스무 살의 밤이 오리라. 나는 조금 슬플 것 같다. 그래도 그렇게 가끔은 오만하고 아름다운, 실수투성이 성인으로 키워내는 게 나의 역할임을 잘 알고 있다.
그릇이 작은 나는 8월의크리스마스처럼 쏟아진 선물 같은 세아이만으로도 넘칠 듯 찰랑거린다. 두 발로 버텨온 모든 시간과 그 시간을 지나오며 했던 경험을 쏟아서 지금은 그저 알쏭달쏭하기만 한 아이들의 미래를 지켜낼 예정이지만, 때로는 한 아이에게 너무 몰두하거나, 한 아이가 소외감을 느낄까 봐 겁이 난다. 같은 바다에서 출항한다는 공통점에 기대어볼까. 부디 또래인 세 아이가 서로의 자전을 공유하면서 내가 놓친 부분을 서로 보듬어주길 바란다. 너희의 자전이 가끔은 불안해도 대체로 평화롭길, 그 성장의 궤적을 내가 차분하게 지켜낼 수 있기를. 나의 중력은 너희이니까 힘내볼게. 바라건대, 이제 예측 가능해도 보게 되는 주말 드라마의 엔딩처럼 뻔하게 빈틈없이 행복만 하자. 욕심이 너무 큰가. 그래도 클리셰는 사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