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눈을 밟지 못한다는 것
강원도에서 보낸 첫 시즌, 정말 설레었던 기억이 난다. 나에게 있어서는 제대로 맞이하는 2번째 시즌이었고, 누군가 내게 '2번째 시즌쯤이 가장 재밌지'라고 부러운 듯 말했다. 하하 웃으며 항상 재밌을 걸? 하고 머릿속으로 반문했지만! 그만큼 난 스노우보드에 푸욱 빠져있었다. 2324 시즌의 시작이었다.
보드도 탈 줄 알겠다, (원래 자신감 곡선은 초반에 정점을 찍는 법이다) 넓은 스키장도 있겠다, 겨울이 다 내 것만 같았다. 오고 가는 버스에서, 밤에 시즌방에서 틈틈이 시험공부를 하며 주말마다 스키장에 갔다. 강원도의 거대한 스키장, 대학생 또래들과 보드를 타는 것도 처음이었다. 종강 이전의 시즌방엔 정말 보드를 좋아하는 사람들 뿐이었는데, 특히 우리 방에는 파크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파크는 킥커(점프대)나 박스(네모난 받침대)같이 점프, 기술을 구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구조물이다. 모든 스키장에 파크가 있지는 않다. 위험성과 관리의 문제로 작은 스키장에서는 파크를 없애는 추세다. 휘닉스파크가 보더들의 성지로 불리는 이유는 그런 파크를 질 좋게 오래간 유지하기 때문도 있다. 지산에는 없던 파크에 신이 났던 나는 그들을 따라 곧잘 파크에 들어갔다. 자랑은 아니지만 보더로서 넘어지는 데는 자신이 있었기에, 열심히 넘어지며 파크를 배웠다.
그 중에서도 킥커가 좋았다. 작은 킥커는 마치 하늘을 나는 느낌을 선사했다. 파크를 드나들며 점점 슬로프는 시시하게 느껴졌다. 조금 라이딩 연습을 하다 리프트에 사람이 많아지는 것 같으면 휙 파크로 가버렸다. 종강을 훌쩍 넘기고 정신없이 보드를 탔다.
파크에서 넘어지며 다쳤던 무릎이 쉽게 낫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본가에 갔을 때였다. 크게 다친 건 아니었지만, 보드를 타기에는 무리가 있어 쉬기를 결심했다. 스키장에 있지 못하는 사실이 속상하고 억울했다. 온전히 나의 잘못인데도 말이다. 쳐져 있는 내게 엄마아빠는 생전 처음 레터링 케이크를 선물해 주었다. "눈꽃세상으로의 복귀를 기원하며"라는 문구와 함께. 생일에도, 수능에도 이런 선물은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놀람과 함께, 속상해하고 있던 나를 반성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을 정말 못 견디는구나 하고 말이다. 또 한 가지 놀랐던 건, 나를 응원해 준다는 것. 또 스키장이냐는 웃음 섞인 말들 속에는 내가 즐거우면 되었다는 은은한 애정이 녹아있었다. 그들의 응원을 삼키고 차분히 다시 스키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다시 들어간 스키장, 다짐처럼 차분히 보드를 탔다. 그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사실 보드를 타며 무섭다고 생각한 적은 잘 없었다. 겁이 없어서 빨리 배운다는 칭찬들은 괜히 어깨를 으쓱하게 했다. 감속이라는 마땅한 본능도 겁과 함께 타고나질 못했지만, 속도감을 즐기는 스포츠에서 그건 재능으로 보였다. 용감은 나의 자랑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항상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갔다.
스키장에 돌아가고 며칠 후였을까, 나는 하늘에서 생각했다.
무서워. 누구든 제발 살려줘.
그날은 가장 높은 벼랑에서 떨어진 날이었다.
여느 날처럼 하단의 미니파크에서 킥을 연습하고 있었다. 그날도 오전 내내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즐겁게 파크를 타고 있었다. 신난 나는 메인파크도 이것과 똑같이 뛰면 된다고, 가보자는 말에 덥석 리프트를 탔다. 메인파크는 상상보다 훨씬 컸다. 킥커는 저 멀리에 있었고, 나는 원래 뛰던 것처럼 그대로 직활강을 했다. 속도만큼 높이 날아올랐다.
정말로, 난 그 위에서 한참을 있었다는 생각을 한다. 저 멀리 리조트까지의 풍경이 보였다. 내가 정말 좋아했던 곳인데, 그곳을 향해 살려달라고 외치고 싶었다. 소리를 질렀던가, 그저 놀랐던가. 그것까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추락은 아프지 않았다. 팔을 움직일 수 없고, 머리가 조금 띵했을 뿐이었다. 스노모빌과 차에 실려 거대한 화면이 있는 진료실에서 5조각 난 내 위팔뼈와 조각난 손목뼈를 마주했을 땐 이미 부모님도 달려온 후였다. 그들 앞에 설 면목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의 뒷좌석에 타서, 그들이 보살펴 주는 병실에서, 그들의 보금자리에서 나의 상처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주어야만 했다. 나의 모험을 응원해 주었던 보답으로서 이런 시간을 선물한 것이 슬펐다. 그래서 갈라진 뼈 같은 건 아프지 않았고, 아플 수 없었다.
병원일정 탓에 다치고 일주일이 지나서 수술을 할 수 있었다. 수술 전 날 밤,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아빠에게 병원 복도를 산책하자고 했다. '수술... 걱정되는 것도 같아. 아빠는 안 무서웠어?' 아빠는 내가 어렸을 때 큰 교통사고로 다리수술을 한 적이 있었다. 괜히 그런 아빠에게 무언가 응원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생각보다 담담한 말이었다. '네가 할 건 누워있는 것뿐이잖아. 하나도 어렵지 않아. 바꿀 수 없는 일을 걱정해서 뭐해' 그 말에 덮여 나는 깊이도 잠들었다. 내가 용감히 수술방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아빠 덕분이었다.
7시건에 걸친 긴 수술은 다행히 잘 끝났다. 며칠 간의 입원 후에 퇴원을 맞이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남아있는 한 팔(다행히 오른팔이었다!)로 맛있는 것을 잔뜩 먹고, 건강한 두 눈으로 보고 싶던 드라마를 실컷 보았다. 엄마아빠의 퇴근을 맞이하고 밤이면 산책에 나갔다. 지금 돌아보면, 징그럽던 팔을 달고 있던 그 시간은 굳이 따지자면 행복 쪽에 가까웠다. 욕심도, 걱정도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곁엔 항상 따듯한 애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부상으로 겨울시즌을 마무리하지 못하는 것을 시즌 아웃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나는 완벽한 아웃을 경험했다. 팔에 흉터가 없었을 때, 시즌 아웃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안쓰러운 남 이야기였던 때가 그립기도 하다. 그럴 때마다 아빠의 말을 생각한다. 바꿀 수 없는 것은 생각할 필요 없다고. 그 시간들이 만든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생각하면 된다고. 리프트를 타자고 했던 그에게 화가 났다. 하필 더 딱딱했단 그날의 눈을 원망했다. 모든 게 나의 시간임을 인정해 나가는 건 말처럼 쉽지 않았지만, 조금씩 그래볼 수 있었다.
아웃을 당한 선수는 관중의 탄식 속에서 경기장을 나가야 한다. 누구보다 아쉬운 것은 선수일 텐데도. 자책과 아쉬움을 안고 그는 조용히 팀이 있는 벤치로 들어간다. 다음 차례가 올 때까지 충분히 머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벤치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했던 겨울이던가. 그들의 두터운 품에서야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다시 경기장에 갈 수 있다면 멋지게 해낼 거야. 누구도 원망치 않도록, 모든 순간이 온전히 나일 수 있도록. 씩씩한 뒷모습과 돌아서서 보이는 환한 웃음을 반드시 그들에게 보여주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