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뭐든 말이야
내가 보드를 제대로 타기 시작한 건 2223 시즌(2022년도 겨울~2023년도 봄까지 이어지는 시즌)부터였다. 장비와 시즌권을 사고, 시즌방도 구했다. 베이스는 지산, 오전 야간 가리지 않고 매 타임 보드를 탔다. 여전히 대부분의 시간은 혼자였지만. 그날도 혼자 야간 보딩을 단단히 준비하고 락커에서 나가는 길이었다.
"이거 보드 센터링 맞아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돌아보니 어떤 아저씨가 서있었다. 당황한 탓에 그가 누군지에 앞서 '센터링이 뭐지?'하는며 급히 머릿 속을 뒤적거렸다.
"잠깐 일로 와봐요"
그는 슬로프 앞의 테이블로 나를 데려갔다. 그곳엔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아저씨들이 몇몇 더 있었다. '새로운 보드네' '처음보는 거잖아? 누구꺼야?'
'그러지 말고 거기 드라이버 없어?' '아 나 있어 자 만능 드라이버' 자연스러운 만담 틈에서 그 아저씨는 '센터링이 안맞잖아 거봐 지금 너무 넓게 타고 있는거야' 라며 내 보드를 고쳤다.
'자 다시 타봐요' 하고 돌려받은 보드에 얼떨결에 '감사합니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분은 국내외 스노우보드 자격증을 지니고 계신 베테랑이셨다. 매일을 혼자 그곳에 있던 내가 눈에 밟히셨단다. 처음, 스키장에서 인사를 건냈다. 그 후로 어렵지않게 충신이삼촌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이름이 맞는지 아직도 확신이 없다. 춘식, 충신, 충식이.. 헬멧을 넘어 들리는 뭉그러진 소리 탓에 그 부근의 이름이라고만 생각했다.
그제서야 보드와 눈만 보였던 스키장에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산은 작은 스키장이라 자주 보이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스키 강습을 뛰면서도 보드가 좋아 강습만 끝나면 보드로 갈아신던 강사님, 늘 초등학생 아이들을 데리고 오던 엄마아빠 보더들, 헬멧에 투슬리스 인형을 달고 다니던 삼촌. 투슬리스 삼촌은 어느날 리프트에서 '저분은 60대셔. 덕분에 10년은 더 보드탈 용기를 얻었지 하하' 하고 말했다. '꼭이요'하고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보드를 타고 슬로프 앞 쉼터로 향하면 알고 있는 얼굴들이 조금씩 늘어났다. 스노우보드를 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름도 모른 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서로에 대한 친분이 아니라 한 다리씩 건너 있던 애정이었다. 그건 맺어왔던 관계들보다 간접적이었고 피상적이었지만, 취약하다고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스노우보드를 들고 있는 한 우리는 언제든 웃으며 인사를 나눌 테니까. 그런 단순성이 좋았다.
그해 1월 말에는 스노우보드 자격증 시험을 보았다. 처음 차보는 빕에 느꼈던 설렘도 잠시, 시험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시험보다도 슬로프에 앉아 대기해야 하는 시간이 문제였는데, 눈바람이 휘날리는 설산에 가만히 앉아있는 그것이 챌린지였다. 밤 9시가 넘어가며 눈보라는 거세졌다. 오들오들 떨리는 이가 시험에 집중하려는 두뇌를 자꾸 흔들어놨다.
겨우 시험을 마치고 슬로프 앞에 있는 쉼터로 향해 결과 발표를 기다렸다. 쉼터에는 밤이지만 꽤 많은 분들이 계셨다. 몸에 서린 추위 탓인지 긴장감 탓인지 떨림이 곧잘 멎질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감독관이 나왔다.
'오늘 시험보신 분들 결과 발표하겠습니다'
'기본점수 70에 종목별로 점수 부르겠습니다. 빕넘버 순입니다.'
베이직 0 0 -1 0 0 -1 0
팬듈럼 -1 0 0 -1 -1 0 0
...
...
활강 0 0 0 +1 0 -1 0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딱점이었다!
7명 중 합격자는 나 뿐이었는데, 어려운 시험은 아니었지만 까다롭기로 유명한 감독관이어서 였다. 지산이 베이스인 내게 어차피 감독관을 선택한 여유 따위 없었다. 안도감(시험비 10만원은 대학생에게 사치다)과 지산의 자존심을 지켰다는 뿌듯함을 어서 이야기하러 다시 쉼터로 달려갔다.
"저 합격했어요!!"
'오~ 이제 강사님이네' '거봐 붙었지?' '고생했다 늦었는데 얼른 들어가'
참아온 추위는 다 환상이었다는 듯, 몸이 화끈거렸다. 한껏 신나 달려간 것이 무색하게 나는 과장한 웃음으로 눈물을 감췄다.
한사람 한사람과 함께 보드를 탄 시간들이 머리속을 스쳤다.
리프트에서 곧잘 떠들던 삼촌
저 강사님은 내 토펜듈럼을 교정해 주셨던 강사님
항상 간식을 쥐어주던 언니
눈발 사이를 빨갛게 내리 쬐던 적열등이 과하게 뜨겁다고 생각했다. 시험날 확인한 건, 쌓아온 건 보드 실력이 아니라 지나온 겨울의 소중함이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