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르겐 하버마스가 떠났다. 그가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독일의 철학 거장 위르겐 하버마스가 지난 14일 96세로 세상을 떠났다. 부고가 뜬날, 한국의 뉴스 피드 한쪽에는 그의 사망소식이, 다른 한쪽에는 비판 보도를 이유로 기자들을 고발한 권력의 기사("김어준 겸손은 힘들다. 공소취소 거래설..")가 나란히 올라와 있었다. 이보다 잔인한 부고는 없다.

하버마스는 평생 하나의 질문을 붙들었다. 권력도 돈도 아닌, 오직 더 나은 논거만으로 사람들이 서로를 설득할 수있는가. 그는 그럴 수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에 '공론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공론장이 지금 한국에서 살아있는지, 적어도 나는 확신할 수 없다.

그는 1962년 공론장이 타락하는 방식을 미리 적어두었다. '재봉건화' — 권력과 자본이 광장을 점령하고 시민의 토론이 스펙터클(권력의 일방적 연출)로 대체되는 현상, 그 진단은 60년 뒤 한국에서 교과서가 됐다. 그러나 정부(총리실 등)는 불편한 보도를 가짜뉴스로 규정하고, 특정 언론은 정파의 선전 기구로 기능하며, 일부 법정은 담론의 전장이 됐다. 이해를 지향하는 소통은 사라지고,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전략적 행위만 남은 모습이다.

유튜브는 더 교묘하다. 스스로를 열린 광장이라 부르지만, 알고리즘은 합리적 설득이 아닌 감정적 자극을 보상하고 진영을 격리한다. 권력자들은 유리한 채널에는 출연해 팬덤을 결집하더니, 불리한 비판에는 '언론이 아니므로 책임도 없다'며 응수한다. 하버마스가 모든 공적 발화에 요구한 세가지 — 사실에 부합하는가, 규범적으로 옳은가, 진심인가 — 는 이 구조 안에서 더이상 의미가 없다.

하버마스에게 권력의 정당성은 선거 승리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비판에 노출되고 검증받는 과정을 통해서만 갱신된다. 비판은 권력의 적이 아니라, 권력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유일한 통로다. 그 통로를 막는 것은 정치적 전술이기 이전에 민주적 정당성에 대한 자기 부정이다.

그는 낙관주의자였다. 인간은 대화로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그 낙관주의는 순진함이 아니었다. 광장이 파괴됐다면 다시 세우라는, 담론이 오염됐다면 정화하라는 요청이었다.

하버마스는 이제 떠났다. 그러나 그의 교훈은 남았다. 답할 의무는 이제 우리에게 있다.

-어느 언론학 박사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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