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눈의 목격자와 김사복
당신에게도 있겠지, 가슴속에 잊지 못하는 이 한 두 명쯤. 그리고 그들을 함께 한 시간에 비례해 우선순위를 매기지는 않을 것이다. 함께한 시간이 길어 남게 된 이도 있으나, 찰나를 함께 했어도 가슴에 깊게 인각印刻이 되는 이도 있으니. 극 중 만섭은 후자에 해당된다. 함께한 그날, 생사生死를 넘어서며 함께 진실을 알렸던 이름 하나 알지 못하는 손님을, 그는 잊지 못할 것이다.
택시 운전수 김만섭
내가 초등학생일 때쯤, 나의 아버지도 택시기사를 업으로 삼고 계셨다. 아기 새를 먹이기 위해 일찍부터 날개를 펴는 어미새처럼, 수년을 변함없이 조용한 새벽에 일과를 시작하셨다. 아버지는 개인택시가 아닌 회사에 소속된 기사였기에 출·퇴근길은 늘 두발로 움직이셔야 했다.
매일 같이 새벽에 나가셨던 아버지는 늦은 밤이 돼서야 택시를 인계한 후에, 저 멀리서 걸어오셨다. 오른쪽 허벅지를 툭툭 치는 검정 봉지와 함께.
당시 살던 동네는 시간이 보이지 않는 기준점을 넘어서면 일순간에 주변이 죽은 듯 조용해졌다. 아버지는 매번 그 길을 밟으며 땅과 공명하듯, 멀리서부터 둔탁한 발소리를 울리며 걸어오셨다. 나보다 두배는 큰 아버지의 거대함 탓이었는지, 버거운 삶이 무심결에 걸음걸이에 묻어난 것인지 당시에는 구별할 수 없었으나, 홀로 딸을 키우는 만섭의 걸음에서는 알 수 있었다.
하나뿐인 딸을 위해
그는 딱히 신세한탄을 한다던가, 스스로를 가엽게 여기지 않는다. 지금의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악착같이 하루하루를 쌓아갈 뿐인 현시대의 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남자다. 오롯이 자신과 하나뿐인 딸을 위해서.
주인집에 어깨 한 번필 수 없을 만큼 사글세가 막막하게 밀려있어도, 엄마 없이 자라는 딸아이를 위해 더 악착같이 강단剛斷을 발휘하는 단단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데모를 한답시고 학교도 안 가고 동네를 시끄럽게 하는 청년들에게 배부른 짓을 한다며 혀를 차는 그를 나쁘다고 할 수 없다.
대한민국이 얼마나 살기 좋은 나라인데
그는 나라의 사정이나 청년들이 데모를 하는 연유에 대해 관심 갖지 않는다. 오직 안중에는 자신과 딸 만이 전부인 사람. 그래서 주변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두었다면 알 수 있었을 광주의 사태도, 그는 알지 못했다.
그저 외국 손님(위르겐 힌츠페터)을 광주까지 데려다주면 10만 원을 받는다는 솔깃한 이야기에, 한치의 의심도 없이 입맛만 다실뿐이었다. 그에게 10만 원이란 돈은, 수개월 밀린 사글세를 모조리 청산하고 주인집에 큰소리 칠 수 있는 거금이었으니 말이다.
결국, 젊었을 적 사우디에서 일하며 배운 영어실력도 있겠다 만섭은, 하늘이 준 기회라 생각하며 손님을 데리고 광주로 향한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통금과 장발단속, 군인들의 탄압이 비일비재했던 폐쇄적 시대 1980년. 택시가 향하던 그날 광주에서는 5·18 민주화운동(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에 의해 시해弑害된 이후로 전두환 일행이 군사통치로 회귀하려는 듯, 민주헌정을 정지시키고 민주 정치 지도자를 투옥 및 비상계엄령 선포, 언론 통제 등 군사독재를 강행하면서, 불만이 극에 달한 국민들이 벌인 저항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으나, 군에 의해 격리되어 외부로 어떠한 진실도 알릴 수 없었다. 어떠한 위험이 있을지 모를 그곳으로, 만섭과 위르겐 힌츠페터가 향했다. 한 사람은 돈 때문에, 한 사람은 우리가 하지 못한 진실을 알리기 위해.
영화는 민주화운동이 벌어지고 있던 광주의 그날을 배경으로 삼고 있으나, 직접적으로 사건을 다루지 않고 사건 발발 후에 비극을 중점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마치 총알이 발사되기 전이 아닌, 총알이 발사된 후의 장면만을 다룬다. 그렇기에 그날 사건의 진상을 보고자 했던 관객에게는 실망감이 들 수도 있다.
광주에 도착한 후에 맞닥뜨린 참혹한 광경에 만섭은 마음에 동요가 일어난다. 가슴 깊은 곳에 진실에 의한 슬픔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고, 진실을 가리는 거짓에 억울한 눈물을 흘리기까지 한다. 비극을 마주한 외부인 만섭의 시점은 스크린을 통해 바라보는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자연스레 만섭과 동등한 입장으로 동화되어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건 어쩌면 어릴 적 배운 '5.18 민주화 운동'을 그저 역사에 일부로 써가 아닌, 참담했던 비극을 되짚어 보길 바라는 감독의 의도된 연출인 것이라 생각된다. 이정도면 실망감을 해소할 합당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그날에 비극은 애지중지하던 자신의 차를 희생할 정도로, 자신과 딸만을 위해 움직이던 만섭을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인간으로 성장시킨다.
택시 운전사
영화는 실제 사연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당시 광주에서 벌어진 이 비극은 실제로 군에 의해 통제된 언론이 허위 뉴스를 전파함으로써, 외부와 단절된 광주의 참상을 누구도 알 수 없었고, 사실을 알게 된 독일 언론인 위르겐은 실상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택시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고 한다.
결,국 위르겐 힌츠페터의 위험을 감수한 수고는 광주의 참상을 전 세계가 알게 했고, 사건 종결과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앞당기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된다. 그런 그는 자신과 위험을 함께 해준 택시 운전사를 잊지 못한다. 영웅은 그를 영웅이라 말한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당시 택시 운전사는 우리에게 모습을 비추지 않고 있다. 어쩌면 그는 "단지 손님을 태워준 것일 뿐"이라며 지금 이 순간도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히 그에게도 꼭 전해야 한다. 감사하다는 말과 위르겐의 마음을.
그날의 모두는 영웅이었다. 영화 '택시 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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