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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성배 Oct 03. 2017

파스텔을 좋아한다.

손톱이 거친 표면을 긁는 소리가 싫음에도.

학교의 회색 외벽에 푸른색이 은은하게 돌고 있던 시각. 아직 새벽빛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이었다. 나는 누구도 보채지 않는 그 시간을 남들보다 서둘러 밟기를 좋아하던 학생이었다. 꼭두새벽부터 문을 여는 문방구 아저씨에게 밀려 늘 두 번째였으나, 개의치 않았다. 순위와 상관없이 새벽은 그 순간을 방문하는 모두에게 똑같은 양의 감동을 주었으니까.


그러나 매일매일 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루프에 갇힌 것만은 확실했다. 변함없이 새벽은 내리더니 이 시간쯤 되면 떠날 채비를 꾸려 부스럭 소리를 냈고, 매번 그 소리에 깬 어린 나에게 등을 보였더 랬다. 그래, 사실은 지루한 나날이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미술이 있던 날은 예외였다. 무엇인가 새로운 게 손 끝에서 그려지는 날은 갇힌 일상을 절묘하게 환기시켜 주었다.

미술 시간이 있던 그 날, 준비물은 '파스텔'이었다. 네 면이 균등하게 각이 져 길쭉한 몸매를 자랑하던 파스텔. 48개가 어느 하나 중복되는 것 없이 다양한 색을 갖고 있었다. 같은 듯 같지 않은 바래진 듯한 색상들. 흐리멍덩하다고 보는 이도 있었다. 매가리 없는 색들에 집합이라 흉을 보는 이도 있었다. 하나, 난 손톱이 종이를 긁어내는 듯한 소리를 매우 싫어하는 사람임에도 그 소리를 숙명처럼 뱉어내는 파스텔을 좋아했다. 그 파스텔이 갖는 은은한 풍채에 사로 잡혔었다. 세상이 가진 명명할 수 없는 수 만의 색을 가장 근접하게 칠해낼 수 있는 위대함을 갖은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스텔을 좋아했다. 펄의 느낌이 가득한 파스텔에 가까이 코를 대면 특유의 색향色香이 피어올랐다. 색깔이 갖는 특징이 단지 깔에만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된 건 그때부터였다. 깔을 넘어 차가움, 따뜻함, 안도감 같은 것들이 마음에 칠해졌다. 파스텔이 가진 깔의 거친 소리는 도화지를 입히고, 향은 은은하게 마음을 칠했다.


냉혹하고 편파적인 세상에서 가장 유한 풍채를 품기는 파스텔은 어쩌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이상적인 삶의 궤적을 그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늘 어느 한편에 기울어져 한편의 입장만을 고려하고 판단하여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중립적인 위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세력의 싸움이 아니라, 본질의 싸움이어야 한다. 네 편 내 편을 갈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싸움을 일으키는 요소를 해결하는데 집중해야 한다. 세상은 단색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우리가 우러러보는 하늘만 해도 정의할 수 없는 모호한 색으로 시시각각 모습을 달리 한다.


모호함이 천하를 이루는 세상. 편파적이지 않아야 한다. 상대와 나를 동일 선상에서 생각해야 함을 알아야 한다. 멀끔한 정장 차림에 외벽이 하늘을 비추는 건물로 들어가는 저 분만이 세상을 바른 시선으로 볼 수 있고, 가장 위대한 답을 구하는데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없다.


당장 어깨에 먼지를 잔뜩 업어진 채 흙더미를 나르는 저분도 피부로 몸소 거친 바닥에 긁히며 버텨온 세월인 만큼, 가장 피 같은 답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파스텔은 모호한 색을 지녔다. 하나, 무수無數에 가까운 색을 지닌 세상을 통칭할 수 있는 유일한 색이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이상적인 동화력. 그렇기에 난 파스텔을 좋아한다. 그것으로 삶을 사는 것이 진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 사진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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