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탑에서 끓어 오르던 주전자
초등학교 6년 중 이제 겨우 반절 정도를 해냈을 무렵. 우리 집은 회색빛 건물의 옥상에 있었다. 화장실 하나가 유일한 두 번째 방으로 딸려 있던 옥탑은 가스레인지가 불을 밝히는 주방도 거실도 우리가 잠드는 침실도 '겸'이라는 음절 하나로 통일이 되어 있던 단칸방 이었다. 싱크대 위에 놓인 흰색의 도마에서 재료를 써는 소리와 불 위에서 끓고 있는 찌개 소리 모두가 한 칸의 방에서 울려 퍼지던 집. 자그마한 그 집에서도 어머니는 보리차를 끓이셨다.
열전도율이 높은 스테인리스 재질의 주전자에 수돗물을 80% 정도 채운 다음, 동서 식품에서 나오는 보리차 티백을 두 장 정도 넣어 20분 가량을 끊이면 방안에는 금세 뜨거운 열기가 차올랐다. 겨울에는 난방을 대신할 만큼 유용했으나, 여름철에는 밖이 더 나을 정도로 실내 온도를 높였었다. 어머니는 주전자 안의 투명한 물이 짙은 갈색이 되어 구수한 맛을 입을 때까지 끓이는 일을 사계절 내내 하셨다.
그렇게 완성된 보리차는 우리의 식수이며, 간식이며, 건강 음료였다. 오래된 스테인리스 주전자는 이미 반짝이던 표면이 닳고 닳아 뿌옇게 변해 있었음에도 오랫동안 팔팔 끓여야 했던 보리차 만드는 일을 끄떡없이 해냈었다.
나이가 든 지금도 보리차를 마셨던 그때 입맛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다. 직접 끓여 먹지는 않으나, 꾸준히 '하늘 보리' 라 불리는 음료를 사서 음료수와 식수를 대신해 먹는 중이다.
보리 그리고 차
보리차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보리를 사용하여 만든 차의 종류이나, 보리 뿐만 아니라 옥수수와 우엉 같은 재료를 일정량 섞어 끓이는 경우가 더 많다. 보리 하나 만을 사용하여 끓여도 무방하나, 보리 만을 넣고 끓이면 특유의 떫은 맛이 생기기 때문에 보통은 타 재료를 함께 섞는다.
보리 자체의 구수한 맛도 좋지만 옥수수와 함께 끓이면 그 맛이 배가 되기에 보통 옥수수를 가장 많이 섞는다. 과거 배고팠던 시절에는 그렇게 끓인 보리차를 마심으로써 잠깐의 허기를 달랬기도 했다고 한다. 쌀이 귀했던 윗 세대 분들에게 보리는 쌀의 대용이었고, 배고픔을 달랠 수 있는 몇 안되는 식량 중 하나였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 보리는 더 이상 대체품이 아닌 건강을 위한 식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현 시대 사람들의 식습관이 서구화 됨에 따라 쌀보다 패스트푸드를 섭취하는 일이 더 늘어나면서 과거에 비해 비만, 당뇨, 고지혈증 환자가 급증하게 되었는데, 보리의 식이 섬유인 '베타글루칸'이 대장에서 담즙과 결합한 뒤 몸 밖으로 배설되면서 혈중 지질 수치를 낮추고 혈당 조절에도 도움을 준다는 사실이 확인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보리는 단순한 곡식을 넘어 건강한 삶을 위해 챙겨 먹어야 하는 약이라 할 수 있다.
보리차 끓이는 법
보리차는 보리를 어떻게 볶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데 이는 마치, 커피의 맛을 좌우 하는 요소 중 하나 인 '원두의 로스팅' 기술과 비슷한 맥락이다. 보리차는 '겉보리'를 제일 많이 사용하며, 껍질이 탈 듯 말 듯할 정도로 약불에서 서서히 볶아야 보리의 풍미를 최대한으로 끌어낼 수 있다.
또한, 볶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닌 끓일 때도 주의를 요하는데, 끓는 물에 보리를 넣은 다음 물이 넘치지 않을 정도의 화력으로(중간불 정도) 색깔이 날 때까지 끓여야 한다. 혹여나 약불로 천천히 끓이면 보리 속에 함유된 전분질이 녹아 맛을 해칠 수 있으니, 좋은 보리차 맛을 내기 위해서는 잊지 말아야 겠다.
좀 더 특별한 보리차를 즐기고 싶다면 위와 같은 방법을 이용하는 것을 권하지만, 오래 전부터 이미 시중에 볶은 보리와 보리차 티백이 나오고 있으니, 이를 이용하는 방법이 가장 쉽다고 생각된다. 하나, 선택은 소비자의 몫이니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보리차를 즐기면 되겠다.
보리차를 맛보다
자취하던 시절, 볶은 보리 한 주먹을 우연찮게 얻은 날이었다. 보리차를 물 대신에 먹다 보니 인터넷에서 주기적으로 하늘 보리 1.5L를 12병씩 주문했었는데, 그걸 알고 계시던 지인 분이 직접 끓여 먹어보라며 선물해준 것이다. 하지만 딱 보리만 선물해 주셨기에.. 끓일 때 필요한 옥수수와 차망, 주전자를 따로 구매해야만 했다.
저녁 8시쯤 새로 산 주전자에 물을 담고 가스레인지에 올려 끓이기 시작했다. 운 좋게 어머니가 쓰셨던 것과 비슷한 주전자를 사와서 인지 어린 시절 옥탑에서 끓어 오르던 노쇠한 주전자가 떠올랐다. 금세 물이 팔팔 끓어 올랐고, 불을 중불로 줄인 다음 보리와 옥수수를 적당히 섞어 채운 차망을 넣어 색이 우러나올 때까지 한번 더 끓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물의 색이 짙은 갈색을 띠었고, 본분을 다한 차망을 빼낸 다음 주전자 채로 냉장고의 빈자리에 넣었다. 끓인 보리차는 바로 차갑게 식혀야 구수한 맛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을 기약하며 잠을 청했다.
때는 초 겨울인 11월 이었다. 눈을 뜨니 게으른 아침이 아직도 햇빛을 불러오지 못한 7시였다. 방불도 켜지 않은 채 냉장고로 가 문을 열었다. 전날 넣어 두었던 주전자의 표면에는 연기처럼 아지랑이 꽃을 피운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살짝 댄 손 끝이 몽롱한 정신을 깨울 만큼 차가웠다.
조심히 주전자를 꺼내 빈 물병 두 개에 가득 따랐지만 여전히 주전자 안에 보리차가 남아 춤을 추고 있었고, 집에 있던 컵 중 가장 큰 것을 꺼내 따르고 나서야 주전자에서 빈 소리가 들렸다. 불 켜지 않은 방안에는 아침이 데려 온 퍼런 빛이 가득했으나, 갈색의 보리차는 기죽지 않고 눈에 훤하도록 색을 밝혔다. 눈을 뜨고 단 한 방울의 물도 마시지 않았던 마른 입에 보리차 한 컵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보리차의 극에 다른 청량감은 목을 타고 속을 채워 가는 동안에도 냉기를 그대로 유지했다. 갈증이 단숨에 날아가고 허기진 배 탓에 심심했던 입안에는 구수한 풍미가 그윽하게 퍼졌다. 입을 다시는 내내 구수함이 맴돌았지만, 거슬림 없이 입안은 깔끔했다. 허기는 아이 달래 듯 조심스레 자자 들었다.
시중에 나온 보리차와는 확연히 달랐다. 풍미며 청량감이며 어느 하나도 비교할 수 없는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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