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당신이 겹쳐집니다.
하늘에 가을 특유의 '멋'이 짙게 깔려 있다. 가식적인 겉멋이 아닌 당연한 듯한 멋스러움이 저녁 하늘을 채우는 덕에, 시시각각 시선을 빼앗긴다. 좋다 이 가을이. 따가운 볕과 달리 후미진 곳에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까지 다.
가을 분위기에 한껏 취해 정처 없이 한적한 저녁을 돌아다녔다. 조용한 거리든 북적이는 거리든 가리지 않으며 목적지가 없는 방황을 기쁜 마음으로 누렸다. 그러다 동네의 작은 시장에 발길이 닿았고, 저 멀리 여린 남자아이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자그마한 녀석이 말을 어찌나 잘하는지, "나이에 비해 키가 작은 걸까?"라는 의문까지 들게 했다. 똘똘해 보였다. 손에는 손 보다 두 배는 더 큰 사과 한 조각을 든 체, 입에 수시로 넣으며 오물 오물 씹고 있었다. 그 옆을 허리가 굽어진 할머님이 동행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작은 손주와 손주 앞에 장애물의 유무有無를 예의 주시하며 걷고 계셨다. 말은 없으셨다. 그럼에도 알 수 있었다. 긴 세월을 살아낸 사람은 말 보다 행동으로, 표정보다 눈빛으로 표현 할 수 있었다. '사랑한다' 말하고 있었다.
청주 창리에 홀로 사시는 할머니의 모습과 그 옆을 참새처럼 울며 매달리던 어린 시절의 내가 동시에 겹쳐 보였다. 그리고 무형無形의 힘이 땅끝으로 끌어 당기는 듯, 마음 어딘가가 주저 앉았다.
나는 정말 끝없이 당신에게 어린 아이군요.
저 아이 손에 들린 사과 한 조각을 보니, 지난 어버이날 찾아뵈었던 당신이 자연스레 떠올랐습니다. 12년 만이었습니다. 당신이 살고 계시는 '창리'를 찾아간 게. 단신單身으로 간 것은 처음이기 까지 했던 방문. 연락도 없이 찾아갔던 그날, 당신은 나를 보더니 눈시울을 붉히며 눈물을 뚝 하고 흘렸습니다.
순간 나는 해서는 안될 못된 짓을 범한 죄인처럼 안절 부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흘리는 눈물을 생전에 본 적이 없었으니 말입니다. 미안한 마음은 먼 길을 달려온 수고로움이 무엇이 대수냐며 다그치기까지 했습니다. 긴 말을 전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죄송하다는 말 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걸 다 사드리고 싶었습니다. 근사한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고른 것은 순대 국밥이 전부. 그거면 되었다고 한사코 거부를 하셨습니다. 결국, 마지 못해 식당에 도착했고, 주문한 순댓국에 나는 밥을 반 공기만 말아 숟가락에 대부분을 국물로 채우며 입에 담았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이 더 메어 무엇도 삼켜낼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아이가 아이를 벗어난 지 이미 오래고, 더 이상 나는 당신이 지켜야 하는 사람이 아닌 당신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지만, 당신은 여전히 나를 사과 한 조각 오물 오물 씹어 먹던 그 작은 아이로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문득, 지난 내 사랑들이 창피해졌습니다. 번데기 앞에 주름 처럼, 왕을 몰라보는 양반처럼 어리석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깟 사랑이 어쨌다고, 이깟 사랑이 얼마나 힘들다고, 나는 왜 죽는 소리를 끊임없이 했던 걸까요.
당신의 사랑은 평생을 보필하고 따라야 했던 남편이었고, 악착 같이 먹여 살려야 했던 자식들이었고, 다 굽어진 허리로 웃으며 보살펴야 하는 손주들이었던 만큼 평생을 받친 헌신이었는데. 바로 어제 일 조차 가물가물 한 기억력을 갖고도 쇠약한 몸으로 계속해서 이어가는 위대한 사랑이었는데.
그에 비해 나는 나의 사랑을 마치 대단한 듯 떠들었네요.
그래서 당신이 날 여전히 어린 아이로 볼 수밖에 없나 봅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오래오래 가르쳐 주세요. 당신이 일궈 낸 위대한 사랑을 차근차근 알아 갈 수 있게. 자잘했던 겉멋 든 사랑에서 내가 어른이 될 수 있게. 다 크지 못한 나의 성장을 언제까지고 옆에서 지켜 봐주세요.
난 여전히 당신에게 사과 한 조각 오물 거리는 저 아이와 다를 바 없으니, 계속해서 옆에 있어 주세요. 나도 당신을 언제 까지고 지킬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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