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MOVIE ESSAY

배려, 그 무자비함에 대하여

영화 <두 개의 빛:릴루미노>

by 전성배

사람이란 지성체가 동물과 차별을 이룰 수 있는 이유는 서로를 느끼고 함께 하며,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와 같으면서도 다른 모습의 사람의 현실은 전부 헤아릴 수 없다. 같은 신체 구조와 같은 여건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라 한들 절대적으로 전부를 헤아릴 수는 없다. 일찌감치 그 사실을 알았던 우리는 '이해' 혹은 '공감'과 같은 "헤아릴 수 다면 근접한 감정을 느끼자"라는 생각으로 '배려'하는 마음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따뜻하고 보드라운 감정으로 나와 다른 이를 대한다는 건 그에게 위협과 상처가 될 수 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뒤늦게 알아버렸다. 이미 우린 꽤나 오지랖을 부리는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

'장애인' 이란 신체의 일부에 장애가 있거나 정신 능력이 원활하지 못해 일상 및 사회생활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을 뜻하며, 앞머리에 '시각 장애인, 언어 장애인, 청각 장애인’처럼 불편한 신체의 명칭을 붙인다.

어릴 적 우리는 '장애인'은 단지 우리보다 몸이 불편한 사람일 뿐, 우리랑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사람이라는 교육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어린아이에게 편견이 생기지 않도록. 교육 이상의 노력 속에 우리는 자라왔다. 그렇게 어르신과 장애인을 보면 도와야 한다는 교육은 정의로운 마음과 위하는 배려를 키움으로써 보다 나은 어른으로의 성장을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었다.

측은한 시선이 그들에겐 화살이 되어 꽂힐 수도, 안타까운 손길이 그들에겐 두려움일 수도, 위하는 목소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


영화 <두 개의 빛:릴루미노>는 시각 장애인의 이야기를 다룬 30분 남짓의 단편영화이다. 영화는 짧은 시간 동안 오로지 시각 장애인을 중심으로 단출한 이야기를 꾸려 나가지만, 단순히 신체적으로 불편한 남자와 여자의 사랑만을 그린 것이 아닌, 그 짧은 시간 안에서 시각 장애인의 생계와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보다 두려운 비참하거나 혹은 두려운 타인의 배려까지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이 남보다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남보다 더 애처로울 수밖에 없었다. 뻔히 사랑하지만 화가 났고, 손잡고 싶었지만 피해야만 했던 그들.

'2018 군포의 책'으로 선정된 장성주 시인의 시집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처럼 영화는 어떤 거대한 줄거리와 제작비, 화려한 배우들의 향연이 없이도 따뜻하게, 단순하게 가슴을 두드렸다. 그게 가능했던 연유는 영상의 톤을 타 영화에 비해 한 두 단계 더 밝게 유지 함으로써 시각적으로 따뜻함을 제시했고, 어둠 속에 사는 그들에게 간접적인 어둠을 일부로 배척하려는 듯 온통 밝은 한낮의 장면만을 담은 것으로 제목이 갖은 의미를 영상에 짙게 깔아 뒀기 때문이다. 단 한 시퀀스만 나왔던 밤거리를 걷는 '형식'의 장면마저도 '수영'이 건네 준 플래시의 빛을 밝게 비추며 걸어가게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어둠을 배척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감독의 또 다른 의도도 정확하게 우리를 강타했다. 극의 중반에 등장했던 노쇠한 할머니의 손길에 겁에 질려 주저앉았던 '수영'의 불안한 표정으로, 그들에게는 어쩌면 무조건적인 도움의 손길이 무자비한 상처를 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전했다. 극 중에 등장하는 봉사 도우미들이 장애인 분들에게 일체 터치를 하지 않으며 말로만 안내하고, 뻔히 드러나는 사랑도 그저 지켜봄으로써 오로지 그들의 힘으로 이어가게끔 한 것을 보면 더욱더 명확해진다.

영화는 두 남녀의 사랑을 그렸다. 제목 <두 개의 빛:릴루미노>에서 '릴루미노'는 '광명을 되돌려주다'라는 뜻을 가졌다. 빛을 두 개라 말한 연유는 무엇일까. 그건 극 중 수영과 인수는 물리적인 어둠에 갇혀 살지만 서로를 만나는 것으로 하나의 빛을.


오직 둘의 힘으로 맞이한 빛을 대중에게 야기하는 것으로 스스로 해 나갈 수 있는 그들의 힘을 또 하나의 빛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우리에게 '무자비한 배려'를 한 적이 없는지 또한 물으면서.


영화를 본 직후에 나는 '소리의 형태'를 본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아니 봤다기보다는 느껴 본 적은, 아니 그 보다 앞서 소리의 형태를 논하는 거 자체가 정상적인 사고 인지 고민해 보았다. 시각 장애인은 형태의 목격의 기회를 완벽하게 상실한 상태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더 이상 아름다운 것과 그렇지 못한 것에 분별이 불가능하다. 아니 그렇다고 여겼다.

사실은 아니었다. 아름다운 것은 시각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신神은 그렇게 우리를 창조하지 않았다. 단지 감각 하나의 손실이 가져다주는 절망은 작은 것이라고. 얼마든지 촉감과 후각, 미각과 청각을 이용해 느낄 수 있다고.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못한 것의 구별은 눈 뜬 장님들의 사고일 뿐, 그들은 그 이상을 보는 사람들이었다. 모든 감각으로 아름다운 것에 형태를 이루는 힘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아름다움을 보는데 반드시 눈이 필요한 것은 아님을 아시길 바랍니다"


※ 사진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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