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한 경계가 가진 조화, 평양냉면

가까워지고자 했던 용기

by 전성배

지난 4월 27일, 11년 만에 성사된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한반도의 국민은 물론이고,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었던 밀도 높은 시간이었고, 당연히 그 안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일들은 주목 받을 수밖에 없었다. 북한의 지도자인 김정은의 표정과 말투, 글씨체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주목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남북정상회담의 환영만찬에도 당연히 이목이 집중되었다.


공식 메뉴는 <평양 옥류관 냉면>이었다. 후문으로는 회담 전날, 옥류관의 수석 조리사가 평양에서 제면기를 직접 가져와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실제로 면을 뽑아 냉면을 만드는 예행연습을 한 뒤 회담 당일에 선보였다고 전해진다. 그날 만찬 메뉴로 평양냉면이 등장하자 우리나라 평양냉면집이 뜻밖의 특수를 누리기도 했다.

함흥냉면, 진주냉면과 달리 평양냉면은 처음 맛본 사람들이 열이면 열 슴슴하다 할 정도로 간이 약한데, 누군가는 맹물에 소금 간을 약간 한 정도라고 말하기도 한다. 평양냉면 특유의 맛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평양냉면의 본고장인 평양은 한반도 서북부의 문화·경제 중심지로 들이 넓어 밭곡식이 많이 날 뿐만 아니라, 서해가 가까워 해산물은 물론이고 과일도 풍성해 음식에 다양하게 접목시키면서 자연스레 음식이 발달 된 곳이다. 평양냉면 맛의 시발점은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식재료를 접할 수 있는 지역 특성과 재료 본연의 맛을 즐겼던 평양 사람들의 기질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예상해본다.


평양냉면은 본디 하나였던 우리 민족이 조선시대부터 즐겨 먹었던 음식으로 거기서부터 이어진 명맥은 19세기 말에 본격적인 두각을 드러냈다. 그 즈음부터 근대 도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함께, 이전까지는 특별한 날에나 집에서 만들어 먹었던 냉면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생겨났고, 1920년대 접어들면서 평양냉면집이 서울에까지 진출하였다. 이후에 1945년에 남과 북으로 분단되면서 남쪽으로 내려온 북한 동포들에 의해 냉면이 전국으로 퍼지게 된 것이다.

평양의 향토 음식인 평양냉면이 남북 정상회담의 환영 만찬으로 등장했을 때에는 조금 의아했다. 계절은 아직 봄에 있었고, 굳이 차갑고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이 만찬으로 등장한 것은 의아함을 키우기에 충분했다. 11년 만에 성사된 정상회담인 만큼 그들의 향토 음식을 내놓는 것이 인지상정이었을까? 하지만 단순히 그런 의미로 내놓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곧 하나의 답에 닿았다. 되려 슴슴하며 이도 저도 아닌 맛을 내는 평양냉면만의 특색이 정상회담의 본질을 관철할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냉면은 평양에서 출발한 음식이지만, 원래는 하나였던 우리 민족이 오래전부터 함께 즐겼던 의미 있는 음식이란 것은 앞서 말했 듯 분명한 사실이다. 평양 냉면의 슴슴한 맛은 재료 본연의 맛을 중요시 여겼던 우리 민족의 성향이 그대로 묻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미루어 보면 또 다른 말로는 어떠한 맛과도 융화될 수 있는 조화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한쪽의 색이 뚜렷한 음식은 되려 수십 년 동안 떨어져 있으며 깊어질 때로 깊어진 민족과 민족 사이의 골에는 맞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함께 즐겼던 음식이며, 어떠한 것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모호한 경계를 가진 평양냉면이야 말로 깊어진 골을 가진 두 나라가 음식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하고자 했던 가까워지고자 하는 용기였을 것이다.


분명, 모든 아픔을 헤아리며 날을 세웠던 손을 풀고 서로를 똑바로 쳐다보자는 약속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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