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위한 위로가 아닌 '무마撫摩'

by 전성배

잠들었던 것들은 눈을 뜨고, 추위에 죽어간 잔재에는 그것들을 거름 삼아 싹을 튼 새 생명이 선명하다. 유독 짧고 옅게 느껴졌던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생명들이 눈을 뜨는 경칩이다. 예년보다 춥지 않아 겨울이란 이름이 무색했던 올해도 어김없이 절기는 시기별로 가감 없이 찾아왔다. 사정이나 사연을 일체 듣지 않는 절기의 행보에 올해는 조금 야박한 마음이 들 정도다. 아마도 계절이란 이름이 무색할 만큼 요즘은 연일 계절에 맞지 않는 날이 계속되기 때문일 것이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미세먼지라는 용어를 실생활에서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봄철이면 간혹, 떠나간 겨울이 시샘을 부리는 듯한 꽃샘추위와 함께 그것이 누그러질라 치면 찾아오는 황사가 전부였던 것 같다. 하지만 어느샌가 미세먼지라는 말이 떠돌기 시작했고 다행이라 해야 할지, 말 그대로 미세했던 먼지가 안겨주던 불편함은 체감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약했다.


그런데 지금은 미세먼지라는 미개한 이름이 결코 사사롭지 않다는 걸 절실히 느낀다.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단 수년만에, 일 년 내내 미세먼지라는 이름이 계절의 꼬리표처럼 따라붙기 시작했고, 작년 이 맘 때와 확연히 차이 날 정도로 바로 앞까지 뿌옇게 만드는 미세먼지가 우리나라 전역에 내려앉았다. 마스크를 하지 않으면 도저히 밖을 나설 수 없는 날씨. 그럼에도 절기는 가감 없이 찾아온다.


결국, 생명이 눈을 뜨는 뜻깊은 날마저도 하늘은 뿌옇고 모두의 얼굴은 구겨져있다. 절기가 살아 있다면 분명 알아챘을 것이다 우리의 아우성을. 그리고 안다고 한들, 절기는 묵묵히 자신의 본분을 다할 것이다.


삶에 찾아오는 몇 개의 시련이 이런 절기와 비슷하다.

와카레미치

불현듯 모든 불행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 같다고 말하던 친우의 말이 떠오른다. 게으른 것과 부지런하다는 것에 구분을 명확히 하기에는 그 기준이 모호하지만, 나의 눈에 그는 게으른 사람은 아니었다. 늘 가만히 있기보다는 움직이는 이였고, 쉼 없이 생각하는 이였으며 회사 생활에서도 그 버릇을 그대로 이어 솔선수범하는 이였다. 그러나 알지 못했던 병을 진단받았고, 사랑하던 연인과의 불화로 이별을 맞았으며, 경기의 악화로 회사에서 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을 겪게 되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바람에 밀려오는 파도처럼 급하게 들이닥친 것이 아니라 그의 생을 좀먹듯, 더디게 온 것들이지만 확실히 목을 조여왔다. 그래서 그는 늘 어두웠다.


불행이라는 화살이 의식을 갖고 허물어져 가는 이를 쫓아가는 듯, 그를 따라붙어 쉼 없이 괴롭히는 것 같았다. 나는 지금의 나이가 되고, 과거에 비해 더 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듣게 되면서 스스로 다짐했다. 그저 경청을 하며 그의 안부를 쉼 없이 묻는 것으로, 함부로 하는 위로 보단 손으로 어루만지는 무마를 해야겠다고. 그래서 그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쉼 없이 안부를 묻는 것이 나의 최선이었다. 하지만 불행이라는 화살이 자신을 쫓는 것 같다는 그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불행과 행복, 그리고 절기는 같은 선상에 놓인 채 똑같은 행보를 누리는 시발점이 하나였던 언어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들은 귀를 닫고 살며, 자신이 가야 할 곳과 머물러야 할 곳만을 머리에 새긴 채 나아가는 안하무인이 아닐까. 작은 생명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고 사정을 봐줄 만큼의 여유가 없는 것은 아닐까. 아니 애초에 그 만한 위치에 있는 이들도 아닐 것이다.


그러니 이런 이들이 화살촉을 세우고 한 명을 조르기 위해 달려드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저 우리는 그들이 항해하는 항로에서 애초에 그 자리를 지키던 섬이나 해초, 빙산 정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결국 친우에게 전하지 않겠지만 그를 위해 내가 하려 하는 무마는, 불행이 너를 쫓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사정과 사연을 봐주지 않고 때가 되면 찾아오는 절기처럼, 행복이나 불행은 인류가 생을 이어가는 동안 끝없이 도착지 없는 항해를 이어갈 것들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지금 불행이 지나가는 항로에 위치해있을 뿐이다.


그리고 불행이라 불리는 그는 결국 우리를 지나갈 것이며, 다음은 행복이라 불리는 배가 우리에게 닿을 거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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