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딩 에그 - 헤어져야 사랑을 알죠
잊힌다. 잊는다. 잊어버린다.
무언가를 잊는 건 자의로 행하는 것도 있겠지만 대체로 내가 손쓸 겨를 없이 자연스레 지워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아니, 자의로 지운다 생각하지만 그 또한 결국 자연스레 잊힌다고 말하는 게 좀 더 정확할 것이다. 나의 글에 자주 등장하던 '망각'이라는 인간에게 내재된 자연법칙에 의해, 육체가 영원하지 않은 수명을 갖고 사는 것처럼 생기 어린 젊음이 노화로 향하는 것처럼, 기억 또한 육체와 궤를 같이하며 기억의 종말은 망각으로 귀결된다.
기억이란 우리의 몸에 들어오고 새겨진 뒤 풍화작용을 거쳐 바래지고 이내 사라지는 단계를 밟는다. 거부할 수 없는 순리이며 인간이라면 마땅히 수긍해야 하는 진실이지만, 우리는 늘 사라지는 기억이 못내 아쉽고 미련이 남아 끈질기게 되새기길 반복한다. 이마저도 이기심을 버리지 못한 채 잊고 싶지 않은 기억만을 추려 끝없이 되새기길 반복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기억은 우리의 정성과 끈질긴 집요함을 알아주지 않고 망각으로 향한다. 이유는 간단한다. 기억을 되새기기 위해 꺼내 든 우리의 칼날 또한 새겨진 기억과 함께 풍화작용을 겪기 때문이다. 무딘 칼로 조각을 할 수 없는 노릇. 내 몸에 일어나는 일은 결국 모두 바람에 깎이고 빛에 바래져 사라지는 수순을 밟는다.
나는 언젠가 다른 글을 통해서 우리는 끝없이 기억하고 또 잊으며 살아간다고 말했다. 그래서 무의식 중에 우리가 다 담지 못하는 기억을 장소와 냄새, 시간, 사람에게 심어 두어 그곳을 가고 그 향을 맡으며 그 사람을 만나는 것으로 한 번씩 기억을 상기한다는 말을 더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의식이 닿는 범위 내에서만 행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 아꼈던 기억으로 향하는 길을 잃어버려 결국 잊어버릴 수도 있었다. 나에게 있어 하나의 음악이 정확히 그러했다.
리사 - 헤어져야 사랑을 알죠.
아주 오래된 노래였다. 햇수로 14년 전 내가 중학교 3학년일 무렵 나왔던 이 노래를 나는 고등학교 때 MP3를 손에 쥔 뒤에야 듣게 되었다. 컴퓨터를 이용해 벅스뮤직과 소리바다 등에서 UN과 플라이 투 더 스카이의 노래를 필두로 다양한 발라드를 들으며 아는 음악의 수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던 어느 날에 이 곡을 발견했다. 남중을 나왔던 나에게 성숙한 이들이 말하는 사랑이란 감정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저세상의 것이었지만, 나는 무엇이 그리 좋았는지 대중음악에 가장 대중 적인 소재로 사용되는 사랑이란 감정의 표현이 너무도 좋아 사랑을 말하는 음악만을 찾아다녔고, 그러다가 '리사'의 "헤어져야 사랑을 알죠"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이 곡을 참 좋아했다. 가사에 담긴 이별한 이의 사랑의 고찰은 당시의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 아니었지만 음색과 음의 높낮이, 하나하나의 음이 모여 막바지에 터지는 감격 등 모든 요소가 좋았다. 몇 곡 담을 수 없는 적은 용량의 MP3는 매번 음악을 넣으려면 기존 곡을 덜어 내야 하는 과정이 필요했지만, 리사의 곡은 매번 그 속에서 생존했다.
지금도 이 음악의 전주만 들어도 자연스레 가사가 떠오를 만큼, 음악이 손에 만져지는 것이었다면 '헤어져야 사랑을 알죠'라는 곡은 분명 닳았을 것이 분명할 만큼 질리게 들었던 노래. 하지만 그리 좋아했던 곡도 결국, 익숙함을 이기지 못해 나에게서 소홀해졌다.
개의치 않고 MP3에서 그 곡을 덜어내고는 다음을 기약했다. 그것이 10년이 훌쩍 넘는 공백을 가져올 거라는 걸 꿈에도 모른 채로. 나는 그날 좋아하던 하나의 기억으로 향하는 길을 잃어버렸다.
리메이크
지난 2020년 1월 19일, 가수 <스탠딩 에그>는 하나의 곡을 발표했다. 가끔씩 그의 곡 중 <오래된 노래>라는 곡을 글을 쓰며 들었던 터라, 좀 늦기는 했지만 2월이 된 무렵에 알게 된 신곡 소식에 바로 그의 노래를 찾아들었다. 곡의 제목은 <헤어져야 사랑을 알죠>. 가수 <리사>의 오래된 노래를 리메이크한 곡이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가사와 원곡자의 기교를 따라서, 원곡의 분위기와 느낌을 그래도 살려 그 위에 자신의 목소리만 덧댄 스탠딩 에그의 신곡은 지난날 나의'아차'를 자각하게 했다. 십 수년 전 '아차' 하는 순간에 길을 잃어 잊어버린 기억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동시에 그 곡에 얽혀 있던 여러 기억들이 곡과 함께 심연에서 수면으로 떠올랐다.
우리가 다 담지 못한 기억들이 새겨진 곳 또한 영원히 그것을 보관할 수는 없다. 어떠한 장소도 세월을 이길 수 없는 노릇. 그렇기에 기억이 깎이고 닳아 서서히 사라지는 순리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기 위해선 되새기는 과정이 필요하며 그 방법은 우리가 서로의 기억을 되새겨주는 것이다. 내 기억을 위한 칼날은 무디지만 상대를 위해 기꺼이 꺼내 든 칼날은 다시금 예리하게 벼려지기에 가능한 일이다.
서로를 위해 꺼내 든 칼날은 오래된 기억의 음각을 새기고, 그로써 기억은 한 차례 더 세월을 이길 힘을 얻는다. 이것이 반복된다면 기억은 간접적인 영원에 이른다.
장황한 이야기를 드렸지만 실은 모두가 알고 계실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계속해서 발표되는 리메이크와 오래된 명작이 계속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움직임. 내게서 흐려진 기억을 타인이 대신해 말해주었을 때 다시금 '아!'라는 감탄사와 함께 선명히 떠오르는 순간들이 이를 증명하니까요.
우리 모두는 이미 '관계'라는 끈으로 묶였던 순간부터 작은 조각칼을 손에 쥔 조각가 된 것이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나의 조각가가 되어준 스탠딩에그에게 그리고 이 글을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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