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인 '윤리'를 떠올리면 학창 시절 이후 입에 담았던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까마득하지만, 그 뜻만은 사람이 사람일 수 있도록 하는 인간 고유의 특질과 고귀함을 의미하는 만큼 무의식 중에 우리네 삶과 우리가 삶을 대하는 자세 안에 깊숙하게 배여 하나의 습성으로 늘 함께 하고 있다. 우리와 사회, 관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언뜻 보면 무수한 가지를 뻗어 서로 촘촘하게 엮임으로써 구조를 견고히 하는 것 같지만, 이 숲을 멀리서 본다면 결국 '윤리'라는 우리 스스로가 만든 도리에 의해 구성 및 유지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윤리는 그만큼 우리에게 있어 옳고 그름이 명확하고 흑과 백이 뚜렷하며 잘못과 잘한 것의 구별이 확고하다. 그렇기에 윤리의 기본 구조는 '이원적 개념'을 근간으로 한다. 그래서 직관적이며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한다.
사람이 태어나 나이가 들어가며 죽음의 길을 걷는 순리와 그 위에 자잘하게 분포한 윤리의 파생형인 양심과 도덕심은 남의 것을 탐하지 말아야 하고 약자를 도울 줄 알아야 하며 누군가를 해 한다거나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 언질 했고, 우리는 어릴 적부터 이를 수시로 귀에 담으며 성장해 왔다. 그런데 이 같은 절대적이고 명백한 기준이 흔들리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이 계기는 그 대단한 윤리도 한낱 인간이 만들어낸 발명품 중 하나에 불과했다는 걸 알려주었다.
절대적인 기준에 찾아온 지진의 근원지는 정치가였던 '유시민 작가'와 카이스트 소속 교수인 물리학자 '정재승 박사'의 대화였다. 이 두 사람은 지난 2017년에 방영한 tvN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 냉동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기서 정재승 박사는 유시민 작가에게 하나의 가정을 던졌다. "불치병에 걸린 한 명의 억만장자가 있고 그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기술이 수 백 년 뒤에 개발될 것이라 할 때, 본인이 같은 상황이라면 냉동되는 것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다가올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가"
유시민 작가는 정재승 박사가 던진 질문에 냉동되지 않을 것이라 답했다. 아마도 그는 탄생과 죽음은 인간이 거부할 수 없는 필연적 순리로, 더 살고 싶다는 욕심에 이를 억지로 깬다거나 영생 또는 영원한 젊음을 바라는 행위는 그저 어리석은 욕망일 뿐. 순리에 어긋나고 나아가 윤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실제로 유시민 작가 언급한 말이 아닌 글쓴이 개인의 해석입니다.)
정재승 박사는 유시민 작가의 대답을 듣고 이번에는 같은 가정이지만 그것의 기준을 점점 낮추며 다시 한번 되묻기 시작했다. "그 기간이 수 백 년이 아니라 불과 수년 뒤라면? 확실히 과학적 치료가 가능한 병이 이지만 주어진 시간이 짧다고 가정할 때, 인간을 냉동하는 것으로 시간을 벌 수 있다면? 또 갓 태어난 아이가 유전적 병으로 인해 수년 내에 죽을 운명이라고 할 때 과학적 치료(유전자 조작)를 통해 기대 수명까지 살 수 있다면?"
유시민 작가는 정재승 박사에 질문을 다시 한번 들은 뒤 생각했다. 박사의 물음은 단순히 재미를 위한 질문의 성질을 벗어나 그 이면에 철학적 난제가 있다고. 작가는 이를 간파하고는 그다음 편에서 자신의 답을 들고 나와 다시금 박사에게 말했다. "정재승 박사의 질문은 단순히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를 넘어 과학 기술의 변화 또는 발전과 우리가 가진 윤리적 명제 사이에 중대한 철학적 물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는 윤리 그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라고도 생각했습니다. 기존에 우리가 가진 윤리적 기준은 '예' '아니오'로 갈렸지만, 어쩌면 우리의 윤리는 생각처럼 선과 악, 명과 암의 구분을 명확히 하지 못하고 앞선 질문처럼 점진적으로 그 구분이 '예'에서 '아니오' 혹은 '아니오'에서 '예'로 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떠한 가정이 주어지니 최초에는 아니라고 단정 지었던 것이 '예'가 될 수도 있겠다는 의심이 생겼을 때 확신했죠. 주어진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그 기준이 흔들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이 기준선을 어디에 그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이 글의 전반에 우리의 윤리는 명확한 기준을 두고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 한 가지 더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이는 앞선 진실에 상응하는 또 다른 진실인데 그것은 바로, 윤리는 절대적 기준을 제시함과 동시에 이를 통해 구분된 선택지를 해당 구분선 안에 귀속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시대적 변화에 따라 또는 합당한 가정에 따라서 우리가 절대적이라 생각했던 윤리적 기준점은 언제든 모호해질 수 있었다.
나는 이를 통해 우리가 만들어 우리를 지탱하라 명했던 사회 구조의 핵심이 (여기서는 '윤리') 별안간 뒤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불완전한 우리는 절대적인 것에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으로 종교인이 말하는 '신'도 있지만, 법과 윤리 같은 절대적인 기준을 세움으로써 이를 섬기며 살아가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아니 이 같은 방식이 우리에게 가장 넓게 쓰이는 보편적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 방법은 살아가는 동안 옳은 일은 하지 못할지 언정 그릇된 일은 하지 않을 것임을 다짐하게 하고, 억울함과 비통함에서 태어나는 원한과 원망을 최대한 막아주는 우리의 가장 원초적인 절대적 의지다. 그런데 이것이 언제든 흔들릴 수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 나 또한 유시민 작가가 느꼈던 그것처럼 삶을 유지해주던 절대적 의지의 붕개를 직감했다.
극통스러운 사실이다. 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 절대적이라고 생각한 윤리의 빈틈 앞에 그럴싸한 해답도 마땅한 돌파구도 제시할 수 없다. 글의 막바지를 적어가는 동안에도 나는 그저 막막해하기만 할 뿐이다. 하나 적어도 불완전 것에서 완전한 것은 태어날 수 없음을 이제는 확신한다. 더불어 자만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과 어떠한 명제 앞에서도 함부로 옳고 그름을 말한다거나 그것을 임의로 명과 암으로 구분 짓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함부로 누군가를 무언가를 가르지 않을 것이다.
혼탁해진 삶을 갈무리할 시간, 전자 수필집《삶의 이면》전성배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