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위탁 리스트

by 전성배

종종 기억이 부유스름해진다. 과거에는 초점이 나가도 금세 제자리를 찾았지만 근래에는 포커싱의 텀이 길어졌다. 그래도 양반이라면 양반이다. 아예 초점을 못 맞추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순간은 기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요즘 나의 하루는 포커싱을 맞추는데 반, 잃어버린 기억이 뭔지도 모른 채 슬퍼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는데 반을 할애하며 끝나간다. 고작 서른 하나밖에 되지 않은 내가 이 사정을 아버지와 어머니께 말씀드렸니 나무라신다. 기억을 붙드는 아귀힘은 젊을수록 좋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인 듯하다. 그럼에도 내가 잃어버린 기억으로 볼멘소리를 하니 요즘에는 진지하게 걱정을 하신다.


사실 오래전부터 나는 곧잘 까먹거나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기억이 부유스름해지는 경험이 급작스레 나타난 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전적 때문에 그나마 기억하고 있는 것들에도 슬슬 안개가 끼는 것이지 싶다. 친구든 연인이든 그들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한번씩 기억해야 할 것이 있었지만, 다음에 그들과 만났을 때 그 기억을 꺼내본 일은 많지 않다. 아이러니한 건 생업과 연결된 기억에 한해서는 잘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먹고살아야 하는 생존 본능이 기억을 저장하는데 일조하는 것일까? 혹은 '긴장'이란 장치 때문일지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들에는 '긴장'을 달아둔다. 메모를 한다거나 주기적으로 곱씹어 선명도를 유지하는 등의 과정이 여기에 해당된다. 긴장을 단 기억은 더 오래 기억되고 적재적소에 꺼내 들 수 있다. 친구와 연인을 대할 때도 긴장을 달아둔다면 까먹는 일은 현저히 줄어들게 분명하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들은 내게 긴장을 까먹게 한다. 그들 앞에서 나는 무의식 중에 긴장을 쥔 손의 힘을 풀어버린다. 편애하는 그들과의 만남만큼은 긴장을 풀고 느슨해지고 싶은 마음 때문일 터. 고집이라면 고집이다. 이기적이라 해도 변명할 마음은 없다. 이 관계에서 만큼은 긴장을 놓고 편해지고 싶다. 이 헤이함 때문에 자주 혼이 나지만.


"또 까먹었어?"


그런데 항상 타박만 듣는 것은 아니다.


"그걸 어떻게 기억해?"


잘 까먹는 내가 잘 기억한다고 칭찬을 받는 모순은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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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연인과 동인천에 놀러 갔을 때의 일이다. 평일이었다. 주말 이외에는 쉬지 못하는 그녀가 운 좋게 쉴 수 있게 되어 고민도 없이 동인천으로 향했다. 그곳이 지닌 평일의 온도를 그녀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꼭 동인천이 아니라 어디를 가든 휴일과 평일의 온도는 하늘과 땅 차이지만, 동인천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니 선택지는 없다. 그녀와 가장 먼저 간 곳은 한차례 함께 간 적이 있던 라이트 하우스였다. 우리는 브라우니와 마들렌, 자몽에이드와 아메리카노를 시킨 뒤 카페의 제빵 공간 뒤편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큰 창이 나있는 공간으로 향했다.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우린 한쪽 벽면에 크게 뚫린 창문이 가운데에서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전세를 낸 것처럼 우리의 작은 음성만이 공간을 떠 다녔다.


"평일에 오니까 이렇게 조용하구나. 주말에는 웨이팅을 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역시 오길 잘했지?"

"응 조용하고 좋다."

"사진 찍어줄게. 예전에 네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을 찍고 싶다 했잖아. 그때는 사람이 많아 못 찍었으니까 오늘 찍어줄게. 사람도 없으니 한 장만 말고 여러 장 찍자. 앞모습, 옆모습, 뒷모습 약간 측면을 보는 모습 전부 말이야. 다 예쁠 테지만, 더 예쁜 모습을 이번에 알 수 있겠다."

"주책은, 근데 그걸 어떻게 기억하고 있어?"


그녀의 물음에 뚜렷한 답을 할 수는 없었다. 그냥 그 순간 그날이 기억났고, 그때 구두로 약속한 기억을 이번에야 말로 이행해야겠다 싶었다. 내게는 그런 순간이 자주 찾아왔다. 우리가 자주 가던 동네의 곱창 집을 갔던 날에는 그녀가 일전에 말했던 '대창'이 떠올라 가자 마자 넉넉히 주문했다. 연애 초기부터 함께 단골로 다니는 연어집에서도 나는 그 시절 우리의 풋풋함이 떠올라 그녀에게 종종 들려주곤 했다.


"만난 지 얼마 안 됐을때 같이 여기 왔었잖아. 그때 너는 친구를 만나고 늦은 시간에 동네에 왔지. 생각보다 늦은 시간이라 집에 들어갈 만도 한데, 널 기다린 내게 미안했는지 너는 피곤한 것도 무릅쓰고 여기에 와서 내가 좋아하는 연어회를 시켰어. 기다려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나조차 신기한 일이다. 곧잘 까먹어 혼나는 내가, 가까운 사람과는 긴장을 하고 싶지 않다며 기억할 수 있는 것도 잊어버리는 내가, 그에 대한 벌로 기억의 초점이 자주 나가는 요즘의 내가 어딘가에 가면 오래된 기억을 잘도 꺼내든다. 내게 나무라던 그들이 어느 장소에서는 자신조차 기억하지 못하던 걸 기억하는 나를 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어떤 친구는 내게 "그럼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꼴 아니냐"라며 면박을 준 적이 있다. 그럴 수도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조차 설명할 길이 없으니 말이다. 나는 어떻게 이런 빈약한 기억력으로 그들도 잃어버린 기억을 기억하는 걸까.


오랜 생각 끝에 그럴싸한 가설을 세웠다. 나는 기억을 맡긴다. 내가 다 담지 못하는 기억을 장소, 시간, 시기, 냄새에 상관없이 염치 불고하고 맡긴다. 언제 찾아갈 거란 기약도 없이 맡겼다가 예고도 없이, 그곳 그 시간 그때 그 향을 맡으면 한 번씩 맡긴 기억을 꺼내어 너에게 들려준다. 그럼 나는 까먹어 혼이 나는 순간에도 칭찬을 받는 생경한 경험을 한다. 어색하지만 나쁘지 않은 그 느낌을 곱씹으며 다시 기억을 재위탁해둔다. 다음에 또 찾으러 오겠다고 기약도 답례도 염치도 없이 다짐한다.


따라서 나는 너와 많은 곳을 다니며 많은 계절을 느끼고 많은 시간을 보내며 많은 향을 맡아야 한다. 그래야 내가 다 담지 못하는 너의 기억을 더 많이 더 오래 너에게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럼 꽤 오랫동안 네게 좋은 연인이며 네게는 좋은 친구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과 농산물 사이의 교점을 말하다"

농산물 에세이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전성배 지음

「교보문고」 「yes24」 「알라딘」 「영풍문고」


전성배 田性培

aq137ok@naver.com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에세이 / 2021 .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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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면》 : 전자 수필집 / 2020 .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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