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에서

회상

by 전성배

동해에 왔다. 인천에서 어스름한 저녁에 출발해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에야 도착했다. 당신이나 나나 일을 마치고 곧장 출발한 탓에 얼굴에는 하루의 피로가 걸쭉하게 서려있다. 번진 화장을 성실히 수정하던 당신의 손은 밤 아홉 시를 넘겼을 때 멈췄고, 지금 당신의 눈가에는 아이라이너가 그림자처럼 번져있다. 당연히 나도 남말할 처지는 아니다. 얼굴은 기름기로 가득하고, 아침에는 뽀송했던 머리칼이 지금은 떡져있다. 나야 괜찮지만, 오늘 유난히 더 힘들다 했던 당신을 생각하면, 물을 것도 없이 숙소로 가 피곤을 씻어내고 누워야 했다. 밤의 이야기도 다음 날로 미루고 우선 피로부터 풀어야 내일 일정을 소화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당신은 한산한 주문진의 해변을 보며 조금 걷다가 들어가자 했다. 이왕 온 거 바람을 쐬고 공기를 맡다 가자고. 평소 무언갈 먼저 하자고 하는 법 없는 당신의 뜻밖의 제안이었다. 거절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한 번은 코앞까지 들이치다, 한 번은 먼발치에 들이치다 떠나는 파도를 조금 멀리 두고 우리는 걸었다. 저들이 갑자기 가까이 몰려와도 우리에게는 닿지 못하고, 소리만 선명히 남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우리는 걸었다. 나의 오른팔에 당신의 온몸이 매달려 있는 조금 우스운 모양새로 말이다.


평소 당신은 피곤에 찌든 얼굴이 되는 날이면 나와 떨어져 걸었다. 당신은 그것이 내게 숨기고픈 자신의 못생긴 부분이기 때문이라 했다. 나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 없다고 했지만, 당신은 그 얼굴이 된 날에는 한사코 내게 가까이 서지 않았다. 그런데 그 날은 해변의 어둠이 빛보다 명료해서 용기가 생겼나보다. 그리고 실제로도 당신의 얼굴이 윤곽 정도만 그려질 정도로 해변의 밤은 짙었다. 문득 나는 당신에게 묻고 싶었다.


"오늘 많이 힘들다고 했으면서 괜찮아? 내일 걸어도 되잖아."

"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걸을 수 있을 때 걸어야지. 자기가 좋아하는 거니까. 또 계획대로 내일 걷는다 해도 한 번보다는 두 번 세 번이 더 좋을 테고."


언젠가 우리가 처음 동해에 왔던 날을 당신은 아직 잊지 않은 듯했다.


매번 부산이나 서울의 호텔에서 휴가를 보내던 우리가 처음 동해에 간 건 그녀의 권유 때문이었다. 올해는 남해 말고 서울 말고 동해를 보러 가자며, 그녀는 강릉행 버스표와 숙소를 끊은 인증샷을 카톡으로 보내왔다. 드라마 '도깨비'의 촬영지이면서 카페로 유명한 곳. 서해보다 맑은 바다를 가진 곳이라는 강릉을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나는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강릉에 도착한 당일 밤 그녀는 밤새 복통과 들끓는 열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주말이었고, 근처에 병원은 고사하고 약국조차 없던 호텔 방에서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한 번도 이런 적 없는 그녀가 잘못되기라도 할까봐.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이 그녀를 쥐락펴락하는 건 나를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밤새 그녀의 신음에 같이 신음하며 부디 괜찮아지길 빌었다. 그녀의 배를 쓰다듬고 머리를 식혀주길 반복하며 아침을 손꼽아 기다렸다. 다행히 아침이 되니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는 그녀였다. 하지만 나는 괜찮다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곧장 인천으로 돌아와 그녀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생애 첫 동해는 그렇게 끝이 났다.


당신은 그 날을 떠올리며 내게 말하고 있었다. 자기 때문에 보지 못한 첫 동해가 미안하다고. 자신이 또 그럴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피곤한 것도 참고 동해를 걷자고 말하고 있었다. 걱정과 달리 내일도 모레도 괜찮으면 걷고 또 걷자고. 내가 좋아하는 거니까. 나는 당신의 속내가 뻔히 보여 가슴이 저렸다. 사랑은 쌍방향이라 하거늘 당신은 어찌 일방향으로 향하는 걸까. 혹은 자신으로 난 방향은 잔인하리만치 좁게 두고, 나를 향한 방향은 왜 그리 확장해두었을까. 당신의 얼굴이 어떻든 나는 늘 예쁘다 말했다. 강릉의 그 밤이 나는 아쉽기보다 인천으로 돌아온 당신의 몸이 호전되어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당신은 늘 내 마음을 무시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한다.


당신은 참.. 늘 넘겨짚기 바쁘다.



"우리의 삶과 농산물 사이의 교점을 말하다"

농산물 에세이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전성배 지음

「교보문고」 「yes24」 「알라딘」 「영풍문고」


전성배 田性培

aq137ok@naver.com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에세이 / 2021 . 02

@_seong_bae : 미문美文

@_siview : 농산물農産物

@seongbae91 : 페이스북

《삶의 이면》 : 전자 수필집 / 2020 .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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